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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뇽이 Feb 19. 2024

히키코모리 10년 경력자의 일기

정리안 된 글. 내 개똥철학과, 여러 일들에 대한 기록.

구정 연휴인 금요일부터 일주일 동안 본가에서 지냈다. 연휴 초반 이틀정도는 누적된 피로 때문에 뻗어있는 시간이 많았다. 일주일 동안 잠도 적게 잤고 명절맞이 청소도 아닌데 세 개의 집을 연달아 치우게 되면서 허리 쪽에 대미지가 좀 왔다. 특히 기숙사 방 빼고 나온 날 와인 살 곳과 과자 살 베트남 마트가 반대 방향이라 짐 상자 하나를 들고 동분서주한 게 생각난다. 그때도 욕심 안 부리고 하나만 선택했어도 그렇게 힘들진 않았을 텐데 머릿속의 미션을 깔끔하게 클리어하고 싶어서 쓸데없는 무리를 했다. 욕심을 부리는 만큼 몸으로 대가를 치르라고 스스로 타박하면서 꾸역꾸역. 또 내가 좋아하는 방식이 그거이기도 하고.


스스로 부여한 첫 번째 과제는 호기심으로 들러 봤던 학교 근처 베트남 마트에서 우연히 발견한 내 취향의 과자 사기였다. 가족들도 좋아할 것이라 꼭 사가고 싶었다. 집에 가서 가족들이랑 같이 먹으면서 뒤늦게 알았는데 과자가 땅콩강정스타일이라서 명절 분위기에도 시기적절하게 어울렸다. 또 아빠나 둘째 누나가 좋아할 줄 알았더니 의외로 엄마가 맛있다고 많이 집어 드셔서 기분이 좋았다.


두 번째는 모임에서 만나는 청년이 추천해 준 와인 사는 것. 처음에 베트남 마트에 갔다 오는 시장 골목에 있는 와인샵에 들러 와인 찾을 구실로 구경도 한 번 슥 해봤지만 결과적으로는 없었다. 베트남 마트에서 다시 기숙사 근처로 돌아와 벤치에 잠깐 상자를 내려놓고 핸드폰으로 와인 살 곳을 검색하고 있는데 야생의 치대 졸업생 선배라는 사람이 전도를 하려고 나타났다.


 "교회 다니고 있어요."


전도를 하고 있다고 운을 떼길래 장황하게 말을 늘어놓기 전에 선수를 쳤다. 물론 거짓말이지만 목사의 아들로서 스무 살까지 한 주도 빠지지 않고 예배에 참석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딱히 거짓말을 한다는 느낌은 없었다.


교회를 다니고 있다 하면 대화의 목적을 상실해서 바로 자리를 떠날 거라고 기대했더니 오산이었다. 이 성령님의 감동 감화로 은혜 충만하신 분께서는 나를 그냥 놓아주지는 않았다. 알고 보니 명함을 건네주기 전까지의 빌드업이 더 필요하셨던 모양이다. 그 사이에 나도 일방적으로 당할 수만은 없어서 "혹시 근처에 와인 파는 데를 아시냐"라고 물어봤다. 이마트 에브리데이가 있다고 알려주셨는데 지도를 보니 걸어서 15분 정도 거리에 있었다. 어찌 됐건 마음을 살짝 열어놓고 대화에 응했더니 좋은 말씀도 들었고, 기숙사 관리인 아저씨가 학교에서 유명한 소문난 인싸라는 것도 알게 됐다. 무엇보다도 당장 가장 필요했던 정보인 와인 살 곳을 알게 된 게 큰 수확이었다. 가기 전에 마트로 전화를 해서 확인해 보니 내가 찾는 와인이 세 병 남아있다고 했다. 문제는 의외의 곳에서 쉽게 해결됐다.   


살 것들을 다 사고 셋째 누나 집에서 금요일 새벽에 차를 타고 본가로 출발했다. 이번에도 후회를 하긴 했다. 누나는 이혼 후 우울증이 좀 있고 집안 상태도 좋지 않아서 내가 한 번씩 주말에 가서 부엌, 화장실과 거실, 조카방 청소를 하곤 하는데 그런 날은 허리며 몸이 힘들긴 하다. 그리고 성격적으로도 이 누나는 말을 너무 자기 해석대로 하는 게 심해서 형제 중에 내가 가장 안 좋아하는 멤버다. 매번 '다음엔 그냥 혼자 가야지, 혼자 가야지.' 하면서도 도와줄 사람이 있냐고 묻는 상담사의 말에 "없다."고 대답했다던 식탁에서의 누나의 말이 마음에 이따금씩 떠올라 가게 된다. 내가 너무 무섭고 두렵고 자신감이 없을 때 '그냥 누가 대신 좀 해줬으면', '누가 같이 좀 해줬으면' 하는 생각을 했던 기억들이 나기도 해서 계속 모른 척을 하는 것이 오히려 더 마음이 불편하다.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 같기는 하지만 나를 위해서 기꺼이 그렇게 했던 엄마를 생각해서 엄마딸이니까 해준다 생각한다. 그리고 국내로도, 심지어 해외로도 봉사활동을 하러 다니는데 누나를 완전한 남이라고 생각하고 '이건 자원봉사다.'라는 마음 설정도 자주 한다. 지금처럼 이렇게 내가 누나한테 뭘 해주는 것만 계산하면서 내가 받는 것은 카운팅을 잘하지 않는 간사한 내 모습을 보는 것도 누나 집에 가면 힘든 이유 중에 하나다.       


앉은키가 젠장 맞게 큰 탓에 내려가는 누나 차 안에서 허리가 너무 아팠다. 다음엔 진짜 진짜로 기차 타고 가야 된다고 마지막으로 다짐했다.


5시간의 여행, 누나의 졸음운전으로 몇 번 위험했지만 무사히 집에 도착했다. 도착해서 집 분리수거를 했다. 다른 가족들이 오기 전에 엄마는 집을 깨끗이 하고 싶어 할 것이고, 아빠는 엄마가 평생을 말해도 집안일을 잘 돕질 않는다. 돕지 못한다. 뇌가 그쪽으로 발달이 안 된 것 같다. 성향 차이겠지. 분명히 가만히 보고만 있으면 엄마가 듣기만 해도 신경쇠약이 오는 힘든 소리를 아빠를 향해 할 것이기 때문에 스트레스받지 않으려면 내가 엄마 눈에 보이는 일들을 해치우는 게 해결책이다. 다행히 나는 이런 부분에는 아빠를 안 닮아서 내 눈에는 엄마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 것들이 보인다.


40년 넘는 결혼생활 동안 엄마한테는 "좀 쉬어요" 나, "나한테 시켜요."는 해결책이 아니었다. 아빠한테는 엄마가 아마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하고 지나치게 깔끔을 떨어서 공연히 저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내 생각엔 둘 중에 한 명이라도 반대편으로 건너와 줬든지, 아니면 중간으로 서로 반반씩만 왔으면 될 일인데 사람은 그게 안되나 보다. 그래서 나는 그냥 해야 되는 사람(엄마)한테 맞춰서 역시나 이 경우에도 '같이 해주는' 쪽을 답으로 삼았다. 성의와 체력만 온전하다면 인생의 무엇이 됐건 함께 해주는 것이 가장 좋은 해결책인 것 같다.


엄마는 중학생 때부터 외할머니 품을 떠나 살고 결혼을 하고서는 가난한 목사의 아내로 6남매 육아와 할머니 수발, 아빠 수발에 집안일까지 평생을 혼자 하다 보니 너무 슬프게도 어느 정도 정신병이 생긴 것 같다. 엄마는 동네 공중변소로 쓰인 교회 화장실을 20년 동안이나 날마다 청소를 했는데, 사람들의 대변이나 토사물을 매일매일 새벽 기도 끝나고 치우면서 그걸 박애나, 예수님의 삶을 실천하는 것으로 생각한 것 같다. 존경스러우면서도 나는 그것들도 당신의 몸과 마음의 병에 일조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아빠는 많이 는 부분도 있지만 여전히 대부분의 집안일 영역에서 저능아 같고, 소시오패스다. 아빠의 소시오패스 성향이 인생에서 그나마 좋은 쪽으로도 발현이 된 부분이 있다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아빠는 현실에 타협하는 목사들, 교단 시스템에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원칙이나 옮음에만 집착했고 그 결과 본인의 인생에서 의미 있는 스토리를 완성하기도 했다.


아빠의 생각이나 태도는 긍정적인 면도 있지만 어떤 면으로는 전형적인 경상도, 보수, 기독교, 꼰대 틀 안에 갇혀있어서 본인의 사상을 드러내는 말을 할 때마다 나는 속이 콱 막히는 갑갑한 느낌이 든다. 나를 수용하는 것뿐만 아니라 부모님도 수용하기로 마음먹었지만 이번 연휴 때도 그런 부분을 느끼고 못 참고 끼어든 순간이 두 번 있었다. 교정을 하고 싶어 하는 내 기질을 꺾어도 되는 건데 나도 그걸 완벽하게 못한다. 더 노력해야지. 아빠를 보면서 내가 유독 인지적 편향을 경계하고 다양한 관점을 얻으려고 애쓰면서, 전형적인 무언가가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나 자신의 호기심이나 성향 때문만이 아니라 아빠의 영향도 있겠다 생각했다.


4,5년 전쯤에 심부름 갔다가 아버지 목사실 책상 위에서 어딘가로부터 배송 온 퀴어 축제에 반대하는 책자를 봤던 적도 있었다. 아빠가 소록도에서 봉사를 하다가 쓰러져서 죽을 뻔했던 적이 있다는 큰누나의 말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내가 본 아빠는 늘 몸보다는 뜻이나 말로만 행했다. 그래서 아빠가 퀴어 축제 반대 집회 같은 것에 열성적으로 참여하거나 목소리를 높이진 않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그걸 본 순간 어떤 맥이 빠지는 느낌 같은 것이 들었던 기억이 있다.


'결국은 우리 아버지도 이 틀 안에 계시는구나.'


동성애를 반대해야 하는 근거들이 나열된 책자를 건조하게 읽으면서 나는 처음으로 동성애에 대한 내 생각을 정리해 봤다. 동성애가 종의 번식이나 집단 생존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만한 상황에서는 질병으로 취급하고 배척하던 것도, 종교적인 규율로 단속했던 것도 일정 부분 이해는 되지만 지금의 상황에서도 여전히 그런 생각을 유지하는 게 합당한가로 정리했다. 세상에 진짜 옳고 그름이라는 게 있는 것인지, 선악이 아니라 선택만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든다.


나는 어릴 때부터 '당연히' 교회를 다녔기 때문에 일요일에 교회를 가는 것이 당연한 삶을 살았다. 그러다 고등학교 2학년 때쯤 그 당연함 때문에 내가 죄의 대속이나 부활을 믿는다고 믿는 것인지, 나 스스로 처절하게 믿는 것인지 의문이 생겼다. 그래서 스무 살 때 상경하면서부터는 교회를 안 다니고 있다. 새삼 '당연하다'라는 것은 굉장히 주관적인 것인데도 정말 무서운 힘이 있는 것 같다. 내가 성전환 수술이라도 하지 않는 한 교회를 다니지 않게 된 것이 내 인생의 가장 강력한 당연함으로부터의 저항이지 않을까 싶다.   


나는 남자아이였지만 축구게임이 들어있는 깡통 필통이나 검은색 파란색보다 디즈니 공주들이 모여있는 깡통 필통과 소위 여자의 색깔인 분홍색을 좋아했다. 글씨도 여자애 같이 쓰는 좋아했는데 필통이나 글씨체를 보고 한 마디씩 하는 들을 때, 상대의 의도와 상관없이 나중엔 그런 것들이 그저 귀찮았다.   


 '나의 편견'은 내 뇌의 정보처리를 돕는 효율적인 범주화지만 나를 향한 '타인의 편견'은 귀찮고 불편한 것이다. 새롭게 만나는 사람들을 '얘랑 비슷한 사람'이라며 기존의 데이터 범주로 집어던지면서도 새로운 하나의 대상으로 섬세하게 살펴보려고 하는 모순된 노력은 늘 지치고 피곤하다. 어차피 그들도 나를 그들의 인간 서랍장에 모양별로, 색깔별로 분류하는데.

상대가 나를 위한 새 폴더를 만들기를 원하는 건 욕심이겠지?


당연하다는 것에 대한 의문은 초등학생 때부터 늘 간간히 있어왔다. 남자니까 예쁜 공주가 잔뜩 들어간 필통을 좋아하는 게 더 당연한 거 아닌가? 왜 내 거는 소중히 쓰고 같이 쓰는 걸 함부로 쓴다는 전제가 당연한 거지? 내 거니까 막 쓸 수 있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왜 학생 머리카락은 당연히 짧아야 하는 거지? 이 문제는 납득이 안 돼서 머리를 기르고 개기다가 한 번은 교무실, 다음은 교장실로 불려 가기도 했었다. 푸아그라나 다금바리가 계란이나 고등어처럼 흔했어도 그 맛을 여전히 특별하게 여겼을까? 희소성이 역전된 세상 속으로 꼭 한 번 가보고 싶었다.       

  


내 난잡한 머릿속 이야기들에서 다시 연휴의 집으로 돌아와야겠다. 이번에 연휴에 집에 있으면서 아빠의 그런 모습, 엄마의 그런 모습을 다시 새삼스레 보면서 '아, 이런 것들 때문에 힘들었었지.' 생각했다. 존경받는 목사님과 사모님이고, 선한 사람들이지만 밖에서 보여주는 건강한 모습, 웃는 모습과 달리 집 안에서 느껴지는 어딘가 모르게 암울하고 숨 막히고 어두운 분위기. 그 분위기 속에서 표류하다가 결국은 내가 죽었으면 좋겠다는 결론이 됐던 것이 떠올랐다.


다행인 건 대처 방법을 이제는 안다는 것. 아빠의 한마디에 순식간에 이런 생각들이 줄지어 나타나면서 온갖 삶의 의욕이 탈진되는 느낌이 오랜만에 다시 나를 덮쳤을 때, 나는 나가서 걸었다. 어두운 밤에 차가운 공기를 마시면서 걸으며 내 부정적인 감정을 있는 그대로 맞이하고, 그다음으로는 부모님의 좋은 면을 생각했다. 어찌 됐건 육체적으로 지능적으로 상위 5퍼센트에 족히 드는 수준의 신체를 물려줘서 남들보다 꿀을 빨게 해 줬고, 부모님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사랑으로 키워주셨다고 생각한다.    


가끔은 엄마가 힘든 소리를 하면 그냥 엄마가 집안일로 스스로를 괴롭히다가 과로로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아빠의 딱딱하게 굳어버린 답답하고 무식한 생각은 아무리 이야기해도 바뀌질 않으니 대신에 아빠의 머리통을 깨부수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뭐 하나 떠올려서도 안 되는 생각들 뿐이었기에 그런 생각을 하는 나를 죽이는 게 더 맞는 것 같다는 생각도 했고, 그런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부모님과의 대화나 접촉을 원천 봉쇄하기 위해서 방으로 피해 들어간 것도 있다.


이사하던 시기에는 여러 스트레스와 맞물려 차를 운전하고 갈 때, 조수석의 아빠에게 엄마의 정신병스러운 강박증에 대한 문제 해결법을 제시하는데(아빠가 그냥 같이 해야 한다. 아빠 머리로 뭘 해야 할지 생각을 못하겠으면 목록이라도 어디에 적어놓고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해라 등) 역시나 평소와 마찬가지로 듣지를 못하고 있길래 갑자기 꼭지가 돌아서 울면서 화를 냈었다.


아빠는 내가 그 정도로 답답해하고 힘들어한다는 것을 느껴서 반응한 것은 아니었고, 내가 흥분으로 운전에 집중을 못해서 사고가 나서 자기가 죽거나 아니면 아빠 닮은 내가 홧김에 차를 꼬라박아서 죽을 수도 있다는 위기감 때문에 그제서야 내 말에 반응성이 올라갔다. 차를 세우라고 했지만 나는 괜찮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하고 곧바로 감정 스위치를 다시 끄고 평온하게 운전을 했다. 나도 웃기고 아빠도 참 웃기다.


이사를 다 한 후에도 불안이나 스트레스는 한동안 있었다. 그 시기에 기억은 안 나지만, 어떤 계기로 아빠한테 10년 동안 상상만 하고 차마 하지는 못했던 말을 실제로 했다. 아빠는 사생아로 자란 소시오패스라서 다른 사람 말은 기억은커녕 청력에 문제가 없는데도 듣지도 못한다고. 공감하고 상황에 맞는 말을 하는 것은 기능적으로 불가능하고 언제나 늘 머릿속 대본에 있는 말로만 대꾸한다고. 이상적인 좋은 뜻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은 늘 그 뜻을 위해 직접 수고하고 희생하는 주체가 본인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엄마가 차라리 하지 않아도 될 집안일 따위에 집착하다가 과로로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고도 아빠한테 털어놨다. 그런 말은 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냥 그렇게 죽어서 남은 평생에 내 마음속 씻기지 않는 회한과 어리석음으로 남아주는 게 낫겠다고, 사랑이라는 명분으로 자기만족을 채우지 말고 나한테 맞는 사랑을 주기를. 그걸 못하니까 삶에서의 고통의 형태가 아니라 죄책감이든 그리움이든 마음속에서 사랑의 형태로 남아주기를.


이 모든 불안하고 부정적인 반추가 한두 시간 사이에 일어났던 것이 놀랍다.


산책을 끝내고 팔 굽혀 펴기나 허리가 아파도 할 수 있는 복근 운동을 하면서 마음을 가다듬었다. 상담과 센터에서 배운 것들 덕분에 부정적인 감정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었다. 그냥 부모님 좋은 부분을 보고, 일흔도 넘은 분들이시니 바뀌지 못한다는 것도 받아들이려고 또또 노력하고, 교정하고 싶어 하는 나나 교정해야겠다 생각했다.



나도 그렇고 부모님도 그렇고 그냥 모두가 부족한 인간들이니까 서로 상처도 주고 실망도 하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다시 감사하고 소중하고, 가볍고 화기애애한 분위기 노선으로 얼른 돌아왔다. 그 흐름을 더 키워준 것이 사과와인의 도착 타이밍이었다. 친구의 와인샵에서 마셨던 추억의 사과와인 이야기를 매번 하는 아빠를 위해 주문했던 사과 와인이 연휴가 끝나고 14일에 도착했다. 저녁 식사 때 따서 같이 마셨다. 와인도 안 드시는 엄마도 내가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산 것을 본능적으로 아셔서 그런지 "한 번 먹어보자." 하고 좀 드셔보셨다.


"돈도 좀 벌기도 했고, 아빠 맨날 사과 와인 얘기하니까 이사할 때 아빠한테 나쁜 얘기했던 것들 사과의 의미로 뭐 겸사겸사 샀어요."


사과의 말을 할 수 있을지 없을지 걱정을 했었는데 이건 좀 애매한 것 같긴 하다. 입을 떼기는 대수롭지 않게 잘 뗐는데 죄송하다고 딱 깔끔하게 말을 못 한 것 같다. 아빠는 "괜찮다, 네가 뭐 내 아들인데." 이렇게 말씀을 하셨던 것 같다.


아빠에게 하나뿐인 가족인 할머니 돌아가시고 할머니한테 아무것도 해준 것 없다며 슬퍼하시던 아빠는 1세대 버전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는(이미 훨씬 많이 했지만)40년 뒤에 태어난 2세대 버전 노력 알아보시는 것 같다. 과거는 흘려보내고 지금을 열심히 밝게 살고, 살갑진 못하고 잘하진 못해도 부모님께 마음도 표현하고. 아빠는 연휴 동안 몇 번씩 오랜 시간 끝에 다시 돌아와 긍정의 진영에 선 나를 가만히 바라보시곤 했다. 그게 느껴졌다


다시 집 떠나는 날, 엄마랑 가끔 가던 갈비탕 집에 가서 점심을 먹었다. 그런 건 귀찮기도 하고 내가 그리고 싶어 하는 스타일도 아니지만 엄마가 그리고 싶어 하는 그림이라 거기에 맞춰서 그림 속으로 기꺼이 들어갔다. 평생 힘들게 산 불쌍한 우리 엄마한테 이제부터 나라도 맞춰드려야지. 아무도 엄마한테 안 맞춰주는데.


아빠는 신문사에 갔다가 합류해서 터미널 가는 길에 새로 생긴 폴바셋에 같이 갔다. 해발 976m짜리 산이 배경으로 보이는 깔끔한 2층짜리 새 매장과 언제 먹어봤는지 '에스프레소 콘파냐'에 꽂힌 아빠는 평소에 엄마도 데리고 오고 싶었던 모양이다. 이번에 나도 같이.


결국 엄마도 아빠도 각자 마음에 든 곳 한 곳 씩 나를 데리고 간 셈이다. 방학에 집에 머무는 일주일의 마지막날 코스로 아주 의미가 있었지 않나 싶다. 그리고 카페를 나서서 두 분은 터미널에서 버스에 탄 나를 몇 분 동안 지켜보다가 인사를 하고 가셨다.


너무 이기적인 속 편한 속죄이긴 하지만 지금이 좋고 끝이 좋다면 결국 다 좋은 거 아니겠는가 생각한다.


두서가 워낙에 없는, 남이 읽을 수 있도록 배려한 글이 아니라서 남들이 안 봤으면 좋겠는데도 왜 일기를 여기다 쓰고 있는지 또 한 번 생각해 봤다. 싸이월드 감성인가? 분명히 자기 수용의 일환이나 감정 배설만의 목적만은 아니었는데. 그러다 다른 이유가 기억났다. 종이에다가 일기를 쓰면 이사 갈 때 짐이 는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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