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그렇듯 나는 이번 주에도 나중에 해도 괜찮은 걱정들을 끌어안아 소중히 품고선 불안과 공생하며 지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이 이번 주 금요일이 유치원 소풍날인 덕분에 출근을 안하게 되면서 마음에도 여유가 생겼다. 그래서 기분 전환도 할겸 금요일 아침에 연습실 1시간 예약해서 가창실기 연습을 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간단하게 운동한 후 지하에서 마음껏 소리내고 나오는 일은 생각 이상으로 몸과 정신을 상쾌하게 해주는 것 같다. 팀발표는 진행이 안되고 있어서 여전히 불안 요소다.
8시, 학생식당에서 조식을 먹으면서 밥 사진을 찍는다. 워낙 사소하다고 여겨서 그런가, 아침밥 사진을 찍는 루틴에 대해서 이야기한 적이 없다. 재입학 초반에 가족들한테 학교 밥이 잘 나오는 걸 보여주려고 찍기 시작했는데 언젠가부터 손목닥터9988 식단 기록용으로 바꼈다. 손목닥터 포인트도 4만 얼마 모은 것 같다. 스마트워치 두 개 이슈로 초반 두 달 정도 포인트를 안 모았던 걸 생각하면 그래도 부지런히 한 것 같다. (포인트를 모으려면 시계 두 개를 차야했어서 받은 시계를 반납할 때까지 못 모음)
4만 6천이구나!
밥 먹고 씻고 9시 전공선택 과목인 <리더십개발>을 듣는다. 두 시간 반짜리 강의라서 끝나면 점심시간이 된다. 이번 주 금요일에는 오랜만에 수잔나와 점심을 함께 먹었다. 나보다 높은 학번이길래 어떤 사람인가 궁금했었는데 수잔나의 소속 조가 바뀌는 인연으로 같은 조가 된 이후로 친해졌다. 세상은 신기한 일 투성이다.
샤브탕을 먹으며 연신 맛있다고 하는 수잔나의 모습을 보며 뭐라고 이름 붙혀야할지 모를 좋은 기분이 가볍게 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2주 전 식사 때도 받았던 똑같은 질문인 "소개받아 볼 생각 있냐"에 no라는 대답이 이번엔 yes로 바꼈다. 긍정적인 기분은 yes를 끌어내는 힘이 있으니까. 여전히 나같은 사람이 정상적으로 사랑을 할 수 있는지, 사랑을 받을 수 있는지 자신은 없지만 일단 한 걸음 떼보기로 했다.
수잔나는 나와 속한 환경과 상황은 많이 다르지만 개인적인 성향, 가치관이 비슷하다보니 쉽게 친해졌다. 미국인인데다가 코칭을 하는 분이라 그런지 내 인생에 대해서도 열린 마음으로 대해주시는데 그것이 나를 편하게 해준다. 그래서 잘 이야기하지 않는 고민도 터놓다보니 소개 이야기도 나왔다.
2차로 편의점에서 대화도 좀 나누고 쉬다가 나는 오랜만에 셋째 누나 집으로 가기 위해 기숙사에서 짐을 간단히 챙겼다. 머리를 자르러 가는 김에 누나집에도 가는 것으로 주객전도가 되었다. 요즘은 그래도 다행히 누나가 마음이 예전보다 괜찮은지 와달라는 말을 먼저 하지 않는다. 이사도 하면서 환경도 좀 더 깨끗하고 넓게 변해서 좋은 영향이 있었을지 모르겠다. 집에 들어가기 전에 집 근처 노브랜드마트에 들렀다. 누나가 벨기에 살 때 마트에서 사와서 같이 먹었던 냉동 피자가 있길래 하나 샀다. 애들이랑 나눠먹을 아이스크림도 사고.
내가 누나 벨기에 집 찾아 갔을 때 사 먹었던 냉동피자라서 샀다는 건 안 하는 게 좋은 이야기일까? 그 얘기를 들으면 누나는 이혼 전 힘들게 살던 시절 생각이 나서 힘들까? 아니면 지금과 달리 이쁘기만 했던 어린 조카들이 떠오를까. 생각도 못 해보고 그렇게 이야기를 했다.
태권도 마치고 조카들이 도착하니 시간이 6시가 좀 넘었다. 아이들이 여유있게 쉬도록 내버려두었다가 7시 반쯤에 같이 돈까스 집에 갔다. "엉클이 사줄게~"했다. 몇 푼 안돼도 돈을 버니까 이런게 좋다. 누나가 여러번 이야기를 하길래 눈치를 채고 내가 대신 결정을 내려준 돈까스집은 사장님이 장사를 잘하시는 티가 났다. 섬세하셨다. 섬세하고 예민한 것은 무던한 인간들에 비해 인생을 고통스럽게 살도록 만들기도 하지만 좋게 발휘되면 확실히 강점이 되는 것 같다.
편식이 심한 둘째도 잘 먹고 전반적으로 큰 이슈없이 무탈하게 식사를 마쳤다. 집으로 돌아와서 오랜만에 자기 전에 같이 즉석 이야기 만들기도 하면서 쌍방 좋은 시간을 보냈다. 아침에는 간단히 애들 식사를 챙겨줬다. 그리고 식탁 위에 <쇼펜하우어 소품집>이 있길래 조금 읽었는데 너무 재밌었다. 학교 도서관에서 빌리려고 제목을 메모를 했다.
조카들이랑 같이 있는 내 모습에서 위화감을 좀 느끼기도 했다. '아, 내가 유치원에서 근로장학을 하면서 아이들을 많이 상대해서 조카들을 대할 때도 뭔가 좀 변했구나.' 좋은 쪽으로 변했다. 신기했다. 왜 그런가 생각해보니 작년부터 7세 반에서 다양한 7세들을 경험한 것이 조카의 인격을 대하는 시각을 넓혀준 것 같다. 좀 더 너그롭게 받아주는 느낌? 상냥해진 느낌? 무의식적으로 일어나서 잘 몰랐다.
아이들을 좋아해서 유치원을 근로지로 정했는데 유치원에서 일을 했더니 다시 아이들을 대하는데 좋은 영향을 받았다. 이 선순환에 살짝 놀랐다.
토요일은 뭘했는지 모르겠다. 사진도 없고 기억도 없 아! 웹툰보고 놀았구나. 요즘 좀 예전보다 자주 그러지만 회복탄력성 저점 구간 지나간다고 생각하면서 죄책감 관리 하고 있다.
일요일인 오늘은 아침에 일어나서 침대에서 스트레칭하면서 세계가족축제- 누리마실 갈까 말까 고민했다. 저번 동대문구 가족 축제 세계음식부스에서 못 먹은 것들에 대한 아쉬움을 달랠 기회가 금방 찾아왔지만 '그 시간에 과제나 할까', '이번 축제는 음식값들이 전반적으로 비싸던데 돈은?'. '정신적으로 빈 부분을 자꾸 소비로 메꾸면 안돼.' 같은 생각들이 있었다.
그 생각들에 틀렸다고 말했다. 좋아하는 거고 재밌어하는 거니까 해도 된다고 허락해줬다. 잠깐 놀고 온다고 인생 안 터진다고.
동대문구 축제 때 먹은 음식들이 내가 평소에 좋아하는 성질들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걸 깨닫고 이번 세계음식부스들에서는 최대한 취향을 거슬러서 골라봤다.(디저트 빼고.) 그랬더니 불만족도가 너무 높았다. 자동정보처리, 휴리스틱은 생각보다 위대하다.
재밌었던 점 1. 줄이 길었던 파라과이 부스는 맛있어서 그렇다기보다 마지막 단계에서 소시지와 순대같은 것(현지인 피셜)을 써시는 분 손이 느려서 그런 거였다. 긴 줄은 손님을 끌어모았지만 정작 자기 순서가 가까워지기 전까진 줄이 길어진 진짜 문제를 알 수 없다. 먹어보고 나면 긴 줄의 원인은 좀 더 명확해진다.
평소같으면 긴 줄 뒤에 서기 싫은 욕구와, 긴 줄이 반드시 맛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하지 않을 선택이었지만 오늘은 취향과 다르게 해보는 날이었기 때문에 긴 줄을 서봤다. 역시는 역시다. 전형적인 밴드웨건 효과를 직접 체험해보는 재미는 만끽했다.
재밌었던 점 2. 미카엘 셰프의 존재. 집에 있을 때 좋아하는 예능은 요리를 소재로 한 프로그램이었다. <냉장고를 부탁해>에서 보던 미카엘 셰프 실물. 지나가던 성북동 주민분 말로는 이 축제 행사에 자주 오신다고.
재밌었던 점 3. 청년이음센터에서 알게되서 최근까지 가끔씩 교류하는 청년을 만났다. 그 분은 주민이시니까 그럴 수 있기도 한데 그래도 신기했다. 어머니랑 같이 마실처럼 나오신 것 같았다. 보기 좋았다. 인사를 하고 지나쳤다가 내가 세 번째 접시를 먹으려고 자리를 찾던 시점에 다시 마주쳤다. 그래서 같이 먹게 됐다. 청년의 어머니는 비건이셔서 비건 음식을 드시러 오셨는데 나에게 호박죽을 덜어주셔서 감사하게 먹었다. 딸인 청년이 어머니를 조금 단속하려는 움직임을 취했지만 그런 일들은 늘 그렇듯 성공하는 일이 없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왠지 모르게 흐뭇해지는 일이었다.
모녀가 음식을 먹는 모습이 보기가 좋아서 나도 모르게 모녀 사진을 찍었다가 정식으로 "사진 찍어드릴게요." 하고 사진을 찍어서 같이 보내드렸다. 하늘이 예뻐서 배경이 괜찮았다. 그리고 어머니의 포즈나 표정, 분위기가 우리 엄마 같아서 묘하기도 했다.
청년의 어머니는 먼저 귀가를 하시고 청년과 구경을 조금 더 했다. 디저트 배는 따로 있다고, 과자를 권하며 상냥하게 호객을 하시는 분에게는 이미 그 디저트 배도 썼다고 말씀드렸다. 구경하면서 조금 더 걷다보니 너무 목이 말라서 편의점에서 맥주 한 캔씩 사서 행사장 근처 오르막길 계단 그늘에 앉아 치즈롤이랑 먹었다. 이런저런 대화도 하면서 쉬었더니 마음이 편안하고 좋았다.
집으로 떠나는 길에 정류장까지 배웅을 또 해주셨다. 감사한 일이다. 나는 미안해하지 않았다. 상대가 원하는 일이므로. 버스를 타고 돌아가는데 치즈롤 가격 절반이 아닌 전부를 보내셨다. 같이 먹을 음식을 하나 사신다길래 현금이 있다는 구실로 기어이 내가 계산하고 반만 보내달라고 했었음에도. 나는 굳이 다시 반을 보내지 않았다. 이것도 상대가 원하는대로. 누군가 내게 호의를 베풀면 감사하면 될 뿐이다 싶다. 좋아진 건지 나빠진 건지 잘 모르겠다. 염치가 무뎌진 건지 성장한 건지. 잘은 모르지만 성장같다.
기숙사로 돌아와선 A.I 활용능력도 키울겸 생성형 A.I를 활용해서 과제도 했다. 'A.I 쓰는 건 일종의 반칙이야!',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가져야 해!'라는 내 시대착오적인 양심의 소리를 무시한 것이다. 오늘은 취향의 반대로 하는 날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