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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별 Nov 10. 2024

시골 버스 타고 해안 도로를 달리다

제주도 시골 살기 13

오늘은 병원 가는 날이다. 제주시까지 가야 하는데, 어떻게 갈지 좀 고민이 된다.


지난 초여름, 집에서 손목 골절상을 입고 큰 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다. 수술 후 1주일 동안 입원하고, 매일 차로 1시간 거리를 통원 치료하러 다녔다. 다행히 남편이 시간을 낼 수 있어 병원까지 운전해 주었다. 이후 일주일에 한 번, 한 달에 한 번씩 병원에 다니다가, 이젠 두 달 만에 손목 상태를 확인하러 간다. 남편 시간이 안 되면 택시를 타야 하는데, 택시비도 만만치 않다. 주변에 큰 병원이 없는 것이 시골에 사는 불편함 중 하나다. 그러니 건강을 잘 챙겨야 한다.


누군가는 서귀포에 살면서 왜 제주시까지 가느냐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남서쪽에 살다 보니, 서귀포 시내나, 제주 시내나 큰 차이가 없다. 다만, 난생처음 119를 불렀을 때, 새벽에 구급대원이 데려다준 병원이 제주시에 있었기 때문이다. 서귀포시는 도로에 방지턱이 많아 이송 중에 골절 환자들이 무척 힘들어한다고 했다. 그런 면까지 세심하게 배려해 준 구급대원들께 고마웠다. 다행히 수술이 잘 되어 8월부터는 딸 학교까지 운전해 줄 정도로 많이 회복되었다.


원래 소심하고 겁이 많은 나는 13년 동안이나 운전면허증을 장롱에다 두고 썩혔다. 교통이 편리한 도시에서의 뚜벅이 생활도 그다지 불편하지 않았다. 항상 혼자 운전해야 하는 남편한테 미안하기는 했다. 은근히 신경전이 되기도 하는 운전은 자존심이 뚝 떨어져도, 미안함은 미안함으로 그칠 뿐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런데, 자식이 뭔지. 아이 학원 때문에, 발등에 불이 떨어져 겨우 운전대를 잡은 게 불과 4년 전 일이다. 하지만, 아직도 가까운 거리만 자신 있고, 30분 이상이면 내 마음에 브레이크가 린다. 그럼에도 그때 용기 내어 운전한 덕분에 지금 이렇게 멋진 시골에서 생활할 수 있으니, 나 자신에게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내가 운전할 때, 옆에서 흐뭇하게 미소 짓는 남편의 모습에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다. 제주 시내나 공항까지는 아직 가보지 못했지만, 점차 도전해 보려 한다.


밖은 바람이 조금 차지만, 햇빛이 화사하다. 그래서 처음으로 버스를 타고 병원에 가기로 한다. 혹시 몰라 우산도 챙긴다. 정류장까지 조금 걸어야 하지만, 집에서 병원까지 가는 버스가 있어 다행이다. 버스 소요 시간은 1시간 반. 해안선을 따라 서쪽에서 북제주로 가는 노선인데, 제주 전체 해안선의 4분의 1을 거친다. 정류장이 80개가 넘는 긴 노선이지만, 관광하는 기분으로 타면 될 것 같다.



병원 예약 시간에 맞춰 '제주도 버스로' 앱에서 버스 시간을 확인하고 나간다. 아무도 없는 정류장에서 나 홀로 버스를 기다린다. 배차 간격이 15~25분인 게 아쉽다. 더 자주 운행된다면 가까운 거리라도 운동 삼아 자주 이용할 텐데. 이어 맑은 하늘을 꼭 닮은 버스가 도착하자, 기대와 설렘이 교차한다. 서귀포 시내가 기점인데 승객이 많지 않다. 어르신 서너 분과 젊은 사람들 두어 명이 타고 있다. 도로에는 차도 거의 없고 정류장에 승객도 없으니, 버스는 택시처럼 쭉 달린다.


버스에서 바다 쪽 자리에 앉아 차창 밖 풍경을 바라보니, 푸른 바다는 잠잠하다. 오디오북을 들으며 가야지 하다가, 성시경의 <제주도 푸른 밤>으로 노선을 튼다. 제주도에 와서 더 좋아하게 된 노래로, 솔직 담백한 가사가 가슴에 와닿는다. 어찌 보면 제주도에 대한 환상이 짙어, 지역 주민들은 '감귤밭 일구는 게 얼마나 힘든 줄 아냐'며 핀잔을 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에게 이 곡은 현실처럼 들리며 제주도민으로서의 자부심이 강해진다. 1절만 적어 본다.


떠나요 둘이서 모든 훌훌 버리고

제주도 푸른 밤 그 별 아래

이제는 더 이상 얽매이긴 우린 싫어요

신문에 티브이에 월급봉투에


아파트 담벼락보다는

바달 볼 수 있는 창문이 좋아요

낑깡밭 일구고 감귤도 우리 둘이 가꿔봐요

정말로 그대가 외롭다고 느껴진다면

떠나요 제주도 푸른 밤하늘 아래로



정오의 따뜻한 햇살이 차창을 파고든다. 감미로운 성시경의 목소리는 더 달콤해지고, 나는 점점 나른해져 졸음이 쏟아진다. 십수 개의 정류장을 지나치며 깊은 단잠에 빠져든 것 같다. 버스가 위쪽으로 올라가니, 억새 시즌이라 올레길 트래킹하는 분들이 많이 탄다. 내 왼쪽으로는 푸른 해안가가 보이고, 오른쪽으로는 흐드러진 억새 벌판이 펼쳐진다. 한 폭의 가을 수채화를 감상하는 듯한 기분이다. 잠시 내려서 구경하고 싶지만, 병원 예약 시간 때문에 그럴 수 없어 아쉬움이 남는다.


버스는 서쪽의 유명한 해수욕장 두 개를 지나간다. 가을 해변을 산책하러 나온 낭만주의자들이 눈에 띈다. 해안선을 뒤로한 도롯가에는 농가를 개조한 상점들과 오래된 집들이 키를 낮춰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병원 정류장에 내려 병원까지 가는 길에 귤이 주렁주렁 탐스럽게 달렸다. 이런 경치는 내가 제주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더욱 실감 나게 해 준다.



병원에서 엑스레이 결과를 본 의사는 뼈가 잘 붙었으니 하고 싶은 운동을 해도 무리가 없다고 다. 손목 골절로 딸과 함께 다니던 필라테스를 중단했었는데, 다시 할 수 있게 되어 무척 기쁘다. 약국에서 약을 받고 다시 왔던 길로 되돌아간다. 정류장에는 나 말고도, 할머니와 중년 여성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집으로 내려가는 길에 오후의 바다를 보려면 오른쪽으로 앉아야 한다.


버스가 와서 승차하니, 기대했던 자리가 하나도 없다! 올 때와 다르게 차 안은 웅성웅성 말소리로 가득하다. 대화를 자제해 달라는 버스의 음성 안내가 무색할 정도다. 차 안에서 외국어가 많이 들리는 걸 보니, 외국인 관광객도 꽤 탄 모양이다. 그런데 버스에 타신 할머니들 옆에는 두툼한 장바구니가 있다. 바로 전 정류장이 '제주 민속오일장'인데, 오늘이 장날인가 보다. 인터넷으로 확인해 보니, 이곳은 매월 2일과 7일로 끝나는 날에 장이 열리고, 외국인들도 많이 찾는다고 한다. 오늘이 7일이니, 버스에 승객이 가득한 이유를 알겠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정말이다.


어느 정도 가다 보니, 한 정류장에서 승객들이 우르르 내려 드디어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옆자리에 할머니가 앉으시더니 "아이고, 여기서 많이 ~~" 말씀하시는데 사투리와 소음이 섞여 잘 알아듣지 못한다. 아마도 승객들이 많이 내려 놀랍다는 말씀인 것 같아, '아, 네.'하고 웃으며 말끝을 흐린다. 제주 사투리는 뒷부분이 알아듣기 힘든데, 살면서 익숙해지는 날을 손꼽아 기다려 본다. 늦은 오후라 서쪽 하늘은 인심 좋게 햇살을 듬뿍듬뿍 퍼 준다. 바다의 잔잔한 파도는 갯바위를 향해 부딪치며 작은 물거품을 만든다.



버스가 거의 텅텅 빌 때쯤 집 근처 정류장에 도착했다. 날씨는 여전히 좋다. 집까지 걷는데 가을꽃이 핀 들판과 작은 돌담길을 지나간다. 동네의 아름다운 가을 풍경을 눈으로 찍어 마음속에 간직한다. 오랜만에 많이 걷고, 또 버스를 세 시간이나 타서 피곤했지만, 새로운 경험이었고 즐겁게 관광한 기분이다. 두 달 후에 다시 병원에 가야 하는데, 그때는 1월이다. 날씨가 추울 때라 걸어가는 길이 괜찮을지 걱정된다. 하지만, 겨울에 시골 버스로 달리는 해안 도로는 또 어떤 모습일지 기대된다. 그때까지 버스의 배차 간격이 좀 더 줄어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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