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디뇽이 Feb 09. 2024

히키코모리 10년 경력자의 일기

기숙사 퇴사와 이것저것

기숙사 방을 뺐습니다. 아무 의미 없던 504라는 숫자에 특별한 의미가 생겼는데 이제 그 번호와 이별이네요. 지갑 속 순서에 맞춰 끼워져있던, 칙칙한 지갑 속 선명한 상을 뽐내던 파란 카드키도 없니 허전합니다.


'퇴사일 전까지 짐을 조금씩 미리 정리해놓자.' 라는 생각으로 짐정리를 시작했는데 하다 보니 구정과 남은 방학 기간 동안의 구상이 조금 생겼습니다. 그래서 한 학기 동안 장만했던 살림살이와 책, 옷가지, 청년이음센터의 추억들을 갑작스레 이틀 만에 정리하고 청소까지 끝마쳤습니다. 5호 박스 6겹 정도의 허물을 남겨 놓고 몸만 빠져나왔네요.   


지금 돌아보니 퇴사일을 즉흥적으로 앞당겨서 결정하고 이사를 진행해서 실수한 부분이 많은데, 다음에는 어떻게 더 요령 있게 짐을 쌀 수 있을 지도 윤곽이 잡힙니다. 좋은 시행착오였습니다. 확실히 J 이긴 해도 J 선호도가 4점밖에 되지 않는 만큼 P를 좋아하는 영역이나 상황이 저에게는 많은 것 같습니다. 아직 정기퇴사일 기한이 꽤 남았는데 섣불렀다 싶기도 하네요.  


작년 8월 말에 기숙사로 캐리어 하나 싸들고 이사 아닌 이사를 하면서 두려움 속에 인생 2막을 맞이한 히키코모리, 그게 저였습니다. 정말 많은 일이 한 번에 몰아쳤던 것 같은데 운이 좋게도 지금까지 5개월 동안 많은 좋은 인연을 만났고, 많은 저의 모습을 만났습니다. 추한 모습도 좋은 모습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렇든 저렇든 분명한 건 첫걸음을 떼고 나올 때의 저와 지금의 저는 좀 달라지긴 했습니다.


갈증이 너무 컸던 걸까요? 때로는 욕심이 앞서 벌컥벌컥 급하게 들이켜다 이런저런 탈이 날 뻔하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제가 급하게 마셨던 물은 때로는 사람이었고, 때로는 그들의 마음 혹은 저의 마음이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큰 병이 나지 않아 다행이다 싶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은 약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늘 아침에는 마지막으로(곧 돌아올 거지만) 산책 코스 끝의 정해진 자리에서 늘 그랬듯 기숙사 사진을 찍었습니다. 특별한 날이라 그런가 하늘색도 뭔가 더 평소보다 유니크해 보입니다.


태양을 향해 서서 팔을 벌리고 햇빛을 쬐며 제 몸의 곰팡이를 말리니 마니 했던 것 같은데 오늘은 해를 힐끗 보고는 '점이나 생기겄지.' 생각하면서 그런 의식도 치르지 않았습니다. 제 생각에는 좋은 변화인 것 같습니다. 시큰둥해졌거나 열의가 시들해졌다기보다는 그 정도의 극적인 장치가 이제 저한테 필요하지가 않은 것 같습니다. 아니면 곰팡이를 좀 씻겨 내서 그런가 봅니다. 그저 기분 좋게 햇살을 느꼈습니다. 대신 요즘은 산책길 위에서 아무도 몰래 빙글빙글 춤?을 추곤 하는 새로운 의식이 생겼습니다.


이번 주 동안에는 구정에 집으로 가기 전 To do list 의 다이어트를 많이 시켜서 마음이 편안합니다. 아빠랑 먹겠다고 사과 와인도 주문해 놨다고 이야기까지는 했습니다. 마시면서 해야 할 사과를 입 밖으로 무사히 꺼낼 수 있으면 좋겠네요. 청년이 맛있다고 얘기해 줬던 와인도 정확히 샀고, 또 다른 청년이 추천한 회기역 근처 만두 맛집도 가서 먹었습니다. 오늘은 평소 가보고 싶던 동네 귀여운 함박스테이크 식당에도 갔습니다.     


다이어트를 한 건 리스트만이 아닌 것이 문제네요. 지갑은 좀 찌는 게 보기 좋을 거 같으니 열심히 또 멕여봐야겠습니다.


10월쯤 됐을 때였을까요
시간이 흘렀다는 걸 알 수 있는 한 학기 마지막 산책

                                                              

작가의 이전글 히키코모리 10년 경력자의 일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