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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뇽이 May 16. 2024

도둑맞은 히키코모리

59번째 히키코모리 탈출 일지

뜬금없지만 히키코모리는 "틀어박히다"라는 일본어 히키코모루의 명사형입니다. 도둑맞은 히키코모리라는 건 박완서의 <도둑맞은 가난>의 주인공이 느꼈던 감정을 제가 얼마 전 느낀 것 같아서 지은 제목입니다. 정말 꼴같잖은 이야기인데요, 저한테 일종의 '히키코모리 부심'이라는 것이 있는 모양입니다. 저도 몰랐는데 몇 번의 경험을 통해 알게 됐습니다.


1. 청년이음센터에서 1년 정도 두문불출한 사람들을 만났을 때

2. 룸메이트가 자기도 비슷하다고 그랬을 때

3. 사촌동생이 자기도 똑같다 했을 때


그들이 생각하기에는 본인들도 집에 오래 있었다거나, 사회적 경력이 없다거나 하기 때문에 자신이 히키코모리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생각할 때 그들은 사랑도 연애도 해봤고, 밖으로도 다녔습니다. 

'아니야, 넌 나랑 비슷하지 않아.', '겨우 그 정도로?' 

충분히 저와 비슷하고, 그렇게 말할만한데도 이렇게 또 저는 사람을 밀어냅니다. 큰일입니다.  

 



12일 일요일

동대문구에서 실시하는(다른 구에서도 많이 합니다. 관심 있으시다면 알아보시면 좋을 듯합니다.) 동아리 지원 사업 활동으로 베이킹 원데이 클래스를 갔습니다. 4월에 휘낭시에를 만들었던 곳에 재방문입니다. 들어가자마자 역시 냄새가 황홀합니다. 기분이 좋아지는 버터냄새.


선생님이 저를 알아보시고 반갑게 인사를 하셨습니다. "다시 왔습니다." 첫 방문 때 수업이 끝나고 나가면서 다시 올지 모른다고 말씀을 드렸었는데 제 차례에 정말로 다시 왔습니다. 


먼저 도착하신 동네친구 펄과 이야기도 나눴습니다. 사촌동생이 히키코모리라고 제 이야기를 궁금해하셔서 브런치를 소개해드렸던 분입니다. 제 글을 10개 정도 읽으셨다고 하셔서 놀랐습니다. 제 브런치의 존재에 대해 알려드린 청년분들이 몇 분 있지만 글을 읽고 있다고 먼저 말씀해 주시는 분들이 잘 없다 보니 사람들이 으레 하는 말로 하고 지나간다고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제가 알 수 있게 가끔 좋아요를 눌러주시는 웅치님 감사합니다ㅋㅋ)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크게 말할 걸 못 그래서 후회했습니다.  


그리고 클래스 시간이 다 되어서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세상에, 두 번째(비스코티 만들었던 것까지 하면 세 번째지만 비스코티는 딴 데서 했으니)라고 처음보다 훨씬 능숙하게 헤매지 않고 잘 만들었습니다. 지난 회차에서 먹은 휘낭시에 맛을 생각하면서 이번 회차에는 반죽을 만들 때 정량보다 물엿과 설탕을 조금씩 더 넣는 재량도 발휘했습니다. 역시 뭐든 일단 해봐야 하나 봅니다.

완성이 되고는 다른 분들이 만드신 것과 하나씩 바꿔서 포장해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저는 기숙사로 돌아와서 밥을 먹고 디저트로 커피와 함께 한 번에 다 먹었습니다. 참을 수가 없습니다. 냄새가 좋니, 사부작사부작 만드는 게 좋니 어쩌니 했지만 결국 애초부터 전 먹기 위해서 베이킹 동아리를 하고 싶었으니까요.  


며칠이 지나고 베이킹할 때 입었던 옷을 꺼내 입을 때 옷에서 생각지도 못한 버터냄새, 빵냄새가 나서 행복해했던 제 모습이 떠오르네요. 취미가 됐든 가끔씩의 여흥이 됐든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건 꽤나 중요한 것 같습니다. 구움 과자! 구움 과자! 구움 과자!



13일 월요일

달력에는 빨간 볼펜으로 헌혈의 날이라는 메모가 돼있네요. 12월까지 동그라미를 쳐놓았습니다. 매달 헌혈의 날에는 기념품 두 배 이벤트가 있다는 포스팅을 보고 재밌는 정보라고 생각해서 기록했었습니다. 날짜를 맞춰서 가는 것은 너무 귀찮기 때문에 앞으로도 헌혈의 날에 맞춰서 헌혈하는 일은 없을 것 같지만요. 


의정부 누나가 영화 보러 갔다 오라며 표를 사줘서 파묘를 봤던 날입니다. 영화 감상이 끝나고(재미없었습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오다가 헌혈카페가 있길래 들어가서 헌혈을 했습니다. 그날 헌혈을 하면서 한마음혈액원 이벤트로 스타벅스 여행용 가방을 준다는 홍보물을 봤습니다. 내가 모르는 곳에서 이런 재미난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는 게 흥미로웠습니다. 현재 2 스택. 올해 전혈 헌혈을 두 번 했기 때문에 다음 헌혈 가능 일자가 되면 아마 가방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기념품으로는 영화교환권을 골랐는데 요즘은 문화상품권을 고를 것 그랬다고 후회하고 있습니다. 영화를 보러 가기가 귀찮네요. 교환권은 지갑 속에서 천 원권을 덮고 푹 자고 있습니다. 기간 만료 전까지 어떻게든 쓰긴 해야겠습니다.



14일 화요일  

아침 7시~8시 회기 연습실 예약을 했습니다. 올해 초 형님 청년이 알려줬던 "스페이스클라우드"라는 앱을 요긴하게 써먹게 됐습니다. 이래서 누가 뭘 알려주면 잘 알아둬야 하나보다 생각했습니다.  


<가창 실기> 과목에서 노래 발표를 또 해야 하는데 남한테 피해 안 주고 크게 노래 부를 수 있는 곳을 찾다가 연습실의 존재를 알게 됐습니다. 몸을 좀 움직이면 목도 풀릴 것 같아서 아침에 일어나서 기숙사 헬스장에서 40분 정도 짧게 운동을 하고 연습실로 출발했습니다.  


5월 2일에 처음 가본 이후로 두 번째 방문이었는데 이번에는 연습실 스피커와 블루투스 연결도 잘했습니다. 역시 두 번째는 다릅니다. 카카오페이 소식지에서 본 내용인 것 같은데, 늘 배우시는 인생을 사셨던 아흔의 할머니가 부끄러움은 배우는 과정에서 필수라고 말씀하셨던 것이 생각납니다. 쪽팔리기 싫어서 배우기를 주저하고, 시도를 머뭇거리는 삶을 저는 그만두렵니다. 처음부터 잘할 수 없기 때문에, "그래서 연습이라는 걸 하는 거란다." <art&fear> 책에서 본 문장도 떠오르네요. 두려움과 불안은 연습으로 극복합니다. 


연습실 가는 길에서 밴앤제리스 판촉 행사 홍보물을 보게 된 저는 운명을 느꼈습니다. 자주 사 먹지는 않지만 밴앤제리스가 최애 아이스크림 브랜드이고(패키징의 영향), 바로 전 날 소비자행동론 강의에서 교수님이 밴앤제리스의 사례를 다루는 프린트물을 내주셨기 때문입니다. 소비자의 지각과 관련한 군집 개척에 대한 내용이었는데.. 

아무튼 이렇게 "밴앤제리스"가 제 인생에 이틀 동안 바쁘게 등장하는 건 한 번 먹으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점심시간에 들러서 하프 베이크드랑 초콜릿 퍼지 브라우니 맛으로 사 먹었습니다.   


15일 수요일

아침에는 운동하고, 산책하고, 밥을 먹고 공부도 좀 하고 과제 글쓰기도 했습니다. 저녁에는 연극을 봤습니다. 배우에게 선물을 주는 관객인 나라는 연출도 할 겸,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예술 창조의 두려움과 고통에 묵묵히 맞섰을 연기자를 응원 할 겸, 선물은 있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급조했습니다. 양갱을 좋아하는 청년이라 기숙사 편의점에 남아있던 연양갱을 모두(9개) 샀습니다. 사장님께 포장지가 있냐고 물으니 빼빼로데이 때 썼던 포장비닐이 있다며 거기에 양갱을 담아서 리본을 묶어서 주셨습니다. 평소에 인사를 잘해서 다행입니다.          


관람한 연극은 SF연극제의 대미를 장식 중인 극단 어느날의 <멋진 신세계> 였습니다. 사전 지식 없이 연극 자체로 순수하게 느끼는 것도 장점이 있지만 한계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에 한 달 전쯤 멋진신세계를 다시 읽어보기도 했습니다. 오후부터 비가 오기 시작해서 가는 길은 조금 불편했지만 연극을 보기엔 운치가 있어 좋았습니다

퇴장하는 모습

같은 극단의 공연을 세 번째 보다 보니 익숙한 배우들이 생기는 점도 재밌었습니다. 왠지 모르게 좋은 배우도 생겼습니다. 

여러 배우들이 동시에 몸을 쓰며 연기를 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저렇게 재밌고 멋진 걸 자기들끼리만 몰래 하고 있냐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물론 그들이 몰래 한 적도 없거니와 누가 저를 못하게 말린 적도 없습니다. 그만큼 그 행위가 부러울 만큼 멋져 보였다는 것이겠지요. 영혼을 드러내는데 주저함이 없는 자유로운 인간은 참 멋있습니다.

각자 자신만의 산을 오르며 살면서도 관객들에게는 무대 위에서 멋지고 찬란한 감동의 순간만을 선사하고 퇴장하는 배우들의 모습에서 감동을 느꼈습니다. '연예인이구나!' 그게 배우고, 연예인이라는 업인가 봅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스트레스가 많이 풀린 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재밌는 세계를 또 하나 발견했습니다.


16일 목요일

아침에 산책을 하고 밥을 먹고 유치원 출근을 했습니다. 교실로 들어가자마자 말 드릅게 안 듣는 쌍둥이 아이가 "선생님 사랑해요" 스티커를 붙여줬습니다. 정리도 안 하고 툭하면 형제나 친구랑 싸우는 녀석이지만 이렇게 사랑스러운 면도 있다는 게 신기합니다. 몰랐으면 더 좋았겠지만 똥도 나보다 잘 싸고.


자격도 없는데(최소 2년의 교육과 자격증이 필요한데도) 선생님 소리 듣는 것도 그렇고, 참 과분하고 행복한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일하면서 가끔 마주치는 여러 비참한 감정들에 무뎌질 수 있는 것도 이런 순간들 덕분입니다.  


존재가 무상하고 오온이 변하는 것이라 그런지 처음 시작했을 때와 다르게 요즘은 출근하기 싫을 때가 많았는데 좋은 날이었습니다 오늘!  


힘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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