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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기타 Jan 14. 2024

태화강 백 리 길을 거닐다 3

■ 암각화 귀신고래, 장생포에서 만나다

  고래박물관은 1986년 포경이 금지된 이래 사라져가는 포경유물을 수집, 보존·전시하고 있다. 박물관 2층 중앙에 귀신고래의 실물 모형, 고래의 골격과 실제 뼈가 전시되어 있었다. 지구상의 생물 중 가장 덩치가 큰 고래다. 큰 고래의 경우 소 120마리에 해당하는 자신의 몸을 내어주어 수많은 사람의 연명에 기여했음에도 인간의 탐욕과 무분별한 남획으로 멸종 위기에 이르러 보호받는 처지가 되었다. 인류 최초의 고래잡이를 한 용감하고 지혜로운 조상의 후손으로 이제는 구경조차 하기 힘든 고래를 모형과 뼛조각으로 대하고 있는 현실에 만감이 교차하였다. 십 여종의 고래 골격

모형을 둘러본 후 늦게나마 고래 영혼의 안식을 기원하며 박물관을 나왔다.

  박물관 우측으로 장생포와 방어진을 연결하는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 긴 현수교인 울산대교가 보인다. 다음 여정은 저 울산대교 너머의 방어진이다. 박물관 바깥에 전시된 마지막 포경선 제6진양호를 배경으로 기념 촬영 후 장생포 일정을 마무리하였다.     

■ 과거와 미래가 공존하는 방어진(2024. 1월)

  방어진항은 1900년대 초반 어업 전진기지로 번성했던 동해안 최대의 항구였다. 일제 강점기 시절, 성어기에는 육칠백 척의 어선과 삼, 사천 명의 어부가 드나들었다고 한다. 또 지금은 사라지고 없으나 방어진 철공 조선소는 우리나라 조선산업의 모태가 된 곳으로 오늘날 세계 최대의 현대조선소가 이곳에 있음이 우연이라고만 할 수 없다. 

  이곳까지 오는 길에 많은 공장과 굴뚝, 선박, 선적 대기 중인 차량을 볼 수 있었다. 차로 한참을 가도 거대한 규모의 공장 건물과 엄청난 크기의 차량운송 선박, 원유 수송선 등을 계속 볼 수 있었다. 여기까지인가 하면 곧이어 다른 공장 건물이 나타나길 몇 차례, 그 규모의 대단함이 지난 반세기 동안 울산이 대한민국이 세계 10위의 경제 대국으로의 성장을 견인하는 역할을 했음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 규모의 대단함에 1970년대 후반 프랑스의 신문사 ‘렉스프레스’가 우리나라의 발전상을 소개하며 울산시를 현대 시로 잘못 표기하는 오류를 왜 범했는지 이해가 되었다.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나라 산업 수도의 역할을 잘 수행해 왔듯이 앞으로도 그 역할을 계속 이어주길 소망하였다. 

 어릴 적 자주 다녔던 일산해수욕장을 찾았다. 수온이 낮아 물속에서 5분, 10분을 견디기 어려웠다. 백사장 왼쪽으로 그 옛날 군사적 방어진지였던 이곳의 지명까지 바꾸게 한 방어를 선창 가득 싣고 와서 부렸던 어선들이 드나들던 방어진항이 보인다. 백사장에 잠시 앉아 바다 위에 떠 있는 원유 수송선, 컨테이너 선박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잠시 옛 추억에 잠겨 본다. 

  초등학교 시절 친척 한 분이 이곳에서 일제 강점기에 지어진 2층 적산가옥에 사셨다. 울산과 방어진을 오가는 시외버스 사업을 하셨기에 여름철이면 무임 승차하여 일산해수욕장, 울기등대와 방파제로 놀러 오곤 했다. 백사장 우측 대왕암 공원의 송림 그늘은 더위와 바닷물에 지친 몸을 잠시 쉬던 곳이다.      

■ 동해안 최초의 울기등대, 대왕암     

  대왕암 공원 송림이 있는 곳은 조선 시대 말을 사육하던 곳이었다. 일제가 러일 전쟁 후 군사적 목적으로 1만 5천 그루의 해송을 심어 인공적으로 조성하였다. 송림과 함께 기기묘묘한 바위들이 해안의 절경을 이루어 “제2의 해금강”이라 불리었다. 그 송림 속에 동해안 최초의 등대로 울산의 끝이라는 뜻의 ‘울기(蔚埼)’등대가 서 있다. 해송이 자람에 더는 등대의 기능을 발휘할 수 없게 되자 50M 바다 쪽으로 새 등대를 세웠다. 추억의 울기등대는 변했어도 일렁이는 바다는 옛 모습 그대로다. 출렁다리를 건너 대왕암 공원이다. 대왕암은 신라 문무대왕이 경주시 앞바다의 왕릉에 안장되자 왕비도 나라를 지키겠다는 마음으로 용이 되어 승천하여 바위가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 온다. 대왕암 전망대에 올라 탁 트인 바다를 바라본다. 서해가 포근한 어머니 품과 같다면 동해는 젊음이 넘치는 청춘의 바다 같은 느낌이다.     

■ 간절곶 일출, 가슴에 품다

  ‘간절곶에 해가 떠야 한반도에 아침이 온다(艮絶旭肇早半島)’라고 했다. 간절곶은 새해 첫 태양을 보며 한 해의 소망을 발원하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 일출 명소이다. 지구 자전축이 기울어진 겨울에는 영일만의 호미곶, 강릉의 정동진보다 1분에서 5분 빨리 동해의 일출을 감상할 수 있다. 비록 새해 첫날은 아니나 일출을 맞이하려 숙소를 간절곶에 잡았다. 숙소에서 확인한 내일 해 뜨는 시간보다 30분 전에 바닷가로 나서기로 했다. 며칠째 구름 낀 하늘이기에 내일은 부디 붉은 해를 맞이할 수 있길 기원하였다. 

  오래전 양양 앞바다 수평선 위로 떠 오르던 해를 보았을 때의 감흥을 다시 맛볼 수 있을까. 해가 솟아오르기 직전 수평선과 닿아 있던 해의 아랫부분이 마치 바다가 잠시 붙들고 있다 놓아버린 것처럼 툭 하고 튕겨 나가듯 수평선 위로 떠 오르던 일출의 광경은 오랫동안 가슴에 남아있었다. 고향 앞바다에서 평생 처음으로 한반도에서 가장 빠른 일출을 미리 보기 위해 서 있는 마음이 새롭다. 솟아오르는 해를 향해 소원을 빌고 그 소원을 적은 엽서를 소망 우체통에 넣으리라. 찬란한 일출과 같이 모두가 밝고 힘찬 한 해가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 추억은 아름다우나 연연할 수만 없다 

  벼르고 있었으나 늦어진 발걸음이었다. 오랜 세월 고향을 떠나 살았기에 어릴 적 살던 집과 학교를 한번 가 보고 싶었다. 그동안 고향 걸음을 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집안과 직장 일로 다녀갔기에 둘러볼 여유가 없었다. 

  ‘발걸음 에세이’ 연재 의뢰에 당혹스러웠다. 필력이나 등단 연륜으로 볼 때 기고할 처지가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그동안 ‘발걸음 에세이’를 집필해 오신 분들의 업적에 누가 될까 부담스러웠다. 또 객지 생활 50여 년 동안 집과 회사를 쳇바퀴 돌듯했기에 자신 있게 소개할 곳도 마땅히 없었다. 그런 고민 끝에 고향 방문을 생각한 것이다. 그동안 소홀했던 고향의 이모저모를 살펴보고 서술해 보는 것도 고향에 진 마음의 빚을 일부나마 덜 수 있는 길이라 생각하고 용기를 낸 것이다.      

  이번 여정의 마지막 날, 옛집과 학교로 가는 걸음 내내 어떻게 또 얼마나 변했을까 하는 생각과 상상으로 설렜다. 코흘리개 시절 6년간 배우고 뛰놀았던 초등학교를 먼저 찾았다. 스무 계단쯤 올라야 했던 계단은 폐쇄되었고, 양옆으로 새로 놓인 돌계단엔 잡초가 자라고 있었다. 교정에 들어선 순간 눈에 비친 모습에 마음이 텅 비는 듯했다. 사십여 개의 학급이 있던 2층 교사는 없어졌고, 운동장만 덩그러니 황량한 모습의 비포장 주차장이 되어 있었다. 졸업식을 했던 강당 옆 수령 300년의 회화나무 한그루만이 여기가 학교였음을 확인해 주는 유일한 증표였다. 옛 모습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으나 너무나 황량해진 모습에 오랜 세월 그리움으로 간직해 왔음이 허탈하였다. 이런 모습인 줄 알았다면 그 애틋함도 없었으리라. 학교 앞 거리 양쪽의 인쇄소, 한약방, 병원, 약국이 있던 자리에 예전 흔적이라곤 남아있지 않은 낯선 건물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마음을 추스르며 학교와 가까웠던 옛집을 찾아 나섰다. 다행히 골목길은 예전 그대로였다. 옛집의 흔적 일부라도 찾아볼 수 있길 바랐다. 어렵지 않게 낯선 건물이 자리하고 있는 옛집을 찾을 수 있었다. 잠시 옛 기억을 더듬으며 바라보다 집 뒤에 있던 옥골 샘을 찾았다. 집 뒷문으로 오십 보 거리에 있던 ‘착한 심성의 벙어리가 우물의 물을 3년간 먹고 말문이 트였다’라는 얘기가 전해오는 옥골 샘이다. 우물은 그때보다 축소된 형태로 남아있었다. 다시 골목길을 나와 주변을 살폈다. 그래 여기가 방앗간, 저기가 자전거 수리 집, 그 옆이 두부 공장, 약국이 있던 곳이며, 앞쪽의 저 골목은 어릴 적 시장에 콩나물 심부름을 다녔던 그 골목길이다.      

  1962년 시 승격 후 공업지역 선정과 공단 조성에 따른 외지 인력의 급속한 유입으로 시 중심지인 이곳을 중심으로 도시개발이 추진되었으나, 지역민의 반대로 개발

되지 못하고 대신 태화강 이남, 지금의 남구 삼산동 일대에 신도시가 건설되었다. 시청을 비롯한 주요 관공서가 모두 강남으로 이전하여 예전의 중심이던 이곳은 변화와 발전을 이루지 못했다. 구시가지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로마, 파리처럼 옛 모습을 유지하고 있기에 나에겐 옛 추억을 더듬을 수 있는 흔적과 형태가 그런대로 남아있음은 불행(?) 중 다행이었다. 역사는 변함과 도전의 기록이다. 변화를 수용하지 못한 결과를 눈으로 확인한 고향 발걸음이었다.     

  갑진년 새해, 용띠의 해다. 용이 승천하는 기상으로 모두가 소망하는 일이 다 이루어지길 소망하며 ‘태화강 백 리를 거닐다’ 연재를 마무리 짓는다. 반세기 만에 고향 발걸음 기회를 주신 분들과 4박 5일간 흔쾌히 고향길 안내와 동행을 자처해 준 40년 지기 두 사람에게 지면을 빌어 고마움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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