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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뇽이 Jun 24. 2024

히키코모리 탈출 후 소소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는 이야기

베이킹, 친구, 가족 모임

커버 사진은 동대문구 동아리 지원사업으로 결성된 동아리 멤버 분이 만드신 마카롱.


6.19 수요일 베이킹

 금요일 마지막 시험 전 비는 날에 '동일이의 동네친구' 동아리분들과 오랜만에 원데이클래스 모임을 가졌다. 휘낭시에, 마들렌, 비스코티에 이어 이번엔 마카롱에 도전했다. 오랜만에 만나는 거였지만 그래도 몇 회 같이 진행했더니 더 이상 어색하지도 않고 불편했던 기운들은 대부분 사라졌다.


 이 날 인상적이었던 것들은 선생님이 요즘 무언가 힘든 일을 겪고 있는 사람의 모습처럼 클래스 내내 마음에 여유가 없어 보였다는 것과 '나의 손해'에 관한 것이다. 우선 선생님은 우리 동아리 멤버들의 사소한 지나가는 모든 말에도 하나하나 반박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는 사람처럼 열심히 역효과만 날 것 같은 수강생 응대를 하셨다. 헤어질 때쯤 대화를 하다 보니 실제로 장사에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돼서 안타까웠다. 그러면서도 그 인과관계의 선후 순서가 뭘까 생각하는 내 고약한 심보를 위장하고 싶어서 친절하게 인사드렸다. 그리고 그때의 다정한 내 모습은 선생님 태도에 대한 나의 방어기제로써 나온 반동형성이었던 것을 문을 열고 나온 지 얼마 안 돼서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래도 힘들어하는 선생님에게 말 한마디 따뜻하게 해주고 싶었던 마음도 섞여있긴 했다.   


 '나의 손해'라는 것은 내 도안의 마카롱 꼬끄 개수가 다른 분들의 것들보다 적었다는 것이다. 진작부터 눈치채고 약간 속이 상했지만 선생님의 상태로 보아 조용히 넘어가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또, 같은 돈을 냈는데 가져가는 결과물 개수 차이가 나는 불합리를 동아리 사람들에게 쪼잔한 사람으로 보이기 싫다는 이유로 감수한 것도 있다.


6.20 목요일 기지개센터 OT

 2024년 서울시 은둔고립청년 지원사업이 막을 열었다. 예정된 시기보다 늦춰졌다고 하지만 나에게는 딱 좋은 타이밍이 아닌가 싶다. 시험기간 중에 첫 OT 일정이 나와서 몇 가지 대안 중 가능한 시간으로 신청을 했다. 찾아갈 때부터 지난 사업보다 굉장히 섬세해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바깥 생활이 없었던 사람들이 대상이므로 거기에 맞는 일반적인 수준을 넘어선 디테일한 안내가 돼있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부터 달라지는 건 나뿐만이 아니구나. 누구나 그렇구나. 이승철의 아마추어라는 노래가 생각난다.


 지하철 환승 한 번 더 하기 위해 역에서 가만히 서있기가 싫고 밖에서 좀 걷는 게 낫겠다 싶어 동대문역에서부터 내려서 걸어갔다. 작년에 처음 공간을 찾아갈 때 가졌던 여러 가지 크고 작은 두려움은 이번엔 단 하나도 없었다. 크든 작든 이 대목에서 성장을 이루었다고 생각했다. 도착해서 웰컴키트도 받고 사업 진행 계획에 대해서 들었다. 다른 사람들이 원하면 볼 수 있도록, 자신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담은 뭔가도 남기는 시간을 가졌다.


 집에 돌아와서 웰컴키트를 보니(기숙사 방도 이제는 집이라고 하는 게 편하다) 여러 가지가 들어있었다. 그중에 온열수면안대와 스트레칭 밴드가 다시 한번 센터 측 섬세함을 느끼게 해 주었다. 잘 자고, 잘 움직일 수 있는 것이 마음 건강에 중요하니까. 잘 자기 위해 근 1년 동안 최소 다섯 가지 노력을 꾸준히 하고 있는 나로서는 간증할 것이 많다. 사람들이 몰라서 안 하는 게 아니니까 그 간증을 입 밖으로 내본 적은 없고 내 수면 점수가 굉장히 안정적으로 잘 나오게 된 것에 스스로 대견해하고 말 뿐이다.


 작년 사업 참여자들이 신규 참여자를 위해 남긴 웰컴 메시지도 몇 개 있었다. 닉네임을 보니 절반 이상 누가 쓴 것인지 알 수 있었는데, 활동 당시에는 당사자들에게 직접 들어본 적 없는 그들의 은둔고립 사연이 적혀 있어 의도치 않게 그것들을 알게 된 것이 미안했다. 그리고 '그랬구나.' 하며 마음이 아팠다. 사실 첫 엽서의 첫 문장을 읽자마자 울컥했다가 참았던 것이다. 그런 마음이 들자 청년들 모임 단톡방에 한 마디를 안 할 수가 없었다. "닉네임이 누구인지 알 것 같은 분들이 계시는데요" 하며 장난스레 말을 열고 감정을 조금 전달했다.


 그리고 금요일에 있을 시험을 위해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이번 기말고사 기간에 생전 처음으로 에너지드링크를 마시면서 공부를 해봤다. 그래봤자 세 캔 마셔 본 게 다지만. 나도 그런 걸 해보고 싶기도 했고 공부시간 압박 때문에 새벽에 깼더니 오후에 졸려서 공부를 할 수가 없어서 한 번 먹어봤다. 솔직히 분다버그 레몬맛 먹고 싶은데 비싸니까 몬스터 시트라 골랐던 것도 있다. 어쨌든 효과는 분명하게 느껴졌고 도움도 분명 됐지만 한편으로는 피곤한 몸과 정신이 억지로 깨워져 있는 것이 느껴져 무섭기도 했다.


 6.21 금요일 종강 당일


난 알고 있다구.. 너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거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기숙사 1층 로비에서 편의점, 카페를 잇는 복도에는 서가가 있다. 그리고 그 서가에 <신화의 세계> 위에 <와인의 세계>가 한 쌍으로 함께 있던 것을 분명히 안다.  <와인의 세계>는 학기 초에 사라졌다. 애초에 대여가 안되고 비치된 곳에서만 봐야 한다고 안내된 곳인데도 나는 처음 일주일은 기다려보았다. 돌아올 것이라고 믿어봤다. 근데 결국 종강하는 날까지 돌아오지 않았네? 그렇게 됐구나. 그렇게 했구나.


 10시 좀 넘어서 이번 학기 마지막 시험지를 제출하고 나오니 수잔나가 오비스홀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해리와 큐라는 중국인 유학생 커플과 함께. 넷이서 같이 스타벅스에서 대화를 나누었다. 큐가 졸업시험 대체 강의에 대한 정보를 공유할 때쯤 내 학번을 물어봤다. 코로나 때 중국으로 돌아가는 바람에 한국어를 잊어먹었다는 큐는 말 대신 핸드폰 계산기에 숫자로 쳐보라며 자기 핸드폰을 내밀었다.


2010


의아해하는 큐에게 이번엔 c를 누르고 33이라고 적었다. 그러더니 엄청 놀라면서 남자친구인 해리에게도 알려줬다. 그 후에는 큐로부터 "전에는 뭘 했냐"는 근본 질문이 어김없이 돌아왔다. 한국어 소통이 어려운 사람에게 집에 있었다는 이야기와 그 이유를 여러 가지 방식으로 표현을 하다 보니 여러 번 반복적으로 이야기해야 했는데 그래서 유난히 부끄러웠다.

그리고 간신히 알아들은 큐는 사뭇 점잖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고마워' 속으로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왜 속으로만 생각했을까. 입으로도 말했으면 좋았겠다.


 이런저런 주제로 대화를 꽤 오래 이어가다가 점심으로 마라탕을 먹으러 갔다. 내가 마라탕을 도전해 볼 생각을 계속하고 있는데 추천해 줄 만한 데가 있냐니까 같이 가서 먹자 했다. 그렇게 먹게 됐다. 내가 한두해 전, 처음 마라맛이라는 것을 접하고 거부감을 느꼈던 원인이 마유소스 냄새라는 것도 드디어 알게 됐다. 오랫동안 베일에 가려져있던 적의 정체를 밝힐 수 있었던 것이 이 날 있었던 일 중에 가장 좋은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생각보다 맛있었다. 생각이 많이 낮았어서 그렇지.


 마라탕을 다 먹고 헤어지면서 큐가 카톡을 알려달라고 해서 수잔나가 4명 단톡을 하나 만들었다. 엉겁결에 중국인 친구를 두 명 사귀었다. 짧지만 내 인생의 의미 있는 추억을 남겨줬으니 친구가 아니겠는가 생각한다.


 방에서 조금 쉬었다가 수잔나의 3시 시험이 끝나고 같이 수잔나 동네에 놀러 갔다. 청평. 수잔나가 한번 놀라오라고 이야기를 했었고 권한 입장에서 재차 권유하기보다 권유받은 사람이 먼저 이야기하고 스케줄 잡는 게 낫다는 걸 알게 됐기 때문에 시험 끝난 금요일에 가도 되겠냐고 내가 물어봤었다. 그래서 가게 된 청평.

  

 내 상상으로는 수잔나 집 근처에서 밥을 간단하게 먹고 돌아오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여행, 관광을 했다. 일단 청평역에 도착해서 나오자마자 교외의 편안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어 좋았다. 그리고 수잔나 차를 타고 꿈의 동산 놀이공원에서 식사를 했다. 처음 산을 올라갈 때 멀리서 보이는 모습이 굉장히 인상 깊었다. 요새나 성 같은 느낌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수잔나를 기다리게 할 수 없어서 사진을 찍지 못한 것이 아쉽다. 한식당에서 수잔나가 좋아한다는 김치전골을 먹었다. 손님이라고 좋은 곳에 데려와서 대접을 해주시니 굉장히 황송했다.


 그나저나 놀이공원에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나는 또 아포칼립스 영화나 드라마를 떠올렸다. 멸망한 세계에서 유독 자주 등장하는 '텅 빈 놀이공원'이라는 것을 만끽했다. 후식으로 젤라또를 먹는데 사장님이 굉장히 텐션이 좋으셨다. 행복의 편에 서기로 한 사람의 기운이 느껴져서 사진을 찍어도 괜찮으신지 여쭤보고 사진을 찍어 남겼다. 수잔나가 다음에 또 오라고 하길래 친구들(청년들)이랑 와도 되냐고 했다. 모르지. 언제 그분들이랑 대성리로 1박 2일 MT라도 가게 될지.    


6.22 토요일

6월 23일이 셋째 누나 생일이어서 토요일에 누나 셋과 용산에서 식사를 했다. 형은 멀리 살아 서울모임에는 늘 없었고, 평소 같았으면 함께 했을 여동생도 출장 중이어서 이번엔 빠졌다. 그래서 약간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누나가 찍은 인증샷

 셋째 누나가 마지막으로 식당 도착했을 때 보냉팩에 싸 온 마카롱을 선물로 줬다. 누나들한테 생일 선물 준 적이 없는데 이번엔 마침 만들어놓은 마카롱이 있기도 했고(용케 몇 개 맛만 보고 냉동고에 고이 모셔놨다) 타이밍적으로 누나가 선택받았다. 생일이 며칠만 늦었으면 아마 마카롱을 다른 사람 주게 됐을 것이다.


 식사를 하고 크레페를 먹었다.

내 생각엔 처음 먹어본 거 같다. 맛있었나? 괜찮았다 정도인 것 같다.


졸린 조카를 업고 가는 둘째 누나와는 서로 응원의 말을 전하면서 헤어지고 큰 누나와 1호선을 같이 탔다. 생일 당사자인 셋째 누나는 조카들 데리고 화장실 간 길로 우리가(1번,2번,5번) 먼저 떠나면서 그대로 헤어졌다. 용산-남영 한 정거장 이동 후 큰 누나와도 헤어졌다. 한 때 같이 살았던 청파동. 푸른 언덕 동네. 다행히 큰 누나는 요즘 정서적 컨디션이 썩 괜찮아 보인다. 곧 열릴 문 앞에

서서 기다리는 누나의 어깨를 잘 가라고 하며 두 번 정도 주물러주었다. 힘냈으면.


6.23 일요일

책을 읽었다. <돈키호테>. 시험이 끝나서 건강한 오락거리로서 평소 읽고 싶던 책 리스트에 있던 돈키호테 1,2권을 수급했는데 언제 다 읽을지 모르겠다. 많이 두껍다. 웅치님이 브런치에 독서록도 공유하면 좋겠다고 말씀하셔서 그렇게 해보고도 싶기는 한데, 저번에 읽은 쇼펜하우어 소품집이랑 마음이 괴로울 때는 내 개인 메모도 못 남기고 반납했다. 할 수 있다면 최대한 해보겠지만 못 할 것 같긴 하다.


시험 기간 동안 쌓인 피로로 낮잠을 2시간이나 잤다.


룸메는 방을 뺀다. 전공 공부와 수능 공부를 병행하는 것이 많이 힘들었나 보다. (룸메를 만난 날) 

나와 두 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 한의학과 신입생. 의사라는 꿈을 위해 대학도 여러 곳을 다니고, 졸업을 한 해에 동시에 신입생으로 들어왔다. 정말 특별한 길을 가고 있다. 섬세한 배려도 일면 할 줄 아는 친구였다. 고마웠다. 떠나면서 건조대와 몇 가지 물건들을 나에게 짬처리했지만 기꺼이 응해주었다.


룸메의 짐이 모두 빠지고 반쪽만 채워진 짝짝이 빈 방에 혼자 남아있으니 기분이 참 좋다.

밥 한번 먹자 했었지만 한 번도 그러지 못하고 4개월이 지났다. 문자로 응원하겠다는 말만 뒤늦게 진심을 담아 전해보았다.


기숙사 이사철 풍경

룸메가 비대면으로 과외를 하던 자리. 룸메가 기숙사에서 마지막 과외를 하던 날, 점심을 먹으러 간 사이에 내가 지나가다 찍었다. 룸메는 일요일 오전에 3시간 정도, 그리고 평일에도 종종 과외를 했다. 룸메는 열심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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