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로운 토요일 오전, 거실에서 털북숭이 벤지한테 빗질을 해주는데, 핸드폰을 보던 딸이 갑자기 묻는다.
"어디, 작은 영화관에서? 뭐 하는데?"
"알모도바르라는 스페인 감독이 만든 영환데, <룸 넥스트 도어> 예요."
음, <내 옆 방>.재미있을 것 같다. 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00 작은 영화관'은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설렌다. 이름에서 아늑하고 정겨운 시골 분위기가 물씬 느껴지기 때문이다. 가봐야지 하면서도 원하는 영화는 대부분 한 타임만 상영해, 시간이 맞지 않아 미뤘던 곳이다. '내 옆 방'에 거주하는 바쁜 딸이 어쩌면 나를 위해 제안해 준 것 같아 더 보고 싶어졌다. 더구나 내가 좋아하는 배우 줄리앤 무어와 틸다 스윈톤이 함께 열연한다니!
도시에 살던 시절, 차로 5분 거리에 유명 브랜드의 영화관이 있었다. 큰 스크린과 뛰어난 음향으로 영화를 즐기고 싶을 때면 찾곤 했지만, 그 횟수는 점점 줄어들었다. 결국 그 영화관은 폐업했고, 그 소식에 정말 놀랐다. 넥플릭스나 애플 TV 같은 OTT가 대세가 되면서 관객이 줄어든 것이 큰 원인일 것이다.
시골로 이사 온 후, 영화관과의 거리는 심리적으로나 거리적으로나 멀어졌다. 대신, 2층 거실에 우리만의 영화관을 만들었다. 유화를 걸어 둔 크림색 벽은 그림을 떼어내면 완벽한 스크린이 된다. 거실에 통창이 두 면을 차지하지만, 밤에 불을 끄면 우리 집은 고요한 어둠 속에 갇힌다.
야트막한 언덕 위에 자리 잡은 이 집은 작은 숲과 밭으로 둘러싸여 있다. 대문 초입에 이웃집 몇 채가 있을 뿐이다. 밤에 2층 테라스에서 바라보면 수평선 멀리 고깃배 등불이, 하늘에 별빛이, 귤밭 너머 아래로 단층 민가들의 불빛이 드문드문 새어 나온다. 도시의 고층 빌딩이 만드는 불야성과는 달리, 집안으로 빛이 들어오지 않으니 빔프로젝터로 영화 보기에 안성맞춤이다.
우리 집 영화관 풍경을 엿보면, 예술 영화에 관심 많은 딸이 영화를 선택하고 스크린에 연결한다. 남편은 전자레인지로 팝콘을 튀겨 오는데, 살짝 짜면서도 고소하다. 나는 소파에 누워서, 딸은 소파에 기대어, 남편은 호박색 라운지체어에 앉아 영화를 감상한다. 고양이들도 테이블이나 카펫에 앉아 스크린을 바라본다. 그런 분위기는 마치 덴마크의 휘겔리한 저녁처럼 소소한 행복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우리만의 프라이빗한 영화관이 있더라도, 오랜만의 영화관 나들이는 또 다른 기쁨을 선사해 줄 것이다. 최신 영화도 바로 볼 수 있으니 기대도 된다. 출장 간 남편을 제외하고 모녀가 오붓하게 영화를 보기로 했다. 작은 영화관은 읍내에 위치해 있다. 영화관으로 가는 길은 편도 2차선 도로가 넓게 뻗어있고, 가로등도 잘 정비되어 있어 편리하다. 토요일이 맞나 싶을 정도로 도로가 텅텅 비어서 운전하기에도 수월했다. 그런데 읍내 초입에 다다르자, 역시나 차가 좀 많아졌다.
늦은 오후에 도착한 작은 영화관은 밝은 회색톤의 단층 건물로 정말 아담했다. 전체 두 관이 운영되고, 총 100여 석 정도라고 한다. 모던 스타일의 의자와 테이블이 놓인 라운지는 넓고 쾌적해서 편안했다. 미리 예매한 표를 키오스크에서 출력하고, 간식과 물을 사들고 딸과 입장했다.
토요일 오후인데도 관객은 많지 않았다. 우리를 포함해 10여 명 남짓이었다. 40여 석 정도의 규모라 가족, 친구, 친지들과 대관해 영화를 함께 즐기기에도 좋을 듯하다. 우리 집보다 좀 더 큰 스크린에서 상영 예고편을 보여 주고 있어, 빨리 내부 사진을 찍었다. 곧 불이 꺼지고, 영화가 시작되었다. 공간이 작아서 그런 걸까? 마치 작은 책방에서 느꼈던 그아늑함처럼, 영화가 가까워지면서 몰입감이 더해졌다.
영화 <룸 넥스트 도어>는 젊은 시절 잡지사에서 근무했던 두 친구가 중년이 되어 재회하며 우정을 나누는 이야기이다. 잉그리드(줄리앤 무어)는 성공한 유명 작가로, 대조적으로 마사(틸다 스윈톤)는 시한부 암 환자로 만난다. 잉그리드는 죽어가는 친구의 어려운 부탁을 들어주며, 마사의 남은 시간을 함께 보낸다. 영화 내내 어두운 '죽음'이 배경으로 깔리지만, 각 장면은 빨강, 초록, 노랑 같은 원색의 생명력을 뿜어내는 앙리 마티스의 유화 같이 화려하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더 언급하긴 어렵지만, 예기치 않은 죽음이 다가왔을 때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죽을지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영화관을 나올 때, 혼잡하지 않으니 다른 사람들이 나가는 걸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이미 밖은 어둑어둑해졌다. 읍내라 그런지 우리 집 근처보다는 빛이 더 휘황찬란하다. 마침 저녁 시간이라, 우리는 근처 맛집에서 식사하기로 했다. 작은 횟집인데, 주로 포장 주문을 받는 곳이라 테이블은 4개밖에 없다. 손님은 우리를 포함해 2팀이었지만, 끊임없이 전화 주문이 들어온다. 인기 비결은 신선한 회에 저렴한 가격이리라. 제주도에 살면서 느낀 거지만, 초밥이나 회는 확실히 육지보다 싸고 신선하다.
딸은 좋아하는 회를 소스에 찍거나 상추쌈에 싸서 야무지게 먹는다. 딸에게 영화가 어땠는지 물어본다.
"진지한 주제를 깊게 파고들려는 것 같았는데, 가볍게 표현된 것 같아요. 그래도 나쁘지 않았어요."
까다로운 영화 취향을 가진 딸에게는 이 정도는 꽤 괜찮은 평가다. 다소 무거운 주제였지만, 우리는 삶과 죽음 그리고 우정과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스페인 감독의 색감을 다루는 기술도. 쓸쓸하게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마사가 반복해서 읊조리는 구절이 아직도 귓가에 맴돈다. 제임스 조이스의 <죽은 사람들>의 마지막 구절이다: “눈이 내린다. 산 자와 죽은 자 위로.” 눈은 산 자든 죽은 자든 누구에게나 똑같이 내린다. '수어지교'처럼 삶과 죽음은 떼려야 뗄 수 없는하나라는 뜻인 걸까? 당연한 말이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길, 가로등 불빛에 의지해 나 홀로 온 도로를 전세 낸 듯이 여유롭게 운전해 간다. '내 옆 방'에서 지내는 딸과 티격태격할 때도 있지만, 이 작은 영화관에서의 모녀 데이트는 해피엔딩으로 끝났다. 영화관에서 오랜만에 즐긴 문화생활은 새로운 행복감을 안겨 주었다.
예전에 해외나 수도권에 살 때는 미술관과 박물관을 수없이 관람할 정도로 문화생활을 즐겼다. 제주 시골로 이사 오기 전, 그런 문화생활은 당연히 기대하지 않았지만, 유명 화가의 전시회에 쉽게 가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때가 있다. 시간이 갈수록 그것도 초연해지지만, 그래도 가끔은 바람을 쐬며 가족과 함께 읍내의 작은 영화관이나 미술관 나들이를 하면 소소한 기쁨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늦은 저녁일 뿐인데 집에 도착하니 이미 주위는 컴컴하고, 집 외벽의 조명만이 어슴푸레 집을 밝혀주고 있다. 고개를 젖혀 위를 보니, 흐린 날씨로 하늘은 깊은 우물처럼 어둡다. 그래도 그 어둠을 뚫고 환한 별빛이 드문드문 쏟아지고 있었다. 마치 받아들여야 하는 죽음 앞에서도, 삶을 끊임없이 이야기해야 한다는 듯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