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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ril Sep 29. 2023

아이를 기르는 마을.

아이의 안전에 대한 공공기관의 태도

늦은 오후 넘어가는 햇살이 주방에 있는 내 앞치마 밑단까지 파고든다. 가을인가 본데 엄마의 일상은 춘하추동 관계없이 이 끼니에서 저 끼니로, 저 끼니에서 또 그다음 끼니로만 옮겨간다. 라인강을 코 앞에 둔 동네는 가을아침이 되면 대단한 안개가 찾아온다. '안개가 낀다'라고 표현하기보다는 집과 사람이 안개 사이에 끼어있는 형상이다. 부랴부랴 아이의 형광 안전조끼를 꺼내 입혀 등교시켰다. 입학 전 학부모의 날 학교에서 나눠준 조끼이다. 

 

강 건너 마을이 보이는 날은 그래도 안개가 심하지 않은 날. 가끔은 거짓말 조금 보태 내 발 끝만 보이는 날도 있다. 그런 날은 묵묵히 흐르는 강도 두렵다. 


스위스는 짙은 안개가 자주 발생해 어린이들은 물론이고 성인들도 안전조끼나 안전재킷을 자주 입는다. 난 처음 시댁에서 그 조끼를 보고 시아버지가 투잡으로 공사현장에서도 일하시는 줄 알았다. 알고 보니 자전거를 타고 도로를 주행할 때는 꼭 이 안전조끼나 재킷을 입어야 하는 거였는데 스위스의 짙은 안개를 경험하고 나서는 고개가 끄덕끄덕. 이 외에도 모든 운전자는 자동차 트렁크에 의무적으로 이 안전조끼를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사고가 발생 시 운전자가 차량 외부에 머무를 경우에는 이 조끼를 착용해야 한다. 2차 교통사고를 예방하기 위함이다.


유치원생이 항시 착용해야 하는 주황빛 안전띠. 숲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들의 등원 복장은 등산화에 등산바지가 기본이다. 죽어도 치마를 입어야 하는 딸아이는 등산복 위에 치마를 입었다.


학교에서 나눠준 형광 조끼. 이런 게 또 예쁘게 만들기 참 어려운데 그 어려운걸 또 해낸다. 스위스 공공 디자인 인정! 세금 왕창 뜯어가는 것도 울면서 인정!


초등학생은 가을과 겨울에 형광조끼를 입지만 유치원생은 사시사철 반사 안전띠를 두르고 등하원을 해야 한다. 학기 초 경찰관이 유치원을 방문해 이뤄지는 교통안전교육에서 'warte, luege, lose, laufe('기다려, 살펴봐, 귀 기울여 들어, 건너'의 스위스말)'스티커를 안전띠에 붙여준다. 아이들은 학교 앞 횡단보도에서 경찰관과 함께 이 4가지 동작을 순서대로 행한 후 횡단보도를 건너는 연습도 한다. 사실 아이가 횡단보도에 서 있는데 무시하고 지나가는 차량도 거의 없지만 안전덕후인 이 나라 사람들은 어쨌든 안전교육에 철저하다. 


경찰관 아저씨와 함께 외워본다. "warte 바테, luege 루에게, lose 로제, laufe 라우페."



그리고 길을 건너봅니다. 아침 출근으로 바쁠 봉고차가 그 시간 동안 꼼짝없이 기다리고 있다.


스위스에 살아보니 보행자가 왕이다. 보행자가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에 서 있는데 정차하지 않는 차량에게는 벌금이 부과되는데 스위스에서 운전을 시작한 초반에 나는 이 부분이 익숙하지 않아서 보행자를 보고도 그냥 지나치기 일쑤였다. 다행히 딱지를 끊은 적은 없지만 그 황당해하는 눈동자들은 아직도 기억이 난다. 애연가인 아빠는 이곳 담배가격에 혀를 내두르시면서도 여전히 담배를 피우셨는데 방문 첫날 담배를 피우고 들어오시더니 왜 차들이 자꾸 자기 앞에서 서는지 모르겠다 그러셨다. 혹시 횡단보도 앞에서 피우셨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하셨다. (그 당시 살던 집 바로 앞이 횡단보도였다.) 정차하고 기다려도 횡단보도는 건너지 않고 멀뚱멀뚱 담배만 피워대는 동양 할아버지에게 운전자들이 욕을 퍼붓지는들 않았는지 모르겠다.

 

이 안전띠와 더불어 헬멧착용이나 카시트 사용 등 어린이의 안전과 관련된 부분에 대해 이 사회는 아주 민감하다. 지난해 강물이 많이 줄어 평소에는 물에 잠겨 들어갈 수 없는 장소까지 산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집에서 강 진입로까지 자전거를 타고 온 아이가 진입로에 자전거를 세워두고 우리와 산책을 갔는데, 돌아오는 길에 한 아저씨가 혹시 어린이용 자전거를 앞에 세워두었는지 물었다. 어린아이가 타는 작은 자전거 한 대만 덩그러니 강 진입로에 세워져 있는 걸 본 아저씨가 주변에서 아무도 찾지 못하면 경찰에 신고를 할 모양이었던 것 같다. (여기는 보통 가족이 모두 함께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 남편도 가족 자전거여행의 꿈을 꾸며 작년 내 자전거를 구매했다. 자전거를 못 배우는 인간이 있을 거라는 의심은 전혀 하지 못한 채. 몇 번 연습을 해 봤지만 대부분의 지구인이 이 두 바퀴만 달린 물건에 어떻게 몸을 의지하는 건지 의구심만 더 커질 뿐 자전거가 멀리 나가지는 못했다. 내 자전거는 지하실에서 거미줄을 뒤집어쓰고 쉬고 있다.) 대충 널브러진 아이의 자전거 하나로 이런저런 추리를 하시고 혹시 모를 사고를 예상하며 적극적으로 아이를 찾아 나서셨던 아저씨 감사합니다.


라인강이 말라 드러난 강바닥을 따라 집에서 꽤 멀리까지 걸어왔다.


산에서 내려오는 물줄기가 강바닥을 가로질러 작은 개울을 만들었다.

 

작년 봄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어느 늦은 오후, 유치원에서 학교장 직인이 찍힌 단체 이메일 하나가 도착했다. (유치원도 정규교육에 포함되어 학교장의 관할 아래 있다.) 오늘 하교시간에 낯선 중년 남자가 두 명의 여학생에게 다가와 어딘가로 함께 가자고 한 모양이다. 그 학생들은 그 길로 다시 학교로 돌아가 선생님께 상황을 보고했고 경찰은 대대적으로 동네를 수색했다. 그 남자를 찾지는 못했고, 당장 다음날 아침 등교 시 혼자 등교하는 학생이 없기를 당부한다는 이메일이었다. 따져보니 불과 서너 시간 전에 일어난 일이었음에도 그 사이, 학교가 경찰에 신고해 경찰은 수색을 시작하고, 그 경과를 학교장에게 보고하고, 학교장은 전교생의 가정에 당부의 이메일을 보낸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 대비한 학교와 경찰서 간의 매뉴얼이 준비되어 있었기에 가능한 속도였다. 친구 서너 명과 등하교를 같이 하는 아이 뒤를 나도 한 이삼일 숨어서 지켜보았다. 그리고 정확히 한 달 뒤 학교장에게서 다시 이메일이 왔다. '지난 한 달간 경찰이 동네를 정찰했으나 더 이상의 수상한 사람은 발견되지 않았고 오늘로 이 일은 마무리하겠다.'는 내용의 이메일이었다. 정작 아이의 부모인 난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이미 잊은 일을 학교와 경찰서는 삼십일 가까이 예의 주시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학부모의 날 강당에 선 교장선생님의 첫 부탁은 아이가 혼자 걸어서 학교에 올 수 있도록 가정에서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아이의 자립심과 성취감을 가장 우선의 목표로 하고 있다는 학교 측의 이런 부탁은 학교 스스로 아이들의 안전을 책임지겠다는 각오와 만반의 준비 위에 세워진 목표였다. 나는 학교와 공공기관에 믿음이 갔다. 


얼마 전 딸아이의 유치원 친구가 몇 시간째 보이지 않아 학부모들이 동네를 다 뒤지고 다닌 적이 있었다. 경찰은 엄마의 연락을 받자마자 비상 연락망으로 모든 관공서에 연락을 취하고 즉시 드론을 띄워 엄마와 함께 아이를 찾는다. 동네에 강이 있고 그 뒤로는 독일까지 산이 이어져 있어 경찰은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가능한 모든 조치를 취하는데 모두 매뉴얼에 기반해 이루어진다. (그 녀석은 전화기가 고장 난 엄마 친구의 집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고 한다. 평소에 집에 말을 하고 오던 아이라 그 엄마 친구도 대수롭지 않게 자게 두었다는...) 스위스의 각종 매뉴얼은 뭐 그런 거까지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치밀하다. 우리 동네를 예로 들면 전쟁 시 어느 집이 어느 집 지하실로 대피해야 하는지, 정전이 장기화될 경우 대소변은 어디에 버려야 하는지, 빵 배급은 언제 어느 빵집에서 이루어지는지까지 모두 매뉴얼화되어 있다. 세금이 비싼 데는 다 이유가 있다고 스스로를 토닥여 본다.

 

아이를 교육하기 좋은 도시로 선정된, 이백여명 남짓한 아이들이 자라는 이 작은 동네에 2년 넘게 살아보니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 필요하다는 그 하나의 마을에 꽤 적합한 동네로 보인다. 작은 동네에서 자란 아이는 한국에서 신호등과 아파트를 신기해했고, 엘리베이터에서 서로 인사하지 않는 사람들을 신기해했다. 촌년이었다. 난 아이가 어린 시절만큼은 이 촌에서 안전하게 자라기를 바란다. 내 어린 시절처럼 학원 대신 친구들의 집으로 우르르 몰려다니며 엄마들이 해 주는 간식을 맛이 있네 없네 낄낄거리며 나눠먹고 산으로 들로 천둥벌거숭이처럼 겁 없이 다니며 한껏 촌스러워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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