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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베 Aug 10. 2024

역전여관 마네킹

6 마네킹 떠나다

아무도 알아채지 못한 핸드백 도난 사건 실마리를 풀어 준 이는 뜻밖에 청자 다방 김 양이었다. 연탄가스 사고를 막아준 은혜를 갚는답시고 브로치라도 선물하려고 부른 김 양 입에서 핸드백이 술술 나오는 것이 아닌가. “핸드백?”하고 노순우가 맞장구를 치자마자 김 양은 유 마담이 선물 받은 핸드백 자랑으로 입에 침이 마를 새가 없다고 이내 대꾸했다. “선물이라? 누가 했는데?” “누구긴 누구겠어요? 당구장 강 씨 아저씨지.” 


김 양이 답하기 무섭게 노순우는 속으로 무릎을 쳤다. 옳거니, 그 작자 짓이구나. 핸드백이 연두색임을 확인하자 대충 사건 얼개가 잡혔다. 당구장 강이 취중 도벽이 있음을 이웃 상인들은 다들 아는 터였다. 역전 곱창에서 술 먹다가 역전 곱창 구의 모자를 슬쩍 해와 자기 대머리에 쓰고 다니는 식이었다. 지성 서점에서는 칸트라나 마르크스라나 하는 철학자의 책을 품에 감추고 나오다 걸려 망신을 당한 적도 있었다. 당구장 강의 취중 도벽은 워낙 건수가 많아 일일이 손에 꼽기도 민망할 지경이었다.      




“듣자 듣자 하니까 생사람 잡을 사람이네.”

당구장 강은 여자 마네킹 핸드백 행방을 묻는 노순우를, 그걸 왜 여기 와서 시비냐고, 단박에 사람 여럿 잡을 망나니로 몰아쳤다. 그가 오리발을 내밀수록 노순우는 확신했다. 당구장 강이 여자 마네킹 핸드백을 훔친 범인임을. 노순우는 당구장 강과 길게 입씨름할 생각이 없었다. 청자 다방 유 마담에게 먼저 갈까도 했었다. 그보다는 역전 여관 건도 있고 하니 이참에 당구장 강과 담판을 짓는 게 낫지 싶었다. 


말로 해서 안 풀리면 경찰에 전화 한 통 하면 간단히 해결할 문제였다. 당구장 강과 다투는 게 귀찮다고 핸드백을 사다 걸어놓을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노순우가 생각을 여투는 동안 당구장 강은 역전 여관 때문에 가게마다 피해가 막심하다고 오히려 본색을 드러냈다. 코털 마네킹, 역전 곱창 마네킹, 부동산 박 마네킹에 이르기까지 상조회 회원들이 미치기 일보 직전이라고, 노순우가 이 모든 사태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대놓고 윽박질렀다. 누군가 전화로 불렀을까. 어느새 꾸역꾸역 몰려온 상조회 회원들이 두 사람을 에워쌌다.


 마네킹이든 역전 여관 폐업 건이든 오늘 결판이 나기를 기다리기라도 하듯 그들은 당구장 강의 고함질에 다투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 가운데 누구도 당구장 강이 핸드백을 훔친 범인이라고 나서는 이는 없었다. 

“알았어. 당신이 안 훔쳤다니까 정식으로 경찰에 신고하지 뭐.”

노순우는 시큰둥하니 내뱉고 돌아섰다. 상조회 회원들이 둘러싼 가운데 당구장 강과 얼굴 붉히며 싸우기 싫었다. 청자 다방에 안 들른 건 잘한 결정이었다. 실망하는 유 마담을 보는 것도 못 할 짓인 데다 언젠가는 당구장 강을 혼찌검을 내리라 벼르던 터였다.



“경찰에 신고한다고?”

역전 여관을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이라고 싸잡아 욕하던 당구장 강이 갑자기 화들짝 놀랐고, 이거 왜 이러시나, 그깟 핸드백 하나 가지고 경찰을 부르다니, 우리끼리 좋게 해결하자고, 삽시간에 말을 바꾸며 노순우를 급하게 붙잡았다. 느닷없는 상황 변화에 상조회 회원들이 어리둥절해하고 있음을 노순우는 놓치지 않았다. 그들이 역전여관을 이참에 확실히 족쳐야 마네킹이 사라지리라는 데 의견일치를 보았음을 노순우는 지성 서점을 통해 들었던 터였다. 이로써 각자 마네킹은 각자 알아서 처리해야 하리라는 게 분명해졌다.



청자 다방 유 마담이 당구장에 뛰어든 것은 그 순간이었다. 못 이긴 척하고 당구장 강에게 이끌리던 노순우가 돌아설 새도 없이 유 마담이 핸드백을 집어 던지며 고래고래 악을 써댔다. “개새끼, 선물할 게 없어 마네킹한테 훔친 물건을 선물해!” 당구장은 금세 유 마담과 당구장 강의 난투극 현장으로 돌변했다. 난투극이라고 했지만, 당구장 강이 유 마담에게 일방적으로 당하는 편이었다. 강의 머리를 움켜쥔 유 마담은, 당구장 강이 손쓸 새도 없이 거칠게 벗긴 가발을 바닥에 패대기치고 잘근잘근 밟았다. 성난 그녀를 아무도 말리지 못했다. 유 마담이 당구장 강의 얼굴을 냅다 쥐어뜯고 손찌검을 해대도 상조회 회원들은 멀뚱멀뚱 구경만 했다. 유 마담에게 쥐여 터지는 당구장 강을 감상하며 노순우는 연둣빛 핸드백을 챙기기를 잊지 않았다.



“술 취해서 실수했어, 유 마담 한 번만 봐줘.” 

상조회 회원들이 빤히 보는 앞에서 당구장 강이 유 마담에게 용서를 빌었다. 그러자 유 마담은 “너라는 놈은, 연애할 자격도 없는 개자식이야.”하고 쏘아붙였다. 무릎 꿇는 시늉을 하며 실수라고, 유 마담을 사랑하는 마음은 변함없다고, 당구장 강이 신파조 고백을 했음에도 유 마담은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두 손 모은 그가 머리를 조아리며 싹싹 빌려는데, 밖에 나갔던 생맥주 최가 급하게 뛰어들며 겁에 질려 외쳤다.

“이번엔 대머리 마네킹이에요! 당구장 입구에 대머리 마네킹이 나타났다니까요!”     




담당 형사에게서 전화가 온 건 새벽 다섯 시쯤이었다. 가해자인 남편이 잡혔다고, 마네킹을 치워도 좋다고 일러준 그가, 일찍 깨워서 미안했던지 몇 마디 중얼거렸다. “…사업 실패로 파산했다나 어쨌다나…집도 날리고 여관방 전전하다 동반자살을 기도했는데…남자가 여자를……” 


잠이 싹 달아났다. 노순우는 외투를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 눈이 내렸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폭설이었다. 형사 말마따나, 심란한 마음에 마네킹이라도 들여놓을까 해서였다. 털모자를 눌러쓰고 조심스레 한 발 내디뎠던 그는 걸음을 멈추었다. 여자 마네킹이 안 보였다. 여관 출입문을 열고 나오면 늘 만나던 마네킹이 사라지고 없었다. 노순우는 마네킹이 서 있던 자리를 유심히 살폈다. 없었다, 마네킹이. 한동안 사람 마음을 졸였던 여자 마네킹이 종적을 감추었다. 어디로 갔을까? 


세찬 겨울바람에도 끄떡없던 마네킹이 아니던가. 누가 손을 대지는 않았을 거였다. 마네킹이 서 있던 자리를 혹시나 하고 털신 뒤축으로 파헤치는데, 무언가 걸렸다. 인상착의를 써 붙인 판자였다. 그걸 주워 들고 눈을 털던 노순우의 눈에 서너 걸음 앞에 떨어진 가발이 보였다. 그는 얼른 가발을 집어 들었다. 여자 마네킹 머리에 씌웠던 검은색 가발이 틀림없었다. 노순우는 퍼붓는 눈발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다섯 걸음이나 눈밭에 발자국을 새겼을까. 블라우스와 스웨터가 눈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살피니 역 광장 쪽이었다. 


저만치 허리띠와 치마가 눈에 들어왔다. 세상이 온통 허옜다. 하얀 새 떼가 뒤덮은 허공을 올려다보다 노순우는 가로등을 뒤로 하고 광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내처 몇 걸음 걷자, 부츠가 나타났다. 그쯤에서 허리를 세운 노순우는 손으로 눈발을 가리며 저만치 역 광장으로 눈길을 던졌다. 거기 누군가 눈을 맞으며 홀로 걸어가고 있었다. 알몸 여자 마네킹이었다. 폭설일망정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어디로 가시나? 마네킹을 불러세우기라도 하려는 듯 노순우는 오른팔을 들어 보였다. 산 사람 대하듯 무심코 입이 열렸다. “추운 날 한데서 지새우느라 고생 많았소.” 


시나브로 노순우는 그 자신 눈사람을 닮아갔다. 그는 멀어져가는 마네킹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연둣빛 핸드백을 내던진 여자 마네킹이, 거대한 흰 벽 같은 눈발 속으로 묻혀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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