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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베 Aug 11. 2024

가족 사진은 없다

3 흑백사진

얼굴을 알아볼 수 있을까? 잡화점 앞에 내놓은 의자에 앉아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늙은 사내를 보며 권소운은 궁금증이 일었다. 늙은 사내는 담배를 피우며 드러내놓고 어디서 굴러온 물건인가, 하는 표정으로 눈알을 굴리고 있었다. 권소운도 지지 않고 늙은 사내를 바라보았다. 


저 늙은이를 닮았을까? 젊은 날을 광부로 보내고 이 산골에 주저앉은 걸까? 추달호도? 탄광 생활사박물관 봉투를 접하고 추달호가 그쪽과 관련한 삶을 살았으리라 짐작했다. 혼자만의 생각이지만, 넝마주이에서 광부로 직업을 바꾸었다면 필시 그에 걸맞은 곡절이 있을 터였다. 너무 앞서 나갔나? 추달호 얼굴이 어찌 생겼는지 머리를 쥐어짜도 뚜렷이 떠오르지 않았다. 하긴, 이혼한 아내 얼굴도 흐릿해진 지 한참 됐으니 추달호야 말해 무엇하겠나. 가끔 보는 딸애도 재혼한 제 엄마 얘기를 안 한 지 오래였다. 


입에 올리지 않는 사람은 얼굴도 잊는 법이니까. 아내는 도망치듯 떠난 독일 생활을 견디지 못했다. 칠 년을 겨우 버티다 딸애를 데리고 귀국했고, 그 뒤 영영 타인으로 남았다. 그러니 추달호가 간직한 가족사진이란 권소운에겐 진작 의미를 상실한 빛바랜 종이 쪼가리에 불과했다. 하지만 추달호에게 그 사실을 털어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권소운은, 자신에겐 추달호에게 실망을 안길 자격이 없음을 잘 알았다.     




약속 시간보다 일찍 들어간 로터리 다방에서 권소운을 맞은 건 좀 전에 맛본 흑백 사진들이었다. 와글와글 분식에서 봤던 북면 사람들을 찍은 사진들이 다방 벽을 따라 늘어서 있었다. 가게마다 사진들을 전시한 걸까? 사진 속 사람들이 오늘날 북면 주민들보다 훨씬 많지 않을까? 권소운은 다방 커피를 마시며 눈높이와 나란한 사진들을 하나하나 감상했다. 마음이 한결 느긋해졌다. 


곡괭이로 탄 캐는 이들에게 말을 걸었다. 자식은 몇이나 두었소? 숨 막히는 갱도에서 죽도록 일했으니 퇴근길엔 막걸리로 목이라도 축이셔야겠소. 편안한 다방에서 커피 마시며 눈인사하는 나를 용서하시오. 사진 속 옛날 사람들이어서일까. 속으로나마 대화를 주고받으니 말이 술술 나왔다. 잡화점 앞에서 담배 피우는 늙은이에겐 눈 맞춤만 건넸으면서 말이다. 다방에 들어오니 주문을 받은 중년 남자가 커피를 갖다준 뒤, 자기는 잠깐 볼일 보러 나갈 거라고, 커피값은 저 양반들한테 내면 된다고, 농구 경기가 한창인 텔레비전에 넋 놓고 있는 두 사내를 가리켰다. 권소운은 순순히 그러겠다고 했다. 


잡화점 북면 상회는 몇 걸음 걷지 않아 곧장 로터리로 이어졌다. 우체국, 파출소, 다방, 통닭집, 버스 정류장을 낀 구멍가게가 다였다, 로터리를 돌면서 접한 건물이. 천천히 걸을 수밖에 없었다. 다방 주인의 부탁이 아니더라도 북면에선 서두를 일이 하나도 없지 싶었다.



추달호는 과연 어떻게 변했을까? 공중에서 탄을 나르는 삭도와 탄차에서 우르르 내리는 광부들을 눈에 담으며 권소운은 생각했다. 저이들 가운데 혹시 추달호가 있을까? 탄차에 빽빽한 광부 중에? 그들을 하나하나 뜯어보아도 이 사람이 추달호다, 하고 퍼뜩 짚이는 얼굴이 없었다. 


추달호를 귀띔해준 건 사회부 선배 기자였다. 그는 넝마주이 합숙소에서 알고 지낼 만한 인물로 추달호를 점찍었다. 선배 기자가 추달호를 만난 건 갱생원에서였다. 사회 뒷골목 사람들 연재물을 담당한 그에게 추달호는 취재원이었고. 갱생원에서 나온 추달호가 넝마주이 합숙소로 옮긴 뒤에도 연락이 닿았던 모양이었다. 추달호가 전한 바에 따르면, 할 일 없이 빈둥대는 갱생원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덴 선배 기자의 도움이 컸다고. 추달호는 지긋지긋한 갱생원을 탈출하려고 선배 기자와 통화를 시도했고, 기자 전화 한 통으로 한번 들어가면 육 개월은 꼼짝없이 갇힌다는 갱생원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그는 말끝마다 선배 기자를 은인으로 여겼고. 넝마주이로 나서기 전, 남산에서 술 마시고 잠들었다 경찰의 부랑자 일제 단속에 걸려 갱생원으로 끌려간 추달호의 인생사가 대략 그러했다. 그 뒤 펼쳐진 추달호의 행적에 대해 권소운은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 삼십여 년 세월을 어찌 살았는지도 모르는 그를, 고작 주민증만 한 가족사진을 연결고리로 다시 만난다는 사실이 몹시 비현실적이기는 했다. 평소라면 엄두도 못 낼 모험에 뛰어든 셈이랄까. 추달호라면 그럴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었다. 심장에 타인이 들어앉는 날이 자주 있는 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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