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떼 할아버지와 소장 사직
'할아버지, 우리 소장님 그만두셨어요. 지난번에 오셨을 때 소장님이 그만두신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오늘 아침 걸려 온 라떼 할아버지의 전화에 경리대리가 답한 내용이다. 재임 7년 차 단지의 소장직을 그만두게 되었다.(실제로 사직한 것 아니다) '라떼 할아버지와 멸치 세 상자'란 글에 소개된 그 할아버지 때문이다.
한동안 전화가 뜸하더니 며칠 전 오셔서 또 한 번 관리소를 휘저어 놓으셨다. 그날은 무엇 때문에 심기가 불편하셨는지 말투마저 다소 거칠었다. 자리에 앉으시자마자 소장을 찾으시길래 '제가 소장입니다.'라고 말씀드렸다. 벌써 네 번째 만남임에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치매 증상임은 분명해 보였다. 그날은 뭣 때문에 심사가 틀어지셨는지 앉자마자 큰 소리를 내셨다. 뭐 소장이 다 해 먹는다나 하시면서…. '아니 뭘 다 해 먹는다고요. 먹는 건 직원들과 함께 점심으로 어디 가서 뭘 먹나 하는 고민 끝에 기껏 주변 식당에서 김치찌개, 칼국수, 청국장 등 맨날 그렇고 그런 메뉴 중에서 돌아가며 먹는 것 말고는 소장이라고 뭘 따로 혼자만 챙겨 먹은 기억은 없는데 뭘 그리 다 해 먹었다고 하는 건지….'
아마도 라떼 할아버지 당신께서 왕년에 잘 나가던 동대표 시절 본인이 잡수신(?) 경험에 비추어 그리 얘기하는 것이려니 생각하며 '아이고, 할부지야, 지금이 어느 때라고 그런 생각을 다 하시냐?' 속으로 툴툴거렸다. 장기수선충당금 상반기 말 잔액이 200만 원이고 올해 말과 내년 말의 예상 잔액마저 '0'에 가까운 단지에서 뭘 해 먹겠느냐 하는 생각이었다. 쓰잘데없는 라떼 할부지 의심에 답하기보다는 커지는 목소리와 함께 말투가 점점 거칠어지는 것을 빌미 삼아 '계속 마스크도 안 쓰고 이런 식으로 얘기하시면 더는 할아버지랑 얘기 못 합니다' 했다. 본인 성질에 못 이겨 한마디 하면 마스크가 그냥 흘러내려, 대화 중 몇 번이고 마스크 쓰고 얘기하시라고 주의를 주었다. 얘기만 하면 언성을 자꾸 높이니 아침부터 사무실 분위기도 그렇고 자꾸 응대하다간 언제 끝날지 가늠할 수 없어 한 마디 더 보탰다.
'할아버지, 저 이달 말까지 일하고 소장 그만둡니다. 인제 그만 오세요.' 물론 할부지를 다시는 못 오게 하려는 얕은수였다. 할아버지의 표정은 그만두든지 말든지 내 알 바 없고 내 당장 성질 푸는 게 우선이라는 듯 관심 없는 표정이었다. 더 이상의 대화는 의미가 없다고 판단되어 전기 검사 지적사항인 ATS (ACB 포함) 교체공사 현장에 가봐야 한다는 핑계로 일어섰다.
이틀 전, 아침 회의 중 할머님의 전화가 왔다. 할아버지가 관리소로 간다고 해서 소장님과 잠시 통화하고 싶다 하여 전화를 건네받았다. 할머님이 조심스레 얘기하셨다. 할아버지가 또 관리소에 간다고 저러니 죄송하지만, 소장님이 그만두셨다고 하면 안 되겠냐고 했다. 그리 양해하시면 이따 열 시쯤 할아버지 앞에서 전화할 테니 여직원이 전화를 받아 소장님 그만두셨다고 얘기해 달라고 했다. 화풀이 대상인 소장이 그만뒀다고 하면 할아버지 생각이 바뀔까 해서 궁여지책으로 낸 할머님의 생각이었다. '네, 그리하세요. 그만뒀다고 말씀드리세요' 하고 짧은 통화를 마쳤다. 그게 이틀 전 할머님과 통화한 내용이었다.
지난달 정기 회의 때 위탁관리 재계약 안건을 상정하고 3년 기간으로 연장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나이가 있어 관리소장으로 마지막 재임 기회인 점, 2년마다의 계약 갱신 업무도 입주민 동의 절차 등 만만찮은 일거리인 점, 지난 6년 간 겪어 보셨으니 이번에는 일거리 하나 줄여준다는 마음으로 3년 기간으로 재계약 처리해 달라고 요청했다. 부임 당시 3년 계약기간에 일 년이 지난 시점에 부임하여, 두 번의 2년 연장 계약 후 현재에 이르렀으니 6년을 현 단지에서 근무했었다. 3년 계약 단지에 부임해서 두 번씩이나 2년 계약밖에 못 해 회사에 체면도 서지 않고 개인적으로 관리소장 생활을 이곳에서 마무리하고 싶으니 이번에는 3년짜리로 해달라며 얘기하며, 이번에도 2년 계약밖에 못 하면 회사에 보직 이동을 요청하겠다며 마음에도 없는 얘기까지 했다. 어쨌든 마음에도 없는 소리인 줄 번연히 알면서도 측은해 보였는지 그리 수용해 주었고, 재계약 개시 후 겨우 3개월이 지난 시점이다. (재계약 처리 후, 회사 법인카드 달라고 해서 1년에 1개월분으로 계산하여 석 달 치 위탁수수료만큼 대표자, 직원들과 장어구이, 경비원, 미화원들과 삼겹살 파티로 목의 때를 좀 뺐다.) 그런데 3년 후 고심해도 될 일을 라떼 할부지 때문에 형식적이나마 사직한 처지가 되어 버린 것이다. 완전히 자의 반 타의 반 아니 타의 반 자의 반으로 말이다. 아직 갈 곳도 없고, 달리 오라는 데도 없는데 말이다.'
알겠다 답변하고 여직원에게 전화가 오면 그리 대응하라 했다. 잠시 후 걸려 온 전화에 '소장님 그만두셨어요. 지난번에 오셨을 때 소장님이 그만두신다고 할아버님께 말씀드렸잖아요. 그래서 그만두셨어요'라는 경리주임의 응대를 듣고 있었다. 할부지의 반응이 어땠을까 궁금했으나 통화는 짧게 끝이 났다.
직원들과 다시 머리를 맞대었다. 혹시나 이 라떼 할아버지가 현장 확인차 관리소를 방문할지도 모르기에 그럴 때를 대비한 전략을 짰다. 할아버지가 관리소로 간다는 할머니 전화가 오면,
첫째. 소장과 나이가 비슷한 시설주임이 얼른 하던 일을 멈추고 소장 자리에 대신 앉는다.
둘째. 할부지가 오시면 새로 부임한 관리소장 행세를 하되 너무 깍듯이 대하지도 말고 사무적으로 대한다.
셋째. 까다로운 면접을 수석(?)으로 통과하였고, 재임 중 해먹을 생각은 추호도 없음을 강조한다.
마지막으로, 코로나 감염 예방 차원으로 시설물의 이용 제한을 더욱 강화할 것이나, 협조적인 주민에게는 특별히 편의를 제공하겠다(사실 명절 동안 쉼터며 놀이터를 일시 개방하기로 이미 의논된 사항이다)고 강조한다 등의 제갈공명도 깜짝 놀랄 대응 전략을 수립했다.
미군의 아프가니스탄 철수작전보다 훨씬 치밀하고 섬세한 전략과 작전을 세우긴 하였으나 막상 사직이란 단어를 마주하다 보니 내 경우 실상 사직서를 써야 하는 때가 그리 멀지 않음을 인식하였다. 주택관리사 자격증 외 기술 자격증 하나 없는 주제에 700여 세대 주민의 안전과 쾌적한 생활을 담보해야 하는 관리소장직을 수행하는 일이 어디 쉬운 일인가? 함께 일하는 현장 경험이 풍부한 과장, 주임, 반장들이 있기에 지금껏 소장님 소리를 듣고 있는 것이다. 3년 계약 체결 운운하던 그 마음 저변에는 이번이 마지막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라떼 할아버지로 인해 다시 한번 인식하게 된 것이었다.
한두 차례의 이직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다. 한해, 두 해가 지날수록 단지 내 여러 시설에 묻어있는 손때와 이런저런 나름의 스토리도 많다. 또 보기 드문 진상(?) 입주민도 우호적 관계로 변해 있는 지금, 그놈의 정 때문에 쉽게 결정하지 못한 이유도 있고, 한 곳에서 7년 차를 맞이할 수 있는 것도 협력적, 우호적인 시선으로 봐주는 동별대표자와 많은 주민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남은 기간 관리소장 첫 부임 때만큼은 아닐지라도 그때의 초심을 돌이켜보며 재임이 끝나는 날까지 성심껏 일하다 마무리 지어야지 하는 마음을 가져본다.
'라떼 할부지, 할부지는 사직서 쓰실 일은 없으시지요. 장수란 축복받아야 마땅한 일이나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건강을 유지하며 오래 사셨으면 합니다. 앞으로는 애꿎은 관리소 직원들을 힘들게 하는 일은 자제하시고, 할부지 수발하시느라 몸과 마음이 많이 지쳐있는 할머니와 남은 여생 오손도손 정답게 사시길 바랍니다. 늘 건강하세요.'
거짓으로 사직한 관리소장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