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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업본부장 한상봉 Nov 06. 2023

영업사원 봉팀장의 하루 - 제3화 이기는 습관

잠이 깼다. 잠이 든 지도 몰랐는데 잠이 깼다. 아무리 뒤척여도 잠이 오질 않아 그냥 샐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잠이 깬 느낌이 들다니. 뭔가 무지하게 손해를 본 거 같아 기분이 안 좋다.


오늘은 너무나 중요한 프로젝트의 제안발표회가 있는 날이다. 잠이 잘 올리가 없다고는 생각했는데 이렇게까지 설칠 줄은 몰랐다. 전날 늦게까지 마지막 체크리스트를 점검하고 예상질문에 대한 시뮬레이션을 돌려보고 제안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하게 살펴보느라 귀가 자체가 늦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오늘 결과에 대한 불안감과 기대가 잠을 뺏었나 부다. 사실 너무너무 간절한 영업사이트라 잠 하루 못 자는 건 아무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아마 나도 나지만 오늘 제안발표회 메인 발표를 맡은 사업전략팀 김팀장도 잠을 설쳤을 것이다. 베테랑 발표자로 업계에 명성이 자자하지만 그 역시 이번 프로젝트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기에 얼굴에 긴장감을 숨기질 못하는 듯하다.


봉팀장 : 김팀장. 긴장한 거야? 얼굴이 비장하네?

김팀장 : 긴장은 무슨, 너야말로 좋은 꿈 꿨냐? 너 이거 부러지면 사표 써야 되는 거 아냐?


김팀장은 오랜 친구다. 이전 회사부터 호흡을 맞춰온 사이기도 하지만 대학시절부터의 베프라 눈빛만 봐도 서로의 기분을 알 수 있다. 꽤나 긴장한 걸로 봐서 이 친구도 이 사이트의 중요성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는 것이리라


사장님 : 봉팀장. 케리스 프로젝트 수주 준비는 잘되고 있나? M사도 꽤 열심히 준비한 모양이던데?

봉팀장 : 네. 사장님. 최선을 다해 준비하고는 있는데 아무래도 늦게 뛰어든 지라 시기적으로는 저희 회사가 불리한 건 사실입니다.

사장님 : 알지. 그래도 꼭 이번건은 수주해야 할 텐데. 암튼 필요한 거 있으면 강상무랑 상의해서 다 해줄 테니 꼭 따와. 내가 소고기 한번 쏠게.


꼭 소를 가지고 부담을 주신다. 소고기 안 먹어도 좋으니 혹시 실주하더라도 너무 혼내지 않으셨으면 좋겠는데. 사장님 심정을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지만 사실 많이 부담스럽다. 한 달 동안 채소만 먹어도 좋으니 꼭 수주했으면 좋겠다는 실없는 생각도 해본다.


저 멀리서 이번 프로젝트의 제일 센 경쟁사 M사의 안용철 부장이 다가온다. 그렇게 느껴서인지 기분 탓인지 왜 저렇게 평온한 얼굴이지? 하는 생각까지 한다. 모든 게 민감하고 신경쓰이는 시간이다.


안부장 : 봉팀장님.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봉부장 : (좋기는 날씨가 이렇게 흐린데) 네 부장님. 좋은 아침입니다. 많이들 오셨네요?

안부장 : 뭐 실력이 안되니 인원으로 한번 밀어볼까 하구요. ㅎㅎㅎ


어차피 발표회장에 들어가는 인원은 정해져 있는데 진짜 무슨 기싸움하듯이 열명가까이 되는 사람들이 웅성 웅성댄다. 안부장의 엄살도 거슬린다. 지금 M사가 가장 영업이 잘 되어있고 수주 1순위 업체라는 걸 다 안다. 거기에 다른 회사 사람들까지 대기실에 모여있느라 마치 검투를 앞둔 글래디에이터들의 대기소 같다. 


부사장님 : 봉팀장 우리도 좀 더 올걸 그랬나? 4명은 좀 적은가?

봉팀장 : 아이고 괜찮습니다. 부사장님. 우린 일당 백이잖아요. 어차피 4명밖에 못 들어가는데요 뭐.


말은 이렇게 했지만 몸에 스치는 모든 기운과 느낌에 예민하다. 직접 발표를 해야 하는 김팀장은 아예 말도 섞지 않고 계속 발표멘트를 웅얼거린다. 전에 들은 거로는 발표하는 20분이 마치 2시간 같다고 했다. 오늘 잘 부탁한다 친구야.


"F사 들어와서 준비하세요." 담당자의 호출이다. 우리 회사가 첫 번째 발표순서다. 이상하게 발표회장으로 들어가는 걸음걸이는 무언가 어색하다. 마치 같은 방향의 팔과 다리가 같이 움직이듯 부자연스럽게 자리를 잡고 심사위원들을 살펴본다. 오늘 저 사람들의 볼펜에 나와 우리 회사의 반기 실적이 달려있다.


역시 김팀장의 발표는 수려하다. 물 흐르듯 반복된 단어나 문구 없이 우리 회사의 장점과 이번 제안의 킬포인트를 정확한 발음으로 전달하고 있다. 그러나 이건 20분만 주어진 우리 회사를 위한 시간일 뿐 몇 개월간의 영업과 전략이 어떻게 반응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하지만 별의 순간이 왠지 있을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든다. 온 우주가 우리를 도와주기 위해 한번 건넬 것 같은 선물 같은 별의 순간.


심사위원 : 질문드리겠습니다. 제안서 문구 그대로 질문드릴게요. '이번 프로젝트 성공을 위한 10개 시범사이트 운영'이라고 157페이지에 명기하셨는데 이거 오타 아닙니까? 정말 10개를 시범사이트로 하실 건가요? 2개만 요청드린 거 같은데요. 물리적으로 못할 거 같은 이런 제안하시면 곤란합니다.


별의 순간이다. 질문받은 김팀장은 당황한 기색으로 나와 부사장님, 개발팀장을 바라본다. 안 그래도 큰 얼굴에 Help라고 써있는 것 같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저 친구를 우리 회사를 그리고 나를 구할 사람은 세상에 오직 나밖에 없다. 


봉팀장 : F사 영업담당입니다. 심사위원님께서 질문 주신 10개 시범사이트 운영은 오타가 아닙니다. 만약 시범사이트 운영이 3달이나 4달이었으면 허위 제안이라고 하셔도 할 말 없을 겁니다. 하지만 사이트운영기간이 저스트로 한 달이라면, 전사적으로 스케줄 조정하여 투입하는 걸로 사장님께 결재를 득했습니다. 10개의 시범사이트 운영은 이번 프로젝트를 생각하는 저희 F사의 마음가짐으로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심사위원들 중 몇몇은 고개를 끄덕였다. 몇몇은 심사지에 메모를 하는 것도 보인다. 성공이다.


심사위원 : 그렇군요. 그렇게 전사적으로 역량을 투입하신다면 가능하겠네요. 잘 알겠습니다.


이후로는 가벼운 질문들 몇 가지와 깔끔하게 대답하는 김팀장의 시간이 있었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우린 첫 단추는 늦게 잠갔지만 마지막 단추는 누구보다도 빠르게 강하게 여미었다는 것을.



수주결과는 그날 늦게 다른 회사 영업사원의 문자로 먼저 알게 되었다. '수주 축하드립니다.' 차마 결과를 확인하기 떨려서 당구장에서 당구를 치며 잊으려고 했는데 문자를 받고 김팀장과 당구장에서 얼싸안았다. 아마 당구장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다들 이상하게 생각했으리라.


출장 가 계신 사장님께 문자로 보고를 드리고 바로 부사장실로 달려갔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함께 고생하신 부사장님은 아이처럼 좋아하셨고 다음번 연봉협상에 내 앞자리를 바꿔 주시겠다는 성공공약도 던지셨다. 녹음해도 되냐는 내 농담에 본인이 직접 본인 전화기에 녹음을 하시고 나에게 톡으로 전송해 주실 정도로 기뻐하셨다.


오늘은 원 없이 마셔도 되는 날이다. 불과 얼마 전만 해도 부서를 통폐합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의 나날이 있었는데 오늘은 그 모든 걸 날려버리고 증발시킬 정도로 몸을 적실 생각이다. 더구나 함께 고생한 함께 이 기분을 느낄 수 있는 누군가와 함께라는 건 더 기쁘고 즐겁다. 그리고 취중에도 문득 이런 기분이 습관이 되어 계속 느끼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이기는 습관이 얼마나 영업사원을 키우고 자라게 하는 지를 온몸으로 절감하는 밤이다. 그리고 적셔진 알코올로 체감도는 두 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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