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하루만 해도 그렇다. 아침에 일어나 크림색 통창 커튼을 걷으니, 맑고 푸른 가을 하늘에 흰구름만 간간히 떠 있었다. 그 아래 푸른 바다는 깊은 쪽빛을 띠고 있었다. 현관문 앞에서 문 열어 달라고 보채는 보리랑 마당에 나가니, 바람이 제법 쌀쌀했다. 먼 동쪽에서 떠오른 해는 구름 사이로 은빛을 뿌리고 있었다. 감나무에서 감을 쪼아 먹는 직박구리의 청량한 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상쾌했다. 좋은 날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오전에 일을 마치고, 흔들의자에 앉아 에세이집을 읽고 있는데, 평소 잘 들어오지 않던 보리가 거실을 왔다 갔다 한다. 밥 먹으러 왔나 했더니 그것도 아니었다. 그제야 고개를 들고 통창을 보니 어느새 회색빛으로 덮인 하늘에서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다. 아, 비를 피해 들어왔구나. 마당에는 새소리도 사라지고 나무와 풀은 빗물에 스며들고 있었다. 서둘러현관문을 닫고 이층 창문도 닫았다.
비바람이 점점 거세지자, 작은 숲을 이루는 나무들은 몸을 떨며 어쩔 줄 몰라한다. 가랑비는 과체중의 작달비로 변해 두려움을 주고, 하늘보다 짙어진 회색빛 바다에는 어슴푸레 파도가 일렁인다. 이런 날은 고양이들도 노곤해져 각자 좋아하는 자리에서 웅크리고 낮잠을 청한다. 보리는 식탁아래 의자에 숨어 식빵자세로, 벤지는 탁자 위 컴퓨터 뒤에서 책을 베고 널브러져 잔다. 비 오는 날에 고양이들은 사냥을 할 수 없으니, 에너지를 축적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잠을 자는 습성이 있다고 한다.
고양이만 그런가? 사람인 나도 비가 오면 몸이 나른하고 행동도 둔해진다. 비가 추적추적 운치 있게 내릴 때 따뜻한 커피 한 잔에 쇼팽의 <녹턴>을 들으면, 아련히 떠오르는 옛 추억을 음미하게 된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거센 비바람은 내 마음까지 공포로 휘몰아간다. 아침에 상쾌했던 그 기분은 두려운 마음으로 싱숭생숭해진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소로의 일기』(윤규상 역) 1855년 2월 5일 자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일기를 쓸 때 간단하게라도 그날의 날씨를 적어 놓는 것이 꼭 필요한 일이 아닐까 싶다. 그날 날씨의 특징이 우리 기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소로는 날씨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고, 일기를 쓸 때마다 그날의 날씨를 자세히 묘사했다. 또한, 날씨에 따라 달라지는 자연 속 일상도 상세히 기록했다. 자연과 가까운 삶을 추구했던 그였기에 날씨의 영향은 더욱 컸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 옛날 국민학교 일기장에 날짜와 요일, 날씨를 적었던 기억이 난다. 알록달록한 사인펜으로 맑은 날은 웃는 노란 해님을, 흐린 날은 찡그린 회색 먹구름을, 눈이 내리면 빨간 모자를 쓴 은빛 눈사람을 그렸고, 비 오는 날은 검은 우산에 빗금을 쫙쫙 쳤었다. 그 시절 공부만 하던 어린 나에게 날씨가 그다지 중요하지는 않았겠지만, 최소한 날씨 그리기는 즐겼던 것 같다.
다시 소로로 돌아가서, 그의 말대로 날씨가 기분에 영향을 미치는 건 분명한 것 같다. 사납게 휘몰아치는 비바람을 보니 춥고 울적해져 마음의 위로가 필요해진다. 점심 때도 되었고, 뜨끈한 멸치 국물로 만든 국수가 생각났다. 배달은 안 되니, 이 날씨에 오랜만에 외식이나 할까? 멀지 않은 곳에 옛날 국숫집이 있던 것이 생각났다. 잔치국수를 좋아하는 딸도 빨리 가자고 조른다.
우리는 비바람에 우산을 꽉 잡고 재빠르게 차로 이동했다. 운전하면 고작 10분 거리라 부담이 없었다. 그런데 그 짧은 시간 동안 와이퍼의 작동은 점점 느려지더니 결국 필요 없어졌다. 국숫집에 다다를 때쯤 비가 거의 그쳤기 때문이다. 그렇게 세차게 내리더니, 갑자기 멈춘 것이다. 다행이었다. 좁은 1차선 도로에 접한 국숫집은 정감 어린 작은 식당이었다. 테이블 네 개에 두 팀정도 간신히 들어갈 수 있는 작은 방 하나가 전부였다.
식당에 들어서자 테이블은 손님들로 가득 찼다. 기다려야 하나 했는데, 마침 식사를 끝낸 손님이 일어나 우리가 앉을 수 있었다. 메뉴는 잔치국수, 비빔국수, 콩국수 단 세 가지. 그런데 가격이 커피 한 잔 값도 안 됐다. 더 놀라운 건 국수 그릇과 양이었다. 세숫대야에 국수가 나오는 줄 알았다. 이렇게 많은 줄 알았더라면 적게 달라고 부탁했을 것이다. 그런데 국수가 얼큰하고 너무 맛있어서 결국 그 많은 양을 다 해치워버렸다. 잠시 '쯔양'으로빙의된 듯한 기분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장사하면 사장님께 남는 게 있을까 싶다.
10년 전에 제주로 건너오셨다는 사장님의 국숫집은 곳곳에 재치가 넘치는 글귀와 예쁜 유화들이 걸려 있다. 빈티지 콘셉트가 아니라 가게 자체가 빈티지라 예쁘다. 여기저기 사진을 찍는 내 모습은 영락없는 관광객 모드였나 보다. 사장님이 관광객이냐고 물으신다. 올 초에 근처 동네로 이사 왔다고 하니, 잘했다며 서쪽이 좋다 하신다. 그러면서 요즘 한창인 억새풀을 볼 수 있는 오름, 축제, 여름에 즐길 수 있는 스노클링 등 깨알 정보를 폭우처럼 쏟아내신다.
배불리 먹었으니, 잠시 길을 따라 걷기로 했다. 빈티지 옷을 좋아하는 딸이 빈티지 카페를 발견해 같이 들어간다. 나는 따뜻한 라테, 딸은 시원한 석류에이드를 마시고, 빈티지 가을 옷 두 벌을 골라 나온다. 하늘이 흐린 날의 마지막 흔적을 지우고 다시 맑아지니 울적했던 마음도 가신다. 딸과 맛있는 국수도 먹고 커피도 마시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는데, 어찌 된 까닭인지 마음 한쪽에 아쉬움이 남는다.
생각해 보니, 내가 날씨에 너무 휘둘린 것 같았다. 오늘 제주는 눈을 제외한 거의 모든 날씨를 하룻만에 선보였고, 앞으로도 나는 변화무쌍한 제주 날씨를 자주 마주치게 될 것이다. 날씨가 우리 기분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서, 일기에 날씨를 적으라고 했던 소로의 조언은, 아마도 날씨에 따라 내 기분이 좌우되지 않도록 중심을 잡고 계획을 세우라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변덕스러운 날씨에 내 마음까지 흔들리면 안 되겠지만, 오늘 국숫집 방문은 소로도 이해해 줄 것이다. 그가 좋아하는 산책까지 했으니 말이다.
집에 돌아오니, 마당 곳곳에서 아침에 들었던 직박구리소리가 다시 경쾌하게 울려 퍼진다. 현관문을 열자, 긴 잠에서 깨어난 고양이들이 앞발을 뻗으며 길게 하품을 한다. 날씨에 흔들린 하루였지만, 결국 내 예상대로 좋은 날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