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탄광촌
잿빛 하늘이 산 그림자를 지운 날, 산골 오지 북면은 쌀쌀했다. 한눈에도 사람이 안 보였다. 산촌 수묵화 속으로 발을 디디면 이런 한적함에 휩싸일까. 홀로 산줄기와 맞선 막막함이 오히려 숨통이 트였다. 사람 없는 늦가을 산 풍경에 빠져들 줄은 몰랐다. 택시 기사가 권소운을 내려준 곳은 지방도로를 끼고 중고교와 어깨를 나란히 한 북면 초등학교 앞이었다. 사람 없는 산골 마을에 웬 학교? 오래전 탄광촌으로 번창했다더니 저 정도였나?
산골 마을 특유의 적막과 학교 건물이 빚어낸 부조화에 젖어 든 권소운은 호기심이 동했다. 어쩌다 추달호는 여기까지 흘러들었을까? 사람 목소리는 간데없어도 개울물 소리가 귀를 적셨다. 모처럼 청각이 호강했다. 북면은 첩첩산중이었다. 산에서 기어 내려온 개울을 사이에 두고 면 소재지 북면은 학교와 마을로 나뉘었다. 북면교 입구엔 철판 광부들이 어우러진 조형물이 장승처럼 서 있었다.
작업복 차림 철인 광부들 어깨를 툭 치면 금세라도 권 형, 드디어 왔구만! 이게 몇 년 만이요, 추달호가 와락 손을 내밀 것만 같았다. 북면교를 건너며 권소운은 생각했다. 동면에서 깨어난 곰이 이럴까? 스스로 사람을 만나러 나서기 얼마 만인가?
추달호가 권소운을 위기에서 구해낸 건, 구속에 대한 공포와 아내와 아이 생각으로 절망스러운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아침이었다. 선배 기자가 소개해 준 면목동 넝마주이 합숙소에 들어온 지 열흘이나 지났을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기약 없는 도피 생활에 심신이 쪼들린 탓일까. 어두컴컴한 여섯 시, 새벽 찬 공기를 몰고 온 규율부장 호루라기 소리가 귀청을 때리는데도 권소운은 자리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몸살이 도졌는지 머리에 열도 나고 오슬오슬 떨렸다. 합숙소를 찢어발길 듯 빽빽거리는 호루라기 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규율부장의 욕지거리가 날카로웠어도 권소운은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얼굴을 덮은 군용 담요에 손이 가지 않았다. 잠에서 깨어난 사람들이 투덜거리며 담요를 개킨다, 신을 신는다 해서 부산스러웠다. 하지만 권소운은 옴짝달싹하기가 싫었다. 규율부장은 호루라기를 연신 불어가며 게으른 놈은 길바닥에서 굶어 죽을 거라고, 쥐새끼 내몰 듯 사람들을 밖으로 내쫓고 있었다. 규율부장이 내뱉는 별의별 욕을 다 들어가며 넝마주이 합숙소 생활에 적응하려고 나름 몸부림친 권소운이었다. 하늘이 두 쪽 나도 오늘 하루는 쉬어야겠다고 다짐한 그는 담요를 머리끝까지 끌어당겼다.
-어라, 요놈의 초짜 새끼 봐라. 죽으려고 환장했나?
호루라기 소리가 가까워진다 했는데 침상이 쿵쾅거렸고, 이내 어깨에 군홧발이 날아들었다.
-기상, 기상! 야, 안경잽이! 귓구멍에 대못 쑤셔 박았어? 개새끼, 호루라기 무시하면 반칙이야, 반칙!
담요를 걷어낸 규율부장은 당장이라도 몽둥이를 내려치려고 씩씩거렸다. 그때 어디선가 날아든 이가 추달호, 왕코였다. 감기약을 먹인다, 몸살 환자라고 설레발을 쳐가며 그가 권소운을 둘러업자마자 부리나케 합숙소 막사를 뛰쳐나갔다. 규율부장은 몽둥이를 휘두르며 두고 보자고 이를 갈았고.
와글와글 분식? 식당 간판을 보자마자 권소운은 피식 웃음을 물었다. 칠팔십 미터 남짓한 북면 중심가로 들어서며 그는 딱 한 사람을 보았을 뿐이었다. 북면교를 막 건너서였다. 산골로 오르는 초입, 방앗간에서 나온 뚱뚱한 여자가, 구경거리라도 만난 양 권소운을 흘끔대다 수건으로 온몸을 털어대고 들어갔다. 그 뒤론 거리에서건 건물에서건 어떤 움직임도 없었다. 시공간이 정지한 세계로 순간 이동한 듯 걸음이 절로 멈추었다.
방앗간 굴뚝에서 솟아오르는 연기가 하도 생생해서 눈을 빼앗겼으니까. 사람이 없었다, 북면 거리엔. 간판만 내걸린 중국음식점 만리장성부터 양품점, 철물점, 신발가게 등 북면 한복판에 올망졸망한 상점들은 하나같이 문을 닫았다. 육칠십 년대 건물과 거리를 재현한 영화 세트장에 불쑥 들어선 느낌이랄까. 그 낯섦에 끌려서인지, 눈으로 두루두루 살폈다. 사람 없는 북면에 와글와글 분식이라?
늦은 점심도 해결할 겸 권소운은 와글와글 분식을 도무지 외면할 수가 없었다. 식탁을 하나 꿰차고 앉으니 말이 분식집이지 김치찌개, 짜장면, 돈가스, 한식 중식 양식 못 하는 게 없었다. 낯선 방문객을 곁눈질하는 주인장에게 김치찌개를 주문한 권소운의 눈을 끌어당긴 건 벽에 내걸린 흑백 사진들이었다. 초등학교 졸업사진, 언덕에서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는 사람들, 면민이 다 모인 듯 시끌벅적한 북면초등학교 운동회, 작업복을 입고 어깨를 좍 편 채 담배 피우는 광부들, 교련복을 입고 행진하는 고교생들, 심지어 광부들을 격려하는 이승만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지난 몇십 년, 북면 사람들의 인생사를 담아 놓은 흑백 사진들이 식당 벽을 채우고 있었다.
세월에 떠밀려 쪼그라들었을망정 요란 벅적했던 지난날을 잊지 말자는 걸까. 지금은 뿔뿔이 흩어진 북면 사람들이 사진 속에서 왁자지껄 떠드는 듯해 권소운은 마음이 짠했다. 김치찌개를 한술 뜨며 권소운은 자문했다. 추달호는 어쩌자고 잃어버려도 무탈했을 남의 가족사진을 지니고 있었을까? 그 지난한 세월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