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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업본부장 한상봉 Nov 07. 2023

영업사원 봉팀장의 하루 - 제4화 은밀한 제안 1

포커게임 중계를 본 적이 있나? 플레이어들끼리는 서로의 패를 모르지만 중계진이나 중계를 보는 시청자는 두 선수의 패를 모두 알기 때문에 마지막 순간까지 유리한 사람과 불리한 사람의 상황을 알고 있고, 불리한 사람이 역전할 수 있는 확률까지도 시시각각 계산한다.


아마도 이번에 수주한 케리스 건은 마지막까지도 우리 회사가 불리했을 것이다. 제안발표회에서의 극적인 별의 순간이 없었다면 누구 말마따나 무난하게 지고 실주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마지막 히든카드를 제대로 받은 덕에 꼭 수주해야 하는 사이트를 가져온 것이다.


어렵지만 꼭 수주해야 할 사이트를 가져온 후폭풍은 좋은 의미로 아주 거셌다. 사실 그 사이트를 가져와야 할 가장 중요한 이유는 프로젝트 자체의 금액도 금액이지만 유사한 프로젝트를 진행해야 하는 수많은 잠재 영업사이트가 모두 우리 회사를 찾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말 그대로 질풍가도를 지나가는 기세로 우리는 계속 사이트를 점령해 나갔다. 가끔은 갑과 을이 뒤바뀐 듯한 느낌으로, 밀려오는 제품문의를 조정해 가며 미팅스케줄을 잡았고 거의 형식적인 제안발표회를 거친 후 경영지원본부에 계약서를 던져주는 프로세스가 반복됐다.


영업이 잘될 때 영업사원은 회사에서의 걸음걸이도, 화장실에서 나와 누군가를 마주쳤을 때의 표정마저도 당당하다. 그게 내 상관이어도 심지어 사장님을 마주칠 때도 그렇다. 반대의 경우엔 당연히 괴로울 테지만 그건 나중에 닥치면 생각할 뿐이고 지금은 지금 대로 이 상황을 즐기는 것도 필요하다.


일이 잘되면 바쁜 것도 재밌다. 무언가를 얻어내는 결과가 있는데 당장 힘든 게 뭐가 대수란 말인가?


민지원(영업팀 막내) : 팀장님, 인제대학교에서 언제 미팅 가능한 지 회신 달라고 연락 왔었습니다.

봉팀장 : 아.. 인제대.. 우리 부산대 미팅이 언제지? 머니까 그때 같이 시간 만들면 좋을 거 같은데? 그리고 그 미팅은 지원 씨랑 여 과장이랑 같이 다녀오는 걸로 하자고.

여 과장 : 네 알겠습니다. 팀장님.

봉팀장 : 최부장은 고려대 기술협의 미팅과 한국장애인도서관 최종결과보고 준비 차질 없게 부탁할게.

최부장 : 네. 개발팀하고 계속 커뮤니케이션하고 있습니다. 팀장님.


영업이 잘되면 회의도 다이내믹하고 활기차다. 무슨 대단한 지구 지키는 일을 하는 어벤저스처럼 역할도 딱딱 들어맞고 의욕도 넘쳐난다. 회사일이 즐거울 수도 있다는 걸 체감하는 나날이 계속 됐다. 하지만 영업은 늘 다음을 생각해야 하는 법. 그냥 놔둬도 저절로 굴러가게 될 이번 성과를 넘어 더 중요한 보물창고가 곧 열릴 시점이 다가왔다.


강상무 님 : 봉팀장, 저번에 얘기했던 행안부 문서보안 프로젝트가 RFI를 준비하는 거 같다는 데.

봉팀장 : 와.. 이제 시작되는군요. 이거 잘되면 전국 지자체에 다 우리 솔루션이 깔리는 거죠? 상무님.

강상무 님 : 어쩌면 케리스 프로젝트는 아무것도 아닌 거일 수도 있어. 우리가 그래도 선점해서 유리하긴 한데 방심하면 안 될 거야. 슬슬 준비하자구.

봉팀장 : 네. 알겠습니다. 상무님. 한번 이겼으니 계속 이기는 걸로..


진짜 큰 프로젝트가 다가온다. 분기가 아닌, 반기가 아닌, 1년이 아닌 어쩌면 몇 년의 먹거리가 될지도 모르는 큰 프로젝트. 수주만 한다면 전국 모든 지자체의 컴퓨터에 우리 제품이 하나씩 깔리게 될 메가 프로젝트의 커튼이 열리려고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큰 싸움을 앞두고는 항상 내 몸을 살피기보다는 상대의 덩치와 근육을 먼저 보게 된다. 저번 프로젝트는 우리가 승리했지만 M사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오랫동안 공공영업에 특화되어 진화한 엄청난 내공을 가지고 있고 정부기관 곳곳에 그들에게 우호적인 세포들이 많이 증식되어 있기도 하다.


업무특성상 가끔 그 회사의 영업사원들과 미팅을 하거나 드물게 술도 한잔 했었지만 영업사원 개개인의 능력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특히 나와 거의 대척점에서 경쟁하고 있는 안용철 부장은 잔뼈를 넘어 척추까지도 공공영업에 굵어있는 베테랑이다. 나보다 나이가 많아 가끔 만나면 반말과 존댓말을 섞어 쓰기도 하신다.


"따르르릉"

봉팀장 : 아.. 안부장님. 안녕하세요? 어쩐 일이세요 전화를 다 주시고..

안용철 부장 : 봉팀장님. 어떻게 승리의 기쁨은 잘 누리고 계십니까? 난 죽을 맛인데?

봉팀장 : 아이고 왜 이러세요? 그게 벌써 언제 일인데. 다 지나갔습니다. 부장님.

안용철 부장 : 무슨... 후속 프로젝트들 수행하느라고 기쁨의 비명소리에 강남이 시끄럽다는 소문이 자자한데.. 좋겠어.

봉팀장 : ㅎㅎ 소문이 거기까지 났나요. 죄송합니다. 그때 결정 나고 인사도 못 드렸네요 죄송해서..

안용철 부장 : 그래요? 그럼 오늘 저녁에 시간 좀 어때? 내가 긴히 할 말도 있고 한번 봅시다. 시간 괜찮아요?


전화통화를 하다 보면 아주 일상적이고 평범한 말인데도 무언가 싸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약속을, 그것도 급하게 잡으려 하는 안부장의 속마음이 그리 클린 하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봉팀장 : 오늘요? 흠. 특별한 약속이 없긴 한데 그럼 강남으로 넘어오실래요?

안용철 부장 : 응응. 그러자구. 그리고 괜찮으면 김준표팀장도 같이 볼 수 있을까?

봉팀장 : 김준표팀장도 같이요? 흠. 한번 물어볼게요.

안용철 부장 : ㅇㅇ 가능하면 꼭 같이 나왔으면 좋겠어. 그럼 이따 보자구. 시간하고 장소는 문자 보낼게


무언가 있다. 그런데 궁금하다. 일찍 들어가겠다고 2시간 전에 와이프에게 통화를 했었지만 그걸 못하게 된 미안함을 넘어설 정도로 궁금하다. 이 중요한 시기에 왜 안부장은 급하게 나를, 그것도 김팀장과 같이 만나려고 하는 걸까?


같이 가기로 한 김준표 팀장에게는 이런 내 기분을 굳이 말하지는 않았다. 해맑은 김팀장은 오랜만에 당구도 한게임 어떠냐며 즐거워한다. 니가 그렇게 단순하니까 영업사원은 못 되는 거야라고 살짝 속으로 비웃어 주고도 의문은 떠나지 않는다. 예상되는 몇 가지 시나리오가 있긴 한데 설마 그럴라구, 그렇게까지 할려구라는 생각에 지워 버렸다. 그래 만나보면 알겠지. 그냥 별뜻 없는 모임인데 지나치게 예민하게 생각하는 모양이다. 어차피 저번 프로젝트 실주한 거 위로도 할 겸 술은 내가 사야지 라는 생각을 한다.


슬슬 약속시간이 다가오고 회사 근처에 장소를 잡은 탓에 김팀장과 같이 오랜만에 회사 근처 거리를 걸었다. 자기가 좋아하는 회를 먹게 돼서 이 단순한 친구는 두 번째로 즐거운 걸음새다. 저 멀리 약속장소가 보인다. 그런데 이상하게 거리가 좁혀지지 않는 다. 들어가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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