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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뇽이 Jun 18. 2024

히키코모리 10년 경력자의 일기

기말고사 진행률 80%

시험 후기


 시험이 하나 남았다. 월요일 두 개 치고, 오늘 두 개 치고, 짜계치 먹고 싶다. 금요일에 하나만 치면 된다!! 가창실기는 시험 대체 과제를 제출해서 시험이 없고. 어제 친 시험은 소비자행동, 투자론. 아쉬운 부분도 있지만 중간고사 결과 나왔던 거에 비추어 봤을 때 이번 시험도 잘 봤다고 보면 될 것 같다.


 오늘 시험은 잘 치진 못했다. 어려웠다. 작년 2학기에 재입학한 이후 경험한 시험 중에 오늘이 제일 어려웠다. 근데 쉬운 거보다는 이게 더 재밌는 거 같다. 쉬우면 공부한 게 아까워서 기분이 안 좋다. 공부해서 똑똑해진 걸로 만족하기에는 나의 공부를 말 그대로 '시험'해보는 데서 내가 퍽 큰 재미를 느낀다는 걸 알게 됐다.   


 특히 <불교와 정신분석학>, 내 기준으로 많이 못 했다. 시험지 내고 나갈 때 내 시험지 아래 깔린 시험지에도 여백이 많았던 것을 보면 나한테만 어려웠던 것은 아니겠지만, 내가 비교하는 준거점은 항상 "빈틈없이 꽉 채운 시험지를 내고 나가는 에세이형 문제에도 강한 24살쯤(3~4학년) 되는 인문계열의 야무진 여학생"에 있다. 왜 그런지 명확하게 의식화해 본 적은 없지만 현역으로 학교 다닐 때부터도 그랬다. '나는 이게 안되는데 이걸 어떻게 할 수 있는 거지?' '방법이 뭐지?' 거기서 오는 두려움이 있었다. 지금 의식화해 보자면 내 기준에서 그런 인생들은 미지의 세계이기 때문인 것 같다. 나한테도 친구들이 의문을 가졌던 강점이 있었으니 그냥 이 부분은 내가 모자라다 받아들여야겠다.


( + 아. 그래도 참 아쉽다. 요즘 허벅지 근육이 붙는 걸 느끼면서 어릴 때 해놨던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체감한다. 책을 어릴 때부터 즐겨 읽었더라면..!! )


 이번 시험기간의 최대 수확은 내가 그런 두려움과 열등감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는 것일 수도 있다. 무의식과 의식의 합일, 조화. 융의 개성화, 대극합일, 탄트라, 중관학... 아들러의 열등감을 원동력으로 한 향상..

약점을 극복할 수도 있고 아니면 이제 그런 강의는 피하고 내가 강한 부분을 살릴 수 있는 강의를 찾을 수도 있겠다. 근데 아마 나는 전자로 할 거 같다. 효율이야 떨어진다만 난 그렇게 살아왔다는 걸 경험적으로 알고, 나의 조절초점이 향상초점인 것도 이제 분명히 알기 때문에 행동 패턴이 예측이 된다. 


 그리고 14년 전과 10년 전에 내가 들었던 교양 강의 리스트를 봐도 그렇다. <국어국문학의 이해>, <독서와 토론-그리스신화>, <고전읽기-그리스비극(소포클레스)>, <심리학> 이렇게 보니까 내 취향이 참 일관성이 있었구나 싶다. 난 언제나 강의명만 보고 관심사에 맞으면 고른다. 성적을 잘 받을 수 있는지, 성적 평가 방식으로 수강 여부를 결정하지는 않는다. (심리적 거리가 가까워도 목적 중심적으로 의사결정하는 스타일이었구나 나.) 위의 강의들은 과목 특성상 전부 에세이형 문제로 출제되는 시험들이었고 그래서 나는 저 교양 강의들 성적이 좋았던 적이 없다. 죽 쒔다고 말하는 게 더 가깝다. 논리적 글쓰기는 지금도 못 하겠다. 14년전, 10년 전에도 못 할 거 아는데 그냥 좋아해서 들었다. 나 낭만 있을지도.  


 불교와 정신분석학은 중간고사 없이 바로 기말 시험만 보는 구조였다 보니 출제 경향 데이터도 쌓지 못했고 양은 많은 데다가 내용도 어려웠다. 그래서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통 감도 안 와서 이번에 시험 준비하면서 공부하기도 싫고 손에 안 잡혀서 공부도 많이 안 했다. 포기하고 싶긴 했지만 그래도 포기는 안 하고 계속 들여다보긴 했다. 봐도 모르겠던 게 문제지. 


 근데 걱정을 많이 했던 과목인 만큼, 부족하지만 나의 최선을 다해서 답안지 작성 후 시험지 제출하고 교수님께 "고생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하고 나오는 순간에 기분이 참 좋았다.  

실제로도 좋다. 좀 더워서 그렇지.

 유식학을 생각했다. 세상은 대상을 보는 나의 식에 달렸구나 정말. 마음이 편안하니 시험장을 나와서 본 세상이 참 따뜻했다. 


그래서 오늘은 저녁에 글을 쓰면서 놀아도 전혀 거리낄 게 없을 정도로 특별히 더 기분이 좋다. 어려운 시험 두 개가 다 이제 날아갔으니. 

 

 요즘 그렇지 않아도 기분이 더할 나위가 조금밖에 없을 정도로 편안했었다. 

이유는 첫째로, 앓던 이가 빠졌기 때문이다. 그 홀가분한 기분, 나를 옥죄던 고통이 사라져서 느끼는 해방감. 

둘째로, 앓던 이를 뺐기 때문이다. 이건 내가 뺐다. 위험회피에 대한 글을 썼던 것이 기억이 난다. 또 나도 모르게 최악의 상황을 상정하고 있던 일이 있었는데 그런 나를 인식하고 나서 그냥 이를 단숨에 뺐더니 다행히 좋게 해결됐다.


 중간고사 때는 스트레스 받아서 간식용으로 사둔 견과류랑 어메이징오트랑 빵을 시험 기간 동안 계속 많이 먹었었는데 이번에는 주말에 빵 2만원치 넘게 사서 먹은 걸로 선방했다. 억압을 시키면 안되긴 하나보다. 그 동안 그 빵집에서 먹고 싶었던 빵들, 참았던 것들을 이번에 종류별로 다 사 먹었다. 건강하게 잘 풀자. 이번 시험 기간에는 운동을 허락해서 운동을 하면서 했더니 더 스트레스 관리가 잘 돼서 먹을 걸로 안 풀었나보다. 시험기간에 해야할 일에서 내가 좋아하는 일인 운동으로 도망치면 안된다고 생각했는데 운동이 뭐 나쁜 것도 아니고 좀 할 수도 있지 생각하고 허락 했다. 그랬더니 운동하고 공부하는 게 더 집중 잘 된다고 느꼈다. 공부와 공부 사이의 시간 구분도 되면서 무작정 책상 앞에 오래 앉아있는 거보다 집중이 더 잘된다. 나를 안 써본 기간이 총 10년이다 보니 이래저래 시행착오하면서 내가 읽을 '나 설명서'를 쓰는 중인 듯 하다.



일상


 내일은 오랜만에 베이킹을 하러 간다. 청년 모임이랑 베이킹이랑 일정 조율을 같은 시점에 했는데 나는 베이킹이 좋고, 시험기간에 부담없이 바람 쐬기에는 베이킹이 나을 것 같아서 베이킹을 가기로 정했다. 청년들 못 본지 많이 오래돼서 아쉽기도 하고 속으로 좀 미안했지만 시험 끝나고 놀아달라 해야지. 


 목요일은 고립은둔청년 지원사업으로 기지개센터에서 오리엔테이션 일정이 예정돼있다. 시험기간 중 달력 빈 칸에 중간중간 콧바람 쐴 일정이 들어가있어서 다행이다. 공부하다가 숨도 좀 쉴 수 있으니.


토요일은 셋째 누나 생일 모임이 있고. 


지나고 쓰는 게 아니라 미리 쓰는 일기가 있나.. 나도 처음이야.


느꼈던 소소한 생각들


시험을 치러 가는 길에 찍은 사진들


시험을 치고 나와서 찍은 사진들


 와! 사진 찍을 때는 그냥 별 생각없이 '아, 시험치러 간다.' 하고 찍고, '아, 끝났다.' 하면서 찍었는데  

이렇게 모아놓고 보니까 대상이 확실히 다르다. 사후에 비교하려고 찍은 사진이 아니라 그 때 그 때 찍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찍었던 사진들인데, 시험 치러 갈 때 찍은 사진들은 뭔가 다 프레임들이 있어서 돌입 순간의 긴장이나, 압박이나 부담이 반영됐다고 해석할 수도 있을 거 같다. 시험을 치고 나와서 기분 좋게 찍은 사진들은 공통적으로 다 하늘이 있었네? 후련함, 개방감을 반영한다고 해석할 수 있겠네. 횡단보도 사진도 그렇고, 나올 때는 시험을 친 건물을 찍지 않았다. 신기하다. 무의식은 참 신기하네. 괜히 내 안에 타자라고 하는 게 아니구나.


공부하면서 ppt나 pdf 파일에 줄 긋는 형광펜으로 쓴 색상조합

 공부하기 싫어서 집중 못 하고 컴퓨터를 멍하니 보다가 발견하고 찍은 사진. 그리고 엄청 웃었다. 형광펜으로 많이 쓰이는 흔한 색깔아니냐? 하는 반박도 맞지만, 색상표에서 조절하면서 만들어서 썼다는 점까지 생각해보면 취향이 확실하게 반영됐다. "초등학교 때부터 좋아하던 색깔에서 바뀐 게 없네." 하면서 웃었다.


 나이가 좀 많긴 해도 나 역시 '시험기간의 대학생' 이라는 범주에 든 존재여서 그랬는지 약간 실성상태였나보다. 

( 시험기간의 대학생들의 일종의 착란상태를 모아서 보여주는 영상 ) 


228, 260. 아침에 이런 숫자는 처음 본다

 어제 오늘은 1교시도 없고, 유치원 근로도 없어서(시험기간이라 뺐다) 아침 밥을 늦게 먹으러 갔다. 평소에는 늘 1~20번대였는데 이것도 특별하다 싶어서 찍었다. 시험기간이라 아침 먹으러 오는 학생들이 확실히 많은가보다. 이런 거를 보다 보면 뭔가 정겹다. 밤 새는 학생들, 같이 모여서 배달시켜 먹으면서 공부하는 학생들, 손에 종이뭉치나 노트를 들고 다니면서 보는 학생들, 머리 안 감은 티나는 여학생들. 바뀐 캠퍼스의 분위기가 왜 이렇게 정겨운지 모르겠다. 나이 먹어서 그런가? 아니면 사람들이 꾸미지 않고 평소보다 더 생활감 있는 모습이어서 그런가? 둘 다겠지.



나와의 회포


 이렇게 또 한 학기의 끝이 코 앞으로 다가왔다. 시작과 끝이 명확하게 나눠진 어떤 기간 안에서 생활을 한다는 건 굉장히 의미있는 것 같다. 한 마디가 끝을 맞이하는 순간은 내가 그 동안 무언가에 충실했고 부단히 애썼음을 느끼게 해주는 계기가 된다. 그리고 그것은 좋은 일이고 도움이 되는 일이다. '학기'라는 것이 사라진 생활을 하게 되는 시점의 나에게 이걸 알려주고 싶다. 시간에다가 선을 그어서 목표나 시험을 정해보라고. 그럼 인생이 지금처럼 충만하다 느껴질 수도 있다고. 


 5월부터 얼마 전까지 쓴 글 보면 번아웃이니 어쩌니, 괴롭니 힘드니 우울하니 어쩌니 하던데 최근 1주일은 무슨 세상을 다 가진 사람 같이 군다. 참 이랬다 저랬다한다. 이랬다저랬다 하는 나를 안 좋다 생각하고 억압하며 살았는데 그래도 요즘 좀 배우고 읽었다고 사람은 원래 이랬다저랬다하는 거다~ 잘못된 건 더더욱 아니다~ 한다. 이걸 이제서야 배워서 알았다. 이제서야 알았지만 지금부터라도 잘 살면 된다. 지금 알아도 앞으로 또 까먹고 또 헤맬 것도 뻔하지만 힘내자. 힘내라고. 다른 사람이 말해주는 거보다 내가 말해주니까 더 좋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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