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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반 Oct 03. 2023

월간 디깅 #14 - 10월

높은 하늘을 떠돌아다니는 새 처럼

23. 10

서늘하고 건조한 바람.

높은 하늘을 떠돌아다니는 새 처럼.


1. Oressa (HTDC)

HTDC. How to Disappear Completely의 준말이다.

이 문장이 익숙한 이들은 아마도 라디오 헤드의 How to Disappear Completely를 떠올리겠지만 이번 디깅에서는 다르다. "HTDC"는 Doug Richmond가 집필한 1985년 작, "How to Disappear Completely and never be found"에서 따와 지금까지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라이브 섹션 그룹이다.

혹시나 이번 기회로 이 아티스트에게 관심을 가진다면 SNS 방문을 권장한다.

앨범 Mer de Revs II는 2016~2017년 사이 한 달에 한 번씩 작곡하여 제작된 80분가량의 음악이다.

앨범의 첫 트랙부터 마지막까지 시종일관 몽롱한 컨셉을 유지하고 있는데 이는 불면증에 시달리는 이들을 위한 음악이기 때문이다. 수면을 위한 음악의 특징이란 대개 악기가 단순하다는 것인데, 이 앨범의 경우 일반적으로 피아노가 아닌 전자 섹션을 사용하여 풍부하고 다양한 질감을 구현했다. 이토록 풍부한 소리를 지녔음에도 수면과 집중을 방해하지 않는다.

앨범커버는 마치 우주라는 바닷속에서 빛나는 별과 먼지가 엉켜 뒤섞인 모습처럼 보인다.

음악을 들어보면 우주를 끝도 없이 유영하는듯. 들을수록 내가 지금 어디 있는지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착각이 든다. 자신도 모르는 무의식을 그대로 투영한 듯 요동치는 음악은 우주처럼 아득하게 다가온다.






2. Der Klang der Offenbarung des Göttlichen (Kjartan Sveinsson)

13번째 디깅(9월)에서 The white birch를 설명하며 잠깐 Sigur Rós를 언급했었는데 다만 이번에도 Sigur Rós 그룹이 아닌 멤버였던 Kjartan Sveinsson을 조명하고자 한다. Sigur Rós에서 유일하게 음악을 전공한 그는 2013년에 잠시 그룹을 탈퇴하고 솔로의 길을 걷는다. 그리고 1년 뒤, 2014년에 현대 예술가인 Ragnar Kjartansson과 협업하여 극장 오페라 용 음악을 선보이게 된다. 그때 작업한 앨범이 바로 Der Klang der Offenbarung des Göttlichen(신의 계시의 소리)이다.

이 앨범은 오페라의 구조를 지니고 있는데 다만 기존 오페라 구조와 달리 그 연결성이 뚜렷하지 않은 것이 눈여겨볼 점이다. 다만 4개의 막으로 제목이 구분되어 있다.

Teil I을 제외한 나머지 3막은 합창 보컬이 들어가 있다. 4막 중 유일하게 보컬이 없는 Teil I에서는 유독 음울한 분위기를 풍긴다는 점에서 보컬 말고도 다른 차이가 보인다. 현악기의 불협화음이 태풍처럼 휘몰아치고 이후 펼쳐지는 3개의 곡에서는 찬찬히 그 분위기가 반전되며 마치 흐린 먹구름 사이로 내리쬐는 빛을 연상케 한다.이는 세트에서도 동일하게 확인할 수 있는데 번쩍이는 조명과 배경들이 밝은 분위기로 바뀌며 곡의 변화와 동일하게 맞춰간다. 여성의 보컬이 찬란하게 뒤에서 받쳐주며 세트의 분위기와 곡의 고조됨이 마치 제목 그대로 신의 음성이 귓가에 아른거리는 착각이 들게 한다.

이 작품은 적당한 클래식과 모던함이 잘 어울리는 신고전주의 앨범임을 보여줌과 동시에 Kjartan Sveinsson가 솔로로서 얼마나 굳건한지 입증하는 셈이다.







3. 하늘 (어떤날)

가을 하면 떠오르는 건 컨츄리와 포크 장르가 아닐지 싶다.

어떤 날의 데뷔앨범 1960·1965는 분명 익숙한 장르지만 그 궤를 벗어나는 모험적인 앨범이다. 그리고 이런 보석 같은 결과는 한국대중음악상 최고의 명반으로 손꼽히게 되었다. 어떤 날 그룹의 기타리스트인 이병우는 이후 대중영화 OST의 작곡가로서 대단한 활약을 하는 것을 알고 이 앨범을 듣는다면 역시 떡잎부터 남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번에 소개하는 곡, "하늘"은 시작부터 평화로운 시골길이 생각나는 곡이다. 하지만 1:05 부근부터 약간 미묘하게 달라지는 화음에 갸우뚱했다가 이내 1:20에서 완전히 색다른 경험이 펼쳐진다. 장조와 전조를 오가며 롤러코스터를 태워버리고는 다시 잠잠해지는데 방금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안이 벙벙하다. (누군가는 이것이 "허위의 안정감"이라고 표현했는데 정확한 표현이다.) 그러고는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다시 처음의 평화로움으로 데려다준다. 이처럼 "하늘"은 60년대풍에서 느껴지는 약간의 비틀기가 과하지 않고 매력적이다.지금에서야 각 세션에서 뜬금없고 갑작스러운 전개가 놀랍지 않지만 이 곡이 발매됐을 시기는 80년대고 분위기는 60년대를 가져온 것임을 감안한다면 그 당시에는 대단히 실험적으로 들렸을 것이다.


브라운아이드걸스가 2019년에 발매한 리메이크 앨범.

이 앨범에 "오늘"을 리메이크하여 수록했는데 장르가 뚜렷한 원곡의 벽을 뛰어넘은 편곡의 마법사 윤상이 재즈와 레트로 감성을 더하여 새롭게 탄생시켰다.







4. 무중력 (Zion.T)

스케치북 음악감독 강승원의 프로젝트 일환이었던 앨범 Part. 3의 곡 "무중력"

사랑에 빠졌을 때의 기분을 우주의 무중력에 빗대어 표현한 곡이지만 사랑이라는 긍정적인 감정 말고도 씁쓸함도 어딘가 묻어있다. 분명 트럼펫이나 드럼 같은 섹션들이 제대로 들어가 있음에도 곡의 분위기를 과하지 않게 끌어올려 준다. 이런 고양감이 마치 "무중력"과 닮았다.







5. 밀크쉐이크 (박주원)

대한민국에서 기타, 그것도 집시 기타라는 생소한 분야에 대해 대표하는 인물은 박주원 말고 또 있을까.

스패니쉬 기타 연주자답게 6개의 현만으로도 이렇게도 격정의 연주를 이어가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바이올린이 곧바로 뒤를 잇는다. 기타의 떨림을 부드럽게 낚아챈 바이올린 현의 소리가 일렉처럼 듣길 만큼 현란하다. 이처럼 초장부터(初場) 휘몰아치며 달리는 곡은 밀크쉐이크라는 단어와는 살짝 다른 인상을 준다. 하지만 서로가 앞질렀다가 말기를 반복하다가도 끝내 멋진 합주로 마무리를 짓는 모양은 한데 뒤섞인 Shake와 닮아있다.

라이브 버전에서는 바이올린의 빈 자리를 카혼으로 대체했는데 이 버전만의 새로운 분위기가 있다.







6. Renunciation (Asher Fulero)

Asher Fulero는 현대 음악 프로듀서로서 그 역량을 인정받고 있다.

무려 25년이나 활동을 하면서도 끊임없는 변화를 시도하는 그의 창의성에 주목하여 여러 무대에서 헤드라이너로 활동 중이다. 특히 그가 한 활동 중에서 특이한 것은 유튜브 무료 오디오 라이브러리를 위해 방대한 양의 사운드트랙을 제작한 것이다. Renunciation 곡 역시 유튜브 무료 음악 중 일부로서 무료 음악이라고 상상할 수 없는 퀄리티의 피아노곡이다.

장조와 단조의 극적인 변화 속 울림은 말 그대로 Renunciation, 시련에서의 단념을 보여주는 것 같다.







7. Automatic (Red Velvet)

레드벨벳의 벨벳 음악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곡, Automatic.

4인조로 데뷔했던 레드벨벳이 5인조 그룹이 된 후 발표한 곡으로, 바로 이전에 Be natural의 뒤를 이어 올드스쿨, R&B 바이브가 돋보이는 곡이다. 그루비한 드럼 비트와 Urban 장르에서 돋보이는 세련됨이 고급스러운 레드벨벳의 분위기와 잘 어우러진다. R&B 장르를 데뷔한 지 얼마 안 된 아이돌이 불렀다고는 좀처럼 상상하기 어렵다. 그렇기에 불필요한 디렉팅 없이 앳된 목소리를 활용해 나른하게 살린 것은 현명한 방법이다.

현재는 Red와 Velvet을 분리하지 않고 섞은 채 앨범을 출시하기로 한 지 오래됐으나, 초반에 볼 수 있었던 명확한 곡의 방향이 그리울 때가 있다. Be natural에선 다소 어색하고 아쉬운 점이 있었는데 불과 1년 채 지나지 않아서 이렇게 성숙한 느낌을 낼 줄 안다는 것은 레드벨벳이 가진 강점일 것이다.







8. 명왕성 (참솜)

지금은 참솜이지만 이 곡이 발표될 때만 해도 "참깨와 솜사탕"이었다.

인디밴드의 곡들은 꾸며내지 않은 공허함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하는 편인데, 명왕성 역시 마찬가지다.

2017년 가을부터 2018년 겨울에 끝낸 앨범이라 그런가, 트랙 곳곳에는 찬바람이 조금씩 묻어있다.

특히 명왕성은 과장되게 인생의 모난 부분을 강조하거나 꾸며내지 않고도 쓸쓸함이 스며든 곡에서 가을의 찬바람이 배로 느껴진다.이렇듯  참솜의 음악적 특징이라 함은 참솜의 음악들이 밝은 연주+슬픈 가사의 조합이다.

인생에도 양면의 모습이 존재하듯 밴드의 음악 스타일에서도 이러한 모호한 양면성이 있기에 음악에 쉽게 빠져들 수 있다. 정규앨범 2집의 첫 트랙인 명왕성에서는 이러한 참솜만의 방향이 명확해졌다는 감상이 든다.

원곡은 여성 보컬이지만 데모에서는 남성보컬.

원곡보다 이 버전이 더 가라앉고 차분한 감상이 든다.







9. 세월이 가면 (박인희)

박인희의 음색은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애절함이 특징이다.

하지만 이 애절함을 극도로 절제한 감수성 덕에 부담스럽지 않게 들린다.

1956년에 발매된 원곡과 비교하면 오히려 박인희 버전이 더 공허한 것을 알 수 있다.

시작하자마자 들리는 내레이션과 리버브를 넣은 첫음절, 단조로운 기타는 가을을 닮아있다.







10. Last Flowers (Radiohead)

일본 영화 "고백"의 OST로 사용된 곡.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가 생각나는 첫 시작은 라디오헤드 앨범이 으레 그렇듯 이후 담담하게 이어간다.

톰 요크의 매가리 없는 창법은 하이라이트에서 끊길 듯 말듯 조마조마하다.

이 곡의 원제는 영국 옥스퍼드 Radcliffe 병원으로 가는 길에 있는 표지판에서 따 왔다고 한다.

실제 표지판이 병원 근처라는 점과 노랫말 중[If you take me there you'll get relief]이라는 의미에서 Last Flowers의 진정한 뜻은 마지막 잎새처럼 들린다.

나지막한 외침이 울려퍼지는 매마른 대지같은 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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