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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뇽이 Feb 22. 2024

히키코모리 10년 경력자의 일기

백업, 초기화

어제 기숙사로 돌아왔다. 이별하는 거 마냥 아무 의미 없던 번호가 특별해졌다느니 카드키가 지갑 속에서 색깔을 채우니 어쩌니 했던 것이 무색하게 이전 학기와 같은 방을 다시 배정받아 쓰게 됐다. '다른 층, 다른 방향의 방을 쓰게 되면 생활이 어떨까?' 라는 기대감도 있었지만 막상 같은 방을 받고 보니, 그런 설렘이나 호기심보다 똑같은 패턴을 유지하게 된 것이 주는 안정감이 압도적으로 큰 것 같다. 일단 방에 들어갈 때 청소 상태 걱정이 없어서 좋았다. 저번엔 상태가 안 좋아서 나름 입주 청소를 했어야 했는데 이번엔 내가 해놨으니 믿을 수 있어서 안심이 됐다.   


입사 수속을 하고 2시간 넘게 짐을 풀고 정리를 했다. 그러면서 방을 비웠다가 다시 창고에 뒀던 상자들을 가져와서 채워 넣는 일이 컴퓨터 초기화하는 과정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면 얼마 전부터 노트북 소리가 안 나서 혼자 해결하다가 서비스센터를 찾아가도 안 돼서 초기화를 했던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백업해 놨다가 초기화시키고 다시 다운로드하고 딱 그 느낌이었다. 그 과정에서 필요 없는 것들은 정리가 되기도 하고 노트북 거치대 뒷면 사이의 먼지같이 평소엔 잘 들여다보지 않는 곳들을 꼼꼼하게 정리하게 되기도 한다.


초기화된 상태

입사를 하면서 기분이 좋아졌다. 다시 들어갈 짐들이 생각보다 간편하게 정리가 잘 돼있어서 그랬다. 또, 같은 자리다 보니까 와이파이 자동 연결이라든지, 쿠팡 배송지 정보라든지 하는 것들에 손을 안 대도 된다는 걸 알게 되어서다. 사소한 귀찮음을 겪지 않아도 된다니. 그리고 다시 더 짜임새 있는 생활을 할 수 있게 돼서 좋았다.


최근 사운드 이슈때문에 초기화한 노트북이 정작 소리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한글 같은 소프트웨어만 날려먹은 일이 돼서 짜증이 심했다. 같은 문제일 때 데스크톱으로는 검색해 보고 스스로 해결을 했었는데 이번엔 그래도 해결이 안 됐다. 찾아간 서비스센터에서도 해결이 안 되자 스트레스가 상승했다. 컴맹이라 나는 컴퓨터 부분에 문제를 겪을 때 스스로의 무지에 대한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는다. 무기력감이나 절망감까지 느낀다.


그러다가 기숙사 입사하면서 학교 정보처에서 다시 마이크로소프트 365를 다운로드하고, 어도비를 까는 과정에서 노트북 스피커의 x표시가 사라졌다. 어도비깔 때 McAfee 시큐리티도 같이 깔리고 컴퓨터 재시작을 해야 된다고 해서 재시작을 했던 거 말고는 변수가 없었다.


"?"


저 중에서 영향을 준 요인이 뭔지는 모르겠다. 알아내서 다음에 대비하고 싶기도 한데, 알고 싶지 않기도 하다. 그냥 앓던 이 빠져서 마냥 좋다. 노트북으로 영상 보거나 음악 들으려면 귀찮은 게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다행이다.


  



저녁에는 기숙사 헬스장에서 운동을 좀 했다. 방명록엔 입사 첫날부터 부지런하게 운동하러 다녀간 학생들의 이름이 네 개가 있었다. 그중에 A(근로지에서 만난 같은 과 남학생)도 있었다. 그걸 보고 카톡을 했더니 소소한 일상 대화를 좀 나누게 됐다. 내 카톡이 울리는 일은 잘 없기 때문에 저런 순간들은 일상이 충만해지는 느낌을 준다.


오늘 아침에는 눈이 많이 왔다. 산책코스 중에 늘 같은 자리에서 사진을 찍는데 눈이 올 때마다 늘 타이밍이 안 맞아서 사진을 못 찍었다. 수면 점수도 유난히 높게 나왔겠다 일어나서 물 마시고 사진 찍을 목적으로 산책을 나섰다.


  

드디어 잡은 눈타입 기숙사


눈 온 버전도 가지고 싶었다

산책하고는 아침으로 오트밀 먹었다. 그러고 발깔개 빨아서 널고 다시 기숙사 생활할 준비도 하고. 이것저것 하다가 등록금 고지서 인쇄해서 학교 은행에도 갔다 왔다. 점심에는 학생식당에 갔더니 무슨 일인지 사람이 엄청 많았다. 졸업식은 어제였는데.


점심 먹고 방에 돌아오니 룸메이트가 왔다 갔는지 사람은 없는데 짐이 들어차있었다. 앞으로 또 낯선 사람이랑 불편하게 한 방에서 살게 될 것이 그제야 실감이 나 걱정이 찾아왔다. 언제 올지 모르지만 돌아와서 짐 정리를 하면 정신사나울테니 가방에 노트북을 싸서 나왔다. 잘 지내봐야 할 텐데 사람도, 생활패턴도 어떨라나 모르겠다. 


노트북 가방에 반납기일이 된 책도 가지고 나와서 의대도서관에 반납을 했다. 중앙도서관과 달리 의대도서관은 처음에 갔을 때 구조가 미로같이 느껴져서 나올 때 길을 헤맸던 적이 있다. 원체 내가 공간감각이 약하고 길치지만 건물 안에서 길을 잃다니.. 의대생들은 머리가 좋아서 건물 내부를 일부러 어렵게 짓나 진심으로 당황했던 기억에 웃음이 났다.   




룸메를 만났다. 내 룸메를 랜덤 배정하지 않고 나이를 고려해서 한다는 걸 확실히 알았다. 저번이 우연이 아니었다. 이 친구도 인생이 굉장히 특색이 있다. 만나자마자 인사를 하고 이름과 학년, 나이를 묻다 보니 자연스레 사연 얘기를 안 할 수 없게 되어서 알게 됐다. 나는 저번 룸메 때보다도 첫 대화에서 더 많은 걸 오픈했다. 그게 앞으로 있을 대화에 있어서 덜 불편하게 해 줄 걸 알기 때문이다.


이번 룸메도 저번 룸메와 마찬가지로 기숙사 생활(룸메)에 대해 여러 가지 비슷한 걱정을 하다가 자기보다 더 나이 많은 사람을 만나서 크게 안도했다. 또 룸메들은 내 책상이나 공간이 깔끔하게 정리된 것을 보고 최소한의 합격점을 주고 시작한다는 것도 알았다. 특히 내 나이 덕분에 나는 그들에게 존재만으로 힘이 되는 사람이 돼버렸다. 잘 된 일이기도 하지만 난 이제 기숙사 행정실의 이런 배려인지 처분인지 모를 룸메 배정이 좀 짜증이 나려고도 한다.


사람에 대해서는 판단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지만 그런 생각은 언제나 이미 판단이 이루어진 다음에 찾아올 뿐이다. 판단하지 말자는 생각은 약속 시간에 늦은 사람처럼 머리를 긁으며 겸연쩍게 나타나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룸메에 대해 많은 판단과 평가를 내려버렸다. 이야기를 한 시간도 훨씬 넘게 하고(이 친구, 확신의 E라 서 나는 거의 대부분 듣기만 했다) 룸메가 다이소로 필요한 물건들을 사러 나가고 나서 나는 혼잣말을 했다.


"쉽지 않네..."   


무섭다. 불편하게 하지 않고 나도 불편하지 않고 지내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그런 것들이 당장 오늘 밤부터 찾아올 것이라는 게 무서운 것이다.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는 수양의 기회라고 스스로 아무리 타일러도 겁이 난다. 생활하기도 전부터 이러고 있는 내가 어이가 없다. 사실 귀엽기도 하고.


"에라이, 그냥 지내다 보면 또 8월 돼서 방 빼겠고 있겠지 뭐."


제발 저런 무감하고 느긋한, 밝은 마음을 갖게 되길 바라면서 괜히 한번 웃으며 말해 본다. 또, 이번 주말과 다음 주에 누나들 집에 갈 스케줄과 다음 주에 있을 동아리 모임을 떠올리며 좋은 기분을 도핑한다. 월요일에 저녁을 같이 먹기로 한 A도 생각해본다. 좋은 기분을 주입하기 위해서 하다하다 아직 못 잡은 등산 일정까지도 미리 끌어다가 쓴다. 청년들이나 A같이 편안한 사람들을 만나고 알게 됐다는 건 얼마나 좋은 일인지. 앗. 그들을 기숙사 방에서 처음 만났다면 얘기가 달라졌을까. 아무튼 다들 오늘따라 좀 보고 싶다.


마지막으로, 아무 말이나 하는 거라며 자기 집에서 살라던 누나의 말이 떠오른다. 거리만 좀 가까웠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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