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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뇽이 Feb 22. 2024

히키코모리 10년 경력자의 일기

되돌아보기, 정리하기

김천으로 내려간 김에 남은 방학 동안 아래 지역으로 차를 타고 산행을 다녀볼까 했는데 허리가 아파서 무리하지 않고 쉬기로 했다. 운전하면서 지리산, 팔공산으로 다니고 산 밑에서 밥도 먹고 2박 3일 정도 여행을 하려고 했었는데 안타깝다. 그래도 비슷한 뭐라도 하고 싶어서 아쉽지만 고향인 구미관광을 했다. 고향을 관광한다는 게 이상하지만 오랫동안 익숙했던 장소를 이방인의 시선으로 새롭게 접근하니 생각보다 특별한 게 많았다. 금오산 정상에 갔다가 내려와서 구미중앙시장 구경도 하고 음식도 사고 그랬는데 나름 재밌었다. 


현월봉, 해발 976m

금오산은 소풍이나 체험학습이나 백일장이나 등등 학교에서 정해진 일정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혼자서 오롯이 자유롭게 즐기니 더 좋았다. 주차장에서 네이버 지도로 금오산 정상인 현월봉에 다다르는 여러 루트를 확인했다. 많은 선택지를 보면서 '여기 살 때 이런 옵션이나 하나씩 다 해볼걸.' 싶었다. 왜 떠나고 나서야 너무 좋았던 것들, 가치 있는 것들이 보이는 걸까? 아쉬운 마음을 접어놓고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등산로 입구로 향했다.   

법성사 풍경

법성사라는 절 옆으로 해서 가는 루트가 있었다. 지나는 김에 절에도 가서 구경을 하고 사진도 찍었다. 그리고 등산로 입구 음식점에서 키우는 진돗개 세 마리가 시끄럽게 반겨주는 것으로 등산을 시작했다. 


힘들었다. 땀이 뚝뚝 떨어지고 종아리, 허벅지에서 젖산이 분비되는 느낌이 마구 들었다. 정상에 다 와갈 때부터는 눈이 쌓여 있어서 미끄럽기도 하고 무서웠다. 겨울철 등산에서 아이젠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며, 내가 귀찮음과 무사안일주의로 부린 만용은 경험부족에서 나온 정말 치명적인 실수라는 걸 느꼈다. 다음 겨울에는 등산화랑 아이젠을 하나 장만해야지. 내려오면서 허리가 몇 번이나 뒤로 꺾이고 나서야 생각을 고쳐먹었다.


약사암

정상에 있는 암자에서는 스님이 사진도 찍어주시고 나는 귀여운 강아지 구경도 했다. 눈앞에서 둥실둥실 떠가는 구름을 보면서 표석에 기대어 가져온 과일이랑 초콜릿도 먹었다. 원래도 맛있는 건데 상황적으로 극대화돼서 더 꿀맛이었다. 지친 다리가 쉬는 동안 바람이 계속 강하게 불어왔는데 그게 몸도 가슴도 너무 시원하게 만들어줬다. 다음에 청년이음센터 사람들이랑 산에 가면 도시락을 싸가자고 할까 싶었다. 마음도 좋지만, 정상에서 밥 먹는 분들을 보는데 너무 부러웠다.


하산할 때는 다른 루트로 내려왔는데 가다 보니 익숙한 루트여서 반가웠다. 산을 다 내려와서 주차장까지 또 30분 정도 걸었다. 총 6시간 정도만에 차를 세워놨던 산 아래 대주차장에 도착했다. 등산객들 사이에 있을 땐 몰랐는데 산 아랫사람들 속에서는 땀으로 샤워한 내 몰골이 너무 위화감이 들었다. 하지만 내 바지랑 신발에 묻은 진흙 범벅들이, 치열했던 나의 싸움을 증명해 줌으로써 변명거리가 되어주리라 생각했다. 어느 순간 오히려 더 위용이 넘치기도 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닭강정을 좀 사갈까 해서 시장에 들렀다. 닭강정과 산은 나에게 사연과 추억이 있는 조합이기 때문에 닭강정을 먹어야 했다. 하지만 닭강정은 없었다. 호떡 아주머니한테 여쭤봤는데 닭강정집이 둘 다 닭이 없다고 며칠 동안 장사를 안 하고 있단다. 무슨 사정인 건지 영문은 들어도 통 모르겠고 마음은 허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대신 초등학생 때 엄마가 맛있는 호떡을 사줬던 기억이 있는 길에서 호떡이랑 순대, 김밥, 튀김을 샀다. 집에서 같이 먹었다. 사과 와인 먹은 게 이때였나.




다음 날 오전엔 다시 서울로 올라갈 날이 정해져서 기숙사 입사에 필요한 폐결핵진단서를 발급받으러 병원으로 갔다. 걸어가려는데 아빠가 "걸어가든지, 차 타고 가든지, 자전거 타고 가든지." 하시길래 오랜만에 자전거를 탔다. 넓은 시골 도로에는 차도 잘 없어서 기어를 최대로 올리고 허벅지가 아플 때까지 실컷 빠르게 달렸다. 너무 좋았다. '왜 좋은가.' 하고 내가 좋아하는 다른 것들과 공통점을 생각해 봤는데 나는 내 몸으로 나의 속력을 높이는 행위를 좋아하는 것 같다. 달리기도, 스노보드도, 자전거도. 몸에 찾아오는 힘든 느낌과 그걸 이겨내는 것, 동시에 불어오는 맞바람. 이런 것들은 잠깐씩이지만 나에게 인생의 자유로움을 느끼게 해 준다.


작년 8월, 8년 만에 학교 재입학을 준비하면서 기숙사 입사를 위해 폐결핵진단서를 뗐던 병원에 반년만에 돌아왔다. 일상적인 것들이 고통스러울 만큼 비일상이었던 그때가 생각났다. 지금은 일상적인 것들에 일상적인 마음만 가지게 됐다. 약간의 감사함과 행복을 더해서. 


진단서를 자전거 가방에 집어넣고 다시 자전거에 올라탔다. 돌아가면서는 폐결핵진단서를 떼는데 2만 원이나 하는 것에 불퉁스러운 생각이 들다가 동네 구경이나 하고 가자는 생각으로 흘러갔다.   


자전거 산책

 

폐역사

문을 닫은 기차역을 구경했다. 이곳 말고도 얼마 안 떨어진 곳에 폐역사가 있는데 거기는 카페가 들어서있다.

아빠가 운전 연수를 해주실 때 소개해줬었던 곳인데 나도 꽤 마음에 들어서 가족들을 데리고 몇 번 더 갔다. 가족이 많아서 nCr 이 너무 크다 보니 못 데려간 멤버도 있지만 다 같이 간 적은 한 번 있으니까 괜찮다. 어쨌든 카페가 들어서있든 그렇지 않고 폐허처럼 남아있든 폐역사가 주는 뭔가 아련한 분위기는 내 맘에 든다.


고향과, 새로 이사 온 동네를 훑는 시간을 가지면서 내 상황인지 인생인지 마음인지 뭔지 모를 뭔가를 되돌아보고 다독였다. 역시 뭔지 모를 뭔가를 정리하면서 다음 학기도 남은 인생도 계속 힘내보자는 생각을 했다. 


몇 년 전 우리 집으로 날 찾아왔던 친구가 생각난다. 그 친구도 아마 그때 이런 뜻깊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거겠지. 오랜만에 내려온 고향에서 연락이 끊긴 오래된 친구를 직접 만나러 들렀지만 그때 나, 수염도 덥수룩하고 씻지도 않고 정신도 이상할 때라 못 볼 꼴만 보고 불편한 마음으로 돌아갔을텐데. 미안하다 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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