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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업사원 며느리를 얻고 싶은 이유

영업사원 희로애락

by 영업본부장 한상봉

영업사원 며느리를 얻고 싶은 이유


난 김은숙작가를 좋아한다. 위트 있는 대사와 치밀한 구성도 좋지만 가끔 터져 나오는 생각지도 못한 감성적인 멘트가 더 좋다.


미스터선샤인에서 변요한이 분한 김희성이라는 캐릭터가 이병헌 유연석과 밤길을 걸으면서 던지는 대사 "난 무용한 것들을 좋아하오. 꽃, 바람, 달..."


난 영업사원이다. 무용한 것들은커녕 이 시대에서 가장 유용한 것들, 돈, 이익을 좇는 자본주의의 첨단 선봉장이다. 하지만 나도 무용한 것들을 좋아하는 감성적인 한 명의 인간이다.


나는 왜 영업사원이 되었는가?


고등학교 졸업식 때 부모님은 선물을 해주고 싶어 하셨다. 재수도 안 하고 나름 좋은 대학교에 입학한 막내아들이 기특하고 또 기특하셨겠지. 지금 같으면야 노트북이니 아이폰이니 고민도 갈등도 안 했겠지만 그때 내가 사달라고 했던 건 '가다마이' 였다. 모르는 분들도 계실 거 같은데 그냥 정장 윗도리라고 생각하면 된다. 졸업식 때 꼭 그 옷을 입고 가고 싶었다. 뭔가 이제 성인이 되었다는 티를 내고 싶었을까?


대학교 때는, 요즘엔 많이 사라졌지만, 양복 윗도리 왼쪽에 찝는 회사배지를 달고 다니는 회사원들이 부러웠다. 그러고 보면 난 양복 윗도리 페티시가 있는 걸까? 어릴 때 내내 하고 싶고 부러웠던 게 다 그거였다니.


영업사원은 항상 단정한 와이셔츠와 넥타이 그리고 양복을 갖춰 입는다. 여름에도 가능하면 반팔와이셔츠를 입지 않는다. 양복 윗도리 팔 밖으로 1~2센티 배어 나오는 흰색 소매가 포인트다. 그걸 방탄복 삼아 방검복 삼아 고객들을 만나고 그들에게서 받는 총알과 칼을 방어한다.


하지만 방어만 하는 것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영업사원은 먼저 싸움을 거는 사람이기에 고객을 설득할 창과 방패를 같이 가지고 다닌다. 그들이 가지고 다니는 가방과 핸드폰은 평상시 갈아두었던 무기를 넣고 다니는 칼집과도 같다. 상대가 모르는 사이 상대를 제압하고 영업사원의 의도대로 제안대로 그들을 묶어두고 그들로 하여금 비용을 지출하게 만든다.


난 어릴 때부터 그걸 좋아했던 것 같다. 무언가를 설득하고 내 것을 인정하게 만드는 것. 고등학교 때 대학교 희망전공은 처음엔 영문학이었다. 막연히 영어가 좋았고 당시에는 문과계열중 나름 높은 커트라인을 유지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마지막에 경영학과를 선택했다. 난 현재를 배우고 싶었고 막연하지만 가장 현대적인걸 직업으로 삼고 싶었다. 가장 자본주의적인 분위기에서 가장 자본주의적인 태도를 가지고 가장 자본주의적인 일을 직업으로 삼고 싶었다.


처음 입사했던 현대건설은 양복윗도리와 회사배지는 충족시켜 주었지만 가장 자본주의적인 업무를 하는 것은 아니라고 느꼈다. 항상 똑같은 사람들과 똑같은 장소에서 크게 와닿지도 않는 똑같은 숫자를 눈이 빠져라 쳐다보고 컴퓨터 앞에서 그것들을 처넣는 생활을 4년 동안 하다 보니 뭐랄까 그냥 레고의 한 부품이 된 듯한 느낌이랄까?


상황이 사람을 만드는 것인가 사람이 자기가 원하는 대로 상황을 끼워 맞추는 것인가? 4년이 지난 어느 날 갑자기 벤처 바람이 불었다. 많은 대기업 직원들이 벤처로 벤처로 이동했다. 내가 생각했던 직업이 아니라고 느껴왔던 나는 주저 없이 사표를 던졌다. 그리고 드디어 나를 정의하고 내 정체성을 규정해 줄 영업사원의 길로 들어섰다.


처음엔 아무것도 몰랐다. 대기업 기획실에서의 생활은 처음 보는 사람과의 만남의 기술도, 누군가를 설득해야만 하는 때의 적절한 스킬도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않았었다. 그래서 무지 오랫동안 버벅댔다. 게다가 B2B, B2C도 잘 모르는 대기업 출신 사무쟁이에게 일찍부터 IT에 몸담고 있던 사람들도 그다지 친절하지 않았던 것 같다. 토요일 오후에 아들이 기다리고 있는 걸 뻔히 알지만 혼자 회사에서 IT용어 사전을 찾아가며 제안서를 썼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하지만 신기했다. 새로웠다. 하루종일 엑셀과 씨름하던 생활을 하던 내가, 웹서핑 하는 게, 랭키닷컴(지금도 있나?) 뒤지면서 영업사이트를 물색하는 게 회사 나와서 하는 일이라니. 심지어 그런 일이 월급 받고 하는 것이라니. 나의 인생에 새로운 장면이 펼쳐진 셈이다.


첫 번째 내 영업은 인터넷 상거래 솔루션 제품을 개발해 한창 유행이던 온라인 쇼핑몰을 창업하는 사람들에게 판매하는 회사에서였다. 거칠 것이 없었다. 시류와 트렌드를 맞춘 제품이다 보니 공급보다 수요가 넘쳐나 영업사원들 입장에서는 결코 영업이 극한직업일 수 없는 분위기였다. 더구나 대기업에서도 각종 온라인 복지사이트 등을 만드는 데 혈안이 되어 있어서 사소하지만 대기업 출신이 가지는 영업적인 메리트도 활용이 가능했다. 다른 의미로 질풍노도의 시대였다.


그 거품이 꺼지고 벤처기업들은 어려워졌다. 가장 몸으로 체감한 사람들이 영업사원들일 것이다. 다들 힘들어했고 회사를 떠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럴 때 옥석이 가려지더라.


한참 영업이 잘되어 신입 영업사원들을 채용할 때 누가 봐도 영업을 하면 안 될 거 같은 요즘으로 치면 I로 시작하는 친구가 있었다. 얼굴한쪽에 성실이라고 쓰여있긴 한데 한쪽엔 수줍음도 쓰여있어서 선배들도 회사도 저 친구가 과연 영업을 할 수 있을까 생각이 들었다. 동기들이 한참 성과를 올리고 영업의 재미를 느끼며 자축의 술독에 빠질 때도 그 친구는 아주 뛰어나지도 그렇다고 아주 부진하지도 않은 성과를 내고 있었다.


시장이 어려워지자 그 친구의 진가가 나타났다. 본인이 부족한 부분을 메우려고 꾸준히 고객과 연락하고 세심하게 영업관리를 해온 영업사원을 당해낼 동기들은 없었다. 다크호스라는 말이 어울리는 그런 사람이 된 것이다.


화려한 언변과 순발력, 술자리에서의 가무 스킬 같은 건 분명 영업사원에게 유리한 요소는 맞다. 하지만, 좀 식상할 수도 있지만, 그런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영업사원의 성실함이고 진정성이다. 후배였지만 그 친구덕에 난 다른 영업사원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과장과 차장을 거쳐 이제 한 부서를 맡는 영업부장이 되었을 때 나에게는 멘토 같은 선배 영업사원이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학교선배이기도 했지만 그분은 항상 나에게 존대를 하셨다. 가끔 자연스럽게 반말도 하셨지만 기본적인 기조는 늘 부서원들에게, 후배 영업사원들에게 존대를 하셨다.


영업사원은 경력이 쌓이고 커리어가 생기면 본인의 영업만이 중요한 게 아닌 게 된다. 물론 오랜 영업을 통한 높은 수준의 인맥과 정보를 가지고 하는 영업(보통 high-end 영업이라고 한다)을 개인적으로 수행하지만 많은 후배영업사원들을 관리하고 전체적인 실적을 책임지는 역할 역시 중요하다.


두 가지 유형의 영업본부장이 있다. 하나는 위와의 정치를 통해 자리를 보전하고 그걸 들키지 않기 위해 부서원들을 족친다. 기본적으로 후배들의 대한 사랑 같은 건 개소리로 치부하고 그들이 만들어내는 숫자에만 관심이다. 다른 하나의 유형은 기본적으로 본인이 성실하다. 밑의 직원들에게 직접적인 지시나 닦달이 아니라 시장상황을 설명하고 방향을 제시한다. 직원들 본인의 문제를 늘 살피고 심지어 가족들까지 챙긴다.


내 멘토였던 상무님은 후자인 분이셨다. 내가 정말 놀랐던 기억은 암진단을 받고 병원에 입원하셔서 병문안을 갔을 때였다. 침대에 앉아서 노트북으로 영업파이프라인을 만들고 계시더라. 너무 일중독아니냐고 단순하게 판단할 일이 아니다. 너무나 즐거운 얼굴로 만들고 계시는 걸 보고 난 충격을 받았다. 책임자로서 가지는 무게를 견디고 튕겨내는 방법을 터득하셨다고나 할까? 그분은 가정에도 충실한 가장이셨다. 그분으로 인해, 그분을 배우면서 난 다시 한번 다른 영업사원이 되었다.



영업의 묘미는 무엇일까? 그건 다른 영업사원들로부터 배운 것들을 고객에게 시전하고 결과를 얻어내는 데서 오는 만족감이다. 숫자 중요하다. 실적은 눈에 보이는 당연한 결과다. 하지만 그것만이 다가 아니다. 꼭 이곳에서만, 이 제품만 평생 영업할게 아니기에 어떤 상황에서도 발휘될 수 있는 영업의 기본과 정석을 누군가에게 배울 수 있다는 게 매력이다. 그게 후배든, 선배든, 좋은 것이든 아니면 절대 하지 말아야겠다는 배움이든 계속해서 배울 수 있다는 거. 영업사원이라면 꼭 명심해야 할 덕목이다.


난 영업사원인 게 자랑스럽다. 아주 높은 자부심도 가지고 있다. 한때 나가수에서 임재범이 가수가 아니라 가창자가 맞는 거 아니냐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아마 '수'라는 말이 약간 비하하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었을 텐데 보통 영업사원이라는 명칭도 그런 느낌을 주는 게 사실이다. 그런데 재밌지 않은가? 회사에서 직급이 부장이어도 상무여도 전무여도 그 사람은 영업사원이다. 심지어 누구는 자기가 대한민국 1호 영업사원이라고도 하지 않았는가? 결국 영업사원은 보통명사가 된 셈이다.


영업사원은 인정받아 마땅하다. 누구도, 처음만난 모르는 사람과 일얘기를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아니 하기를 힘들어하고 꺼려한다. 하지만 영업사원은 누군가 해야 하는 그 일을 업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영업사원은 당당해야 마땅하다. 이제 저 좀 살려주세요라고 구걸하고 사정하는 영업사원은 설곳이 없다. 고객에 대한 존중과 예의는 갖춰야 하지만, 이 제안을 무시하면 결국은 당신이 손해라는 당당함과 자부심으로 똘똘 뭉쳐있어야 한다.


영업사원은 존경받아 마땅하다. 그들은 그들의 목표를 위해 끊임없이 자기를 연마하고 인내하고 시련을 견뎌낸다. 모든 직장인이 마찬가지 이겠지만 이기지 못하면 지옥인 가장 자본주의의 첨단에서 최일선에서 싸우는 것만으로도 격한 리스펙을 받아 마땅하다.



상투적인 말이지만 영업은 인생이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곱씹어 본다. 어느 영화의 대사처럼 파도 많은 사람들이고 그 한가운데서 외줄 타기 서핑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좋을 때가 있으면 나쁠 때도 있다는 걸 항상 체감하면서 사는 사람들이다. 그런 시련과 파도를 견뎌낼 줄 아는 사람들이고 극복할 줄 아는 사람들이다. 아무렇게나 되는대로 대충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에 당연히 경멸받거나 무시받을 이유도 없다.


난 이런 이유로 영업사원이 되었다. 성격상 체질상 정적이지 못하고 무언가를 행동해야 하는 사람이고, 불리한 상황을 뒤집었을 때 짜릿함을 좋아하고, 누군가에게서 좋은 점을 발견하면 배우고 싶어지고, 그 사람의 뒤를 밟는 것이 행복한 그런 일을 하고 싶어 영업사원이 되었다. 그래서 영업을 모르면서 드라마에서 소설에서 나오는 클리세만 생각하고 무시하는 사람들에게 꼭 해주고 싶다. '난 딸이 영업사원과 결혼하겠다고 하면 두 팔 들어 환영한다'고. 근데 외동아들만 두었다.ㅠㅠ 하지만 문제없다. 아들의 의견을 묻진 않았지만 영업사원 며느리를 얻으면 되니까.



사족 : 글을 쓰고 아들에게 물었다. "너 영업사원 와이프 어때?" 뜬금없는 질문에 일견 욕을 먹을 생각을 하긴 했지만 아들의 대답은 예상밖. "응? 여자도 영업사원이 있어?"

결심했다. 당장 내 아들부터 가지고 있는 영업사원에 대한 오해와 진실을 깨야겠다고. 그래서 난 이책에서 결코 영업을 잘하는 기술만 쓰진 않을 것이다. 물론 선배로서의 팁과 스킬, 영업에 대한 전문적인 글도 있겠지만 그것만 담진 않으련다. 영업사원이기에 경험하는 눈물과 희열, 그리고 삶의 지혜도 있음을 꼭 말하고 싶다. 그래서 이 책에 감춰져 있는 보물창고가 단순히 돈이 되는 금덩이만 있는 게 아니라 돈은 안되더라도 마음을 따뜻하게 해 줄수 있는 고문서도 함께 묻혀있는 곳이라는 걸 얘기하고 싶다. 그리고 다시 아들에게 저 질문을 다시 해야겠다. 대답이 궁금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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