델타 변이 바이러스 확진자 폭증으로 거리 두기 4단계가 시행되었다. 단지 내 놀이터, 쉼터, 노인정도 잠정 폐쇄 조치 후 안내문 게시만으로 미흡한 생각에 출입 금지 띠를 어린이 놀이터와 정자(쉼터)에 둘러치기로 했다. 작업 완료 후 복귀한 과장을 따라 거동이 불편한 노인 부부가 오셨다. 첫인상으로 팔순은 넘으신 듯했다. 관리소장이 누구냐는 언성이 높고 손까지 떨고 계신지라 경리 주임이 시원한 생수 한 컵을 갖다 드리며 우선 좀 앉으시라 했다. 사연인즉 띠 작업하러 간 정자에는 마침 두 분이 쉬고 계셨다. 과장이 두 분께 '코로나 때문에 폐쇄하였으니 오래 계시면 안 됩니다' 했더니 왜 못 쉬게 하느냐 야단치며 소장에게 따지겠다며 오신 것이었다. 입주민 보호와 감염 예방을 위한 일이니 이해하시라는 말을 하며 할아버지와 마주 앉았다.
동대표 경험이 있으신 듯 할아버지는 '내가 왕년에…' 아니 '내가 동대표 할 때는 말이야.' 하며 나름 화려했던(?) 라떼 시절의 무용담을 풀어놓으셨다. '라떼는 말이야, 소장이나 과장을 뽑을 때 주민동의를 받았는데 과장은 언제 뽑았느냐, 소장은 언제 왔느냐, 주민동의는 받았느냐, 왜 안 받았느냐' 등의 TMI, 알쓸신잡 강의를 한참이나 하신 후 목소리가 누그러졌다. 그때 할머님이 거드셨다. “할아버지가 몇 년 전에 머리를 다친 후 언어와 보행장애가 생겼고 지금은 치매가 와서 저래요. 쉼터에 못 앉아있게 했다고 저리 야단을 해요. 내 말은 듣지도 않고 무조건 소장 만나러 간다고 고집부려 온 것이니 소장님이 이해하세요.” 두 분의 모습에 부모님이 생각나 할아버지를 달래고 맞장구하며 앞으로 단단히 교육하겠다는 말로 상황을 정리하고 첫 번째 만남을 끝냈다.
문제는 다음 날부터였다. 경리 주임이 할아버지 전화라 하여 전화를 받았다. 다 알아듣지는 못했으나 할 말이 있다고 정자로 오라신다. '지금 교육 중이라 못 갑니다.' '주민이 오라면 와야지.' 등의 말의 공방이 길어질 것 같아 할머니를 바꿔 달라 했다. 할머니는 '이 양반이 아침부터 막무가내라 할 수 없이 전화한 것이니 소장님이 이해하시라'며 미안해했다. 오후에 전화하겠다 하고 통화를 끝냈다. 세 시쯤 할머니 전화가 다시 왔다. “할아버지가 소장님 전화가 없다며 또 관리소로 가자고 해서 할 수 없이 전화했으니 알아서 말씀하세요” 했다. 어제와 같은 말씀이었다. 그 후로도 '메기의 추억'이 아닌 '라떼의 추억'과 심심풀이 땅콩이 되어버린 소장에 대한 할아버지의 일방적인 훈시는 무시로 반복되고 '법으로 한번 따져볼까?' 하는 말이 추가된 것 말고는 달라진 게 없었다.
그런 일이 일상이 되어버린 어느 날 할아버지 전화를 받았다. 길어야 5분이겠거니 하며 귀로 듣고 건성으로 답하며 모니터를 보며 하던 일을 계속하다 뜻밖의 말씀에 전화기를 고쳐 잡았다. '점심 사줄 테니 집으로 와'.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짜장면 시켜준다며 와서 먹고 가라는 것이다. ‘과장은 데려오지 말고 옆에 있는 아가씨랑 같이 오라’ 하셨다. 고3 수험생 아들이 있는 경리주임을 지칭한 것이다. 시원한 생수 한 잔을 대접받았던 게 마음에 남았던 모양이다. 순간 허를 찔린 듯한 기분과 함께 짠한 마음이 들었다. '영감님이 시도 때도 없이 전화하는 이유가 사람이 그리워서 그랬었구나.' 그 후로도 오라는 전화는 두 차례 더 왔다.
며칠 후, 오라 해도 오지 않는 소장이 괘씸했던지 다시 찾아오셨다. 불볕더위 속에 오시느라 얼굴에는 땀이 흐르고 모시 적삼 윗저고리 단추는 두 개나 열려 있었다. 마스크도 없이 오셨기에 새 마스크를 씌워드리며 외출할 때는 꼭 마스크를 쓰고 다녀야 한다며 잔소리도 해가며 단추도 채우고 땀도 닦아드렸다. 일종의 기선제압이었다. 시원한 생수 한 잔을 또 아가씨(?)가 대접했다. 할머니는 아침부터 전화하라는 걸 지금 사무실에 없다고 했으나 혼자라도 가본다고 나가기에 설마 하며 뒤따랐더니 오다 넘어져 그때부터 부축해 왔다고 했다. 바지를 걷어 보니 무릎이 까졌고 혈흔이 있었다. 무더위에 할머니 말씀 안 듣고 뭐 하러 예까지 오셨느냐고 제법 큰 소리로 나무란 후, 구급상자를 꺼내 소독하고 연고를 바른 다음 일회용 반창고로 마무리했다. 이를 지켜보던 할머님이 '소장님 밥 먹으러 집에 오라 얘기한다고 저리 성화를 부리니 언제 집에 와서 식사한번 하고 가면 안 되겠냐' 하신다. 순간 몇차례 거절했던 터라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두 분을 배웅하고 나서 '그래 한번 응해 드리자. 어려운 일도 아닌데….' 열한 시쯤 전화 후 댁으로 갔다. 초인종을 누르고 '소장입니다.' 하고 들어가니 할아버지는 단정한 여름옷차림으로 소파에 앉아 기다리고 계셨다. 손에 쥘부채까지 쥐고 점잖게 앉아있는 모습이 마치 딴 사람 같았다. 옆자리에 앉아 할머니가 내어온 과일을 먹으며 거실 벽에 걸린 전역 기념사진, 가족사진을 보며 군 시절의 무용담, 가족 자랑에 맞장구 해드렸다. 이십여 분쯤 지나 할머님이 온 김에 점심 먹고 가라는 말씀에 정신이 들어 선약이 있다 하고 다음에 와서 꼭 짜장면 먹고 가라는 말을 들으며 사무실로 복귀했다.
그 후 한동안 전화가 없었다. 한 일주일쯤 지난 무렵이었다. 할머님이 혼자 음료수와 멸치 상자를 들고 오셨다. '이게 뭡니까? 할아버지는요?'하며 마주 앉았다. 지난번에 소장님 다녀가신 후에 친정 오빠에게 전화로 그동안 사정을 얘기했더니 집에 와서 며칠 쉬고 가라 하여 할아버지랑 나흘간 다녀왔다. 멸치는 오빠가 갖다 드리라 한 것이라며 떠맡기 듯 건네고 가셨다.
할머님이 가신 후 고민에 빠졌다. '자, 앞으로 어찌해야 하나? 할아버지의 기억을 지우려고 그간 사무적으로 대했고 짜장면도 마다했는데, 이제 가족들의 마음까지 건네받았으니 앞으로 어찌해야 하나?' 그냥 해왔던 대로 대해 드려야겠으나, 중멸치 세 상자에 담긴 할머니와 가족의 마음은 어찌해야 하나? 상자 속 멸치 숫자만큼 더 친절해야 하나?
가인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 가사처럼 저만치 멀어져 가고 점점 잊혀져 가는 할아버지 기억 속에 자칫 주홍글씨처럼 낙인을 찍거나, 할아버지의 24시간이 고장 난 벽시계처럼 온통 소장과 아가씨 생각에 머물게 하는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중멸치 세 상자에 담긴 마음만큼 친절을 더해야 하는지, 그 뒷감당은 누가, 어찌할 것인지…. 중멸치 세 상자에 얽혀버린 지금 고민이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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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글은 수년 전 코로나 시절에 쓴 글로 2023.9.20일 발간한 세 번째 브런치 북 '아파트 관리소장 입니다' 제6화에 올린 글이다. 원래 3편까지 쓴 글이나 좀 더 다듬어야 할 부분이 많아 첫 번째 이야기를 '라떼 할아버지와 멸치 세 상자'란 제목으로 먼저 올렸었다. 그후 틈틈이 수정을 거쳐 세 편 모두 새로 만든 매거진 "아파트 관리소장 이야기'에 한꺼번에 올리는 것이니 보신 분들의 양해를 바란다. 아울러 다소 코믹풍으로 표현한 부분도 있음을 양해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