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유기체로서의 법

죽은 언어의 '규칙'은 법이 아니다

by 날개

우리나라의 수많은 법률(올해 8월 기준 법률만 해도 1,863건에 달함)은 무엇을 해야 할지, 하지 말아야 할지를 단순히 나열한 '규칙'(rules) 모음집인가? 사업자의 독과점, 카르텔, 불공정거래 행위 등을 금지하고 이를 위반하면 형벌이 부과되는 '공정거래법'은 '경제분야의 형법' 중의 하나로 볼 수 있는데, 그 법률조항을 들여다보면 알겠지만, 사업자가 하지 말아야 할 행위들을 매우 많이(!) 나열해 놓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법조문은 추상적인 언어로 표시되기 때문에, 현실에서 벌어지는 어떤 사안이 '규칙'에 위반되는지 여부를 판단해 내는 작업은 난항을 겪을 때가 많다.


20세기 영국의 법철학자인 H. L. A. Hart(1907-92)는 법을 제대로 해석하고 이해하려면, 법이 제정되고 발전하는 개념적인 맥락(context)을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한다. 즉, 법은 언어(language)로 표현되어 있기 때문에 그 단어의 뜻이 명확하더라도 사안에 적용될 경우에는 불확실한 경우가 많고, 그로 인해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열린 구조'(open texture)를 갖는다고 말한다. 이에 따라, 법에는 '반그림자'{penumbra; 빛을 완전히 차단하는 본그림자(umbra)와 달리, 빛이 부분적으로만 가려지는 희미한 그림자 영역}와 같은 모호한 '회색지대'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Hart는 '언어철학'의 기법을 법연구 분석에 적용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이하에서는 법이론의 고전 중 하나로 꼽히는 1961년 출간된 그의 저서 '법의 개념'(The Concept of Law)를 Raymond Wacks 교수의 해제(解題)를 통하여 살펴본다.


Hart는 먼저 다음과 같은 본질적인 인간의 약점 때문에 각 개인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규칙'(rules)을 제정하는 것이 필요하다며, 법은 공동체의 실제 '사회적 관행'이 묘사되어야 이해할 수 있는 '사회적 현상'으로 간주한다.

‘인간의 취약성’: 우리 모두는 신체적 공격에 취약하다.
‘근사적 평등’: 가장 강한 자조차도 때로는 잠을 자야 한다.
‘제한된 이타심’: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기적이다.
‘제한된 자원’: 우리는 의식주가 필요하며 이들은 한정되어 있다.
'이해력과 의지력의 한계': 우리는 동료와 협력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없다.

Hart는 법을 규칙의 '시스템'(system)으로 분석한다. 모든 사회에는 도덕, 게임 등과 관련된 규칙뿐만 아니라 의무나 책임을 부과하는 의무 규칙을 포함한 '사회적 규칙'이 존재한다. 그는 의무나 책임을 부과하는 규칙을 '도덕'과 '법'으로 나눈 후, 법을 1차 규칙(primary rules)과 2차 규칙(secondary rules)으로 다시 나누어 설명한다. 1차 규칙은 사회 구성원에게 직접 '의무'를 부과하는 규칙으로서, 인간이 유혹을 받지만 사회적 공존을 위해 일반적으로 억제해야 하는 행위(예컨대, 폭력, 절도, 사기 행위 등)를 금지하는 것이다. 그는 원시 사회의 규칙은 일반적으로 이러한 금지의무를 부과하는 1차 규칙으로 충분할 수 있지만, 사회가 복잡해지면 1차 규칙만으로는 법체계가 불안정하므로, 이를 보완하여 통일성과 유연성을 가지도록 하기 위해 부차적인 2차 규칙이 필요하게 된다고 말한다. 그는 2차 규칙을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는데, 기본 규칙을 변경하는 규칙('rules of change', 법의 제개정 프로세스), 규칙 위반 여부를 심판하는 규칙('rules of adjudication', 재판에 관한 규칙), 어떤 규칙이 실제로 '의무'인지 식별하는 규칙('rules of recognition') 등이다. 그는 법적 체계의 존재를 위하여는 1차 규칙이 모든 사회구성원들에 의해 일반적으로 준수되고, 공직자들은 2차 규칙들을 수용하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Hart가 가장 강조하는 이 이론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은, 2차 규칙의 '인정 규칙'이다. 이 규칙은 법체제의 근본적인 헌법 규칙으로서 특정 규칙이 '진정한' 규칙인지 여부를 확인하는 유효성의 조건이나 기준을 명시하는 기준이 된다. 한편, 그는 규칙을 명령으로 보지 않고, 규칙의 사회적 차원, 즉 사회 구성원들이 해당 규칙을 인식하는 방식과 그에 대한 태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이러한 ‘내부적’ 측면이 규칙과 단순한 습관을 구분 짓는 기준이라고 강조한다.


나아가, Hart는 규칙의 본질을 파악하려면 수범자 관점과 재판관들의 관점에서 모두 검토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법적 시스템은 일반 시민들의 규칙에 대한 복종과 공직자들의 수용, 두 요소를 중요한 공통 기준으로 보는 양면성(janus)을 가진 존재"라며, 그것이 정당하다는 '인정'이 전제되어야 수범자에 대한 규칙 준수요구가 가능하고, 그래야 비로소 법이 '~해야 한다'는 의무로서 옮고 그름의 규범적 특징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한다. Hart는 법률 시스템이 이러한 과정의 승인을 받지 못하면 도덕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불안정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결국, '법'이란 것은 추상적 '언어'로 작성된 본질 때문에, 그 의미가 불확실하고 당사의 입장과 주관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해석에 있어서는 그 맥락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고, 사회구성원들이 법을 지켜야 할 규칙으로 인식하고 납득하여야만 '습관'이 아닌 '규칙'으로서의 진정한 법으로 우뚝 설 수 있다. 공정거래법은 추상적인 '금지행위'를 열거한 1차 규칙 위에, 공정거래위원회의 심결, 법원의 판결 등을 통한 2차 규칙이 결합하여 정상 작동한다. 공정거래법도 역시 Hart의 통찰대로 폐쇄적인 명령이 아니고, 해석을 통해 살아 움직이는 규범체계로 이해할 수 있다. 이 법은 20세기에 제정된 40년이 넘은 중년의 법이지만, 21세기의 새로운 시장에서 매번 새롭게 쓰이고 있다. 온라인 플랫폼 규제와 같은 새로운 디지털 시장의 생소한 행위가 기존 규칙에서 금지되는 행위로 규율될 것인지 여부는 결국 해석과 정책 판단의 문제로 남게 된다. 즉, Hart를 통해 법률은 죽은 규칙이 아니고 해석을 통해 살아 움직이는 '유기체'(organism)인 것으로 이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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