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금 Jul 21. 2024

죽어도 여한이 없다, 방탕한 삶

나의 작은 검은 강아지 ep6. -  죽어도 여한이 없다, 방탕한 삶

이번 글도 늦었다. 한참을 글을 쓰고 싶지 않았다. 또다시 다 없애 버리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 누굴 위해 글을 쓰는가, 무엇을 위해 글을 쓰는가. 


병원에 다녀온 것은 7월 14일, 증량한 약이 나와 맞지 않아 2주 동안 한 가지 약을 먹지 않았다. 그 한 가지 약은 항우울제. 그렇게 안 먹어보니 알겠더라, 약의 효과가 나타나고 있었다는 걸. 약을 증량한 이유가 효과가 없다는 느낌 때문이었는데 알고 봤더니 효과가 있었다. 너무 익숙해서 몰랐던 것 같다.

 

단약 증상은 생각과 감정이 생겨나고 공허함이 사라졌다. 그리고 열정 또는 의지가 사라졌다. 뭐랄까, 항우울제의 효능은 삶의 의욕은 생기게 해 주는데 생각과 감정이 없어지게 하는 것이라고 할까.


그렇다면, 어떤 생각이 많아졌냐? 고 물은다면 잘 모르겠으나, 사회에 부응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사회의 기준'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인가? 그 기준은 스스로 만든 것인데, 너무 빡빡하게 잡은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또한 계속 의사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더나 불안한 요인은 빨리 털어내려고 하는 것이고 불안을 견디질 못한다고 하셨다. 왜 '빨리 불안을 터는 사람'이 되었는지는 스스로 생각이 필요하다고 했다. 아마 전에 에피소드에서 얘기한 바와 다 연관성이 있지 않나 싶다. 


스스로 생각을 하니 왜인지 우울해지며 눈물이 났다. 중고등학생을 넘어서 대학생 때까지 너무 스스로를 억압해왔다. 어떠한 기준 속에 나를 끼워 맞췄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게 최선이었다. 누구나 말하는 성공한 사람의 기준이었다. 결론적으론 남이 봤을 땐 성공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만, 스스로에겐 성공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게 빡빡하게 살던 중 회사원이 되었다. 회사원에서 나온 결과물은 내 것이 아니었다. 나에게 남는 것이 아닌 회사에 남는 것이 되었다. 물론 진급을 할 수 있고 입지가 넓어지는 건 맞지만 그건 내 알 바가 아니었다. 나의 마지막 이정표는 회사원이었고 마침내 되는 순간 이성의 끈을 놓아버렸다. '죽어도 여한이 없다'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것이었다. 나는 내일 죽어도 상관없었고 마땅하다는 생각을 했을 정도이니 하루하루 아무 억압 없이 지냈는지 알 수 있다. 첫 직장 동료 중 한 명은 막 들어온 대학생 같다고 했을 정도이다. (그렇다고 일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아마 이 시기에 처음 약을 먹게 되면서 불안이 사라지는 경험을 했고, 경제적 여유가 생기면서 원하는 걸 살 수 있으면서 바로바로 욕구를 충전했을 터. 이때 습관이 잘못 들여진 게 아닌가 싶다.


앞으로 어떤 연습을 하게 되어야 할지는 더 고민을 해봐야겠다. 입으로 글로 이야기하니 더욱 문제가 선명하게 보인다. 하지만 걱정이 든다, 나를 위해 스스로 노력할 수 있을까? '나를 위한 것'은 무엇일까. 나를 사랑하는 마음? 전에 의사 선생님을 그러셨다. 그저 스스로 편해지는 방향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면서 변할 수 있을까. 나를 위해. 더 편안해지는 나를 위해.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 과소비와 폭식, 우울증과 상관관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