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디뇽이 Apr 04. 2024

히키코모리 10년 경력자의 일기.49

개나리도, 목련도 있어요

벚꽃 시즌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근 10년동안 시절은 나에게 아무 의미도 없었다. 꽃이 피었다 지고, 녹음이 짙어지다 갈색의 계절이 오고 이내 하얀 세상이 찾아오는 몇 번의 순환 동안에도 내 온 세상은 일어난 장판을 테이프로 붙인 방 안에 있었다.


뭐 그건 그렇고, 중요한 건 그런 인생을 살았던 나에게도 요즘 학교 캠퍼스에 이쁘게 핀 벚꽃을 보며 그 풍경을 함께 나누고 싶은 사랑의 마음이 지금, 든다는 것이다.


"제가 자주 올리던 사진 기억하시나요? 똑같은 자리에서 찍는 기숙사 사진이에요. 해를 보며 제 몸을 소독을 하니 마니했던 장소가 저기예요. 저 나무들이 벚나무였나봐요. 며칠 전만 해도 없던 꽃장식이 생겼네요."


'꽃이 지고나서 가지마세요. 축제가 끝나고나서 가지마세요. 지금 예쁘게 핀 꽃을 당신한테 많이 보여주세요. 부탁이에요.'


말한 말도, 생각만 한 말도 있지만.

개나리도 목련도 예쁜데 소외당하는 것 같아서 챙겨주고 싶다.


'개나리랑 목련 사진도 많이 찍어주실래요? 목련은 이미 져버렸지만'


<기록>

3월 28일 목: 동대문구 1인가구 동네친구 첫 모임. 고립은둔청년지원사업 대체재로 신청했는데 새로운 사람들 만나는 게 쉬운 일은 아니구나 느꼈다.

3월 29일 금: 초대를 받아 합정 라디오가가에서 공연을 봤다. 모임도 해보고 그러니 권유도 쉬운 일이 아닌 것 같다고 느껴서 그 마음에 감사한 마음으로 응했다. 가는 지하철 길이 인생에서 타 본 지하철 중에 가장 붐볐다. 꽉 막혀서 균형을 잡으려고 애 쓸 필요가 없어서 편한 게 웃기기도 했다. 공연장 갔더니 아침 전공 강의에서 팀플 같은 조인 여학생이 거기 있었다. 서로 신기해했다. 공연도 잘 봤다. 공연자가 많아서 여러 감상이 들었다.    

 

3월 30일 토: 불교와 정신분석학 과제로 강원도 영월의 망경산사에 1박 2일 템플스테이를 갔다 왔다. 기차표가 없어서 새벽 버스로 가려고 5시에 일어났는데 일어나서 검색하니 오전 기차표가 한 장이 났다. 덕분에 시간이 여유가 생겨서 해놓고 가고 싶은 과제가 4개 정도 있던 것을 어느 정도 해결하고, 파일이랑 사진까지 보내놓고 마음 편하게 떠날 수 있었다. 일어나자마자 전 날 유치원에서 식당 아주머니가 챙겨주신 빵 3개랑 보온병에 담아논 커피를 아침으로 먹었다. 방학때 식당 쪽으로 청소나 심부름을 가서 일하고 있으면 꼭 바나나나 간식을 챙겨주시더니. 내가 늦게 학교 다니는 중인 것도 아시는 분인데 가끔 이렇게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주신다.  


북두칠성
내가 찍은 사진을 망경산사 인스타에서 어떻게 알고 스토리에 올렸던데 어떻게 알았지.

영월역에서 내려서 닭강정 먹으면서 동강 구경하고 영월터미널까지 걸어가서 버스를 탔다. 버스 타고 망경산사로 들어가는데 병풍처럼 늘어선 산 몸통 아래로 핏줄같이 시퍼런 강물이 흐르는 풍경이 전형적인 쉬러가는 곳 풍경이었다. 핏줄같이 시퍼렇다는 게 비유적인 표현인 줄 알았는데 할머니 욕창 속으로 실제 핏줄을 보고 나서 그런가 그냥 그렇게 보인다.


망경산사의 스님들의 수행방식은 약재, 산나물, 꽃을 가꾸는데 있어서 먹거리와 야생화 쪽으로 특화된 사찰이라고 보살님이 설명해주셨다. 그 덕분에 정말 맛있는 밥을 많이 먹었다. 체험하러 가서 탐진치 중에 탐, 식탐을 부려버린 게 죄책감이 들 정도였다. 그리고 나는 템플스테이 이후에 대단한 변화가 있었는지는 몰라도 확실한 건 산수유와 생강나무를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생강나무 꽃은 정말 생강맛이 났다. 심지어 끝으로 갈수록 매웠다. 그리고 템플스테이 하는 동안에는 확실히 자연 속에서 별도 보고 꽃도 보고 그러니까 마음이 편안했다.


아.


영월역 기차에서 내릴 때 영월 3대 닭강정 중 뭐 먹을지 고민하다가 가방을 선반에 놓고 내렸다.

기차역 바로 앞에 있는 이가닭강정을 사서 먹으면서 동강을 건너는데 가방이 없는 걸 알았다.

'ㅈ됐,'

까지만 생각하고 말았다. 욕하는 것도 악업이라면서요? 욕도 잘 안하게 된지도 꽤 오래됐는데 저 순간에는 그냥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왔다. 의식적으로 "됐"에서 끊었지만.

   

지난 번 지하철 선반에 놓고 내린 가방과 같은 가방. 그래도 한번 경험해봤다고 이번엔 도움없이 알아서 잘 대처했다. 산책할 때도 작년에 발목 접질렀던 곳에서 항상 조심하게 되니 경험은 정말 중요한 것 같다. 대중교통에서 가방을 유실해본 것이 평생에 처음 있는 일일 때는 당황하고 좀 힘들었지만 그 때 소소하게 극복해본 경험 덕에 이번엔 스트레스도 잠깐 받고 말았다. 가방은 무사히 돌아올 걸 알았다. 정말 친절하게 도움을 주신 영월역 직원분 감사합니다.


사실 아침에 세수를 하고 세안도구를 챙겨 넣고 이것저것 가방에 싸면서도 '이게 다 걱정거리같다.' 생각했다. 템플스테이까지 가서 자유시간에 과제용으로 노트북 챙기고 마우스 챙기고, 세럼을 챙길까 말까 핸드크림을 챙길까 말까. 핸드폰 알림처럼 숙제 알림은 머에서부터 눈앞을 다 가려버릴만큼 내려왔었다. 싸 온 번뇌를 잃어버렸다는 생각이 들면서 마음이 편해졌다. 자유로워지니까 숙제가 아니라 여행온 것 같아지면서 갑자기 웃음이 막 났다.   


결론적으로 가방에 바리바리 싼 것들 없어도 1박 2일 동안 아무 문제도 없었다. 핸드폰 충전이 문제였는데 나말고 강의 숙제로 온 여학생 두 명 중에 한 명에게 빌려서 해결했다. 충전기 보시. 영월역에서부터 뭔가 두리번거리는 낌새가 현지인같지는 않고 왠지 그럴 것 같더라니 같은 수업 학생이었다. 참 고마운 인연이 됐다. 같이 시간 전달을 못 받아 스님과의 차담시간에 일찍와서 기다리며 아이스브레이킹도 하고, 차담 시간에는 스님에게 전하는 내 사연을 옆에서 같이 들었으니 어느 정도 날 알게 됐다. 오늘도 어쩌다 옆자리에서 강의를 듣고 같이 기숙사로 갔다. 착한 친구다.


새벽 4시에 새벽 예불을 하고 108배를 했다. 108배가 나는 너무 좋았다. 기독교적 세계관에선 우상 숭배니까 하면 안되겠지만 교회를 안 간 인생 연차가 이제 모태에서부터 교회를 다닌 인생 연차를 많이 따라잡아가고 있으니 가벼운 마음으로 절을 했다. 몸으로 수행을 하는 느낌은 운동할 때도 그렇고 원래 내가 좋아하는 일이니 너무 좋았고, 1배를 할 때마다 무엇인가에 감사하거나, 반성할 것들을 말해주는데 그것도 좋았다. 사실 좋은 것들은 기독교나 불교나 다 비슷비슷한 것 같다. 또 나는 파란 새벽도 아주 어릴 때부터 좋아했다. 너무 오래돼서 까먹고 있었지만. 절할 때 나만 뚜둑거리는 소리가 나는 것이 아닌 것도 좋았다.  


좋은 목적으로 모인 곳에는 좋은 인연이 많은 것 같다. 사랑을 많이 느꼈다. 보살님들에게서, 다른 참가자들에게서도.

자기 전에 나에게 말을 걸어주러 찾아와서 이야기를 들어주시고 구독을 하시고 가신 분. 가방이 없다니까 수건과 세안도구 빌려주신 분.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터널이 있다고 나를 위로해주신 분. 영월역에 잠깐 차타고 가방 가지러 갔다오면 되는데 왜 이야기를 이제 하냐고 그건 무소유가 아니라고 하신 분. 이름을 부르며 커피를 내려주신 분.

좀 돌아가도 괜찮다고, 주눅들지 말라고 하신 주지스님.  

망경산사 들어가는 버스에서 "청소년입니다." 할 정도의 어린 신입생들인데 내 이야기에 잘 어울려주고 편견없이 나를 봐준 같은 수업 듣는 학생들.  


템플스테이 1박 2일 동안 핸드폰 메모장에 정말 많은 메모를 했다. 그것들을 남겨놨다가 글로 쓰고 싶었다. 과제 압박이 없는 편안한 날, 언제 다시 올지 모를 기회가 생겨서 그런지 급하게 글을 쓰다보니 그냥 생각나는 대로 써버려서 조금 속상하다. 계속 못 쉬어서 화요일에 8시 40분에 자서 10시간이나 잔 것도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그래도 여기까진 남겨야겠다.

 

  4월 3일 수요일

아침에 산책을 하고 내려오는데 멀리서 분홍색 귀여운 무언가가 보였다. 붕어싸만코 신제품 팝업이 설치되어있었다. 붕어싸만코는 내 최애 아이스크림에 속하고, 훈련소에서 부식으로 나온 붕어싸만코를 먹고 그 껍질을 예쁘게 펼쳐서 훈련소 공책에 붙여서 전역할 때까지 간직한 전력이 있을만큼 나한테 좀 특별한 기억도 있다.

귀여운 분홍색 큰 네모랑 붕어싸만코? 못 참는다.


그래서 일부러 공강 때 찾아갔다. 신제품을 줄서서 받았다. SNS 이벤트 줄 기다릴겸 오리지널이 낫다고 생각하면서 먹었다. 튜닝의 끝은 순정이라고 아무리 튜닝해봐야.. SNS 이벤트는 인스타그램에 벚꽃과 함께 신제품을 찍어서 올리면 선착순으로 붕어싸만코 티셔츠를 주는 것이었다. 붕어싸만코 티셔츠 자체가 재밌기도 하고 붕어싸만코라는 브랜드에 대한 평소에 내 호의적인 태도도 그렇고, 한정판, 선착순 같은 개념도 그렇고 제대로 마케팅 당해버렸다. 팝업 하나에도 굉장히 많은 기법이 들어가있구나 싶었다.


12시 타임에는 내 앞에서 티셔츠가 소진돼서 오기가 생겼다. 그대로 바로 앞 학생식당에서 밥을 먹고 나와서 다시 줄을 서서 티셔츠를 받았다. 너무 웃기고 재밌었다. 이런 거 해보고 싶어서 인스타도 해보려고 한 건데. 가족 톡방에 티셔츠를 입고 올렸더니 형이 "인싸네" 라고 했다. 혼자 줄 서긴 했는데요.  


입을 일이 있을까 모르겠다.



  싸만코의 뜻은? 싸고 많아서. 딸기블라썸붕어싸만코를 받는 줄에서 내 차례에 퀴즈로 나온 문제였다.

앞 사람 문제는 붕어싸만코 출시 년도. 정답은 91년도.

싸만코의 뜻은 연극 <불편한 편의점> 에서 처음 들은 건데 여기서 이렇게 또 써먹었다.

포스트잇이 많아서 언제쯤 저걸 쓰게 될 지도 모르겠다.


재밌네.




  

작가의 이전글 히키코모리 10년 경력자의 일기.48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