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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저만치

by 박정옥

만개한 벚꽃 위에 춘설이 내려앉기에 봄은 이리도 힘겹게 우리 곁에 오는구나 생각했다.

어느새 매화도 벚꽃도 목련도 난분분 떨어지고 언 땅 뚫고 나온 봄까치꽃 제비꽃도 시들해지고, 느티나무 새순과 은행잎이 짙은 색을 내고 작약과 모란이 야물게 봉오리를 맺었다. 곧 개망초가 흐드러지게 피어 흔들거릴 것이다.

봄이 가고 있다.

찻장 깊숙이 넣어둔 찻잔들이 생각났다. 보내는 봄을 위한 건배를 해야겠다.

예쁘다고 사고 유행이라고 사고 귀하다고 선물 받고 아끼고 아끼던 것들이다. 그런데도 언제 샀지? 할 만큼 기억의 저편에 있는 것도 있다. 찻물 한 번 커피 한 방울 담아보지 않았던 잔도 여럿 있다.

내가 가고 나면 사랑스럽고 어여쁜 이것들은 어떤 운명을 맞을까. 아마도 버려지겠지 하는 생각이 든다. 순전히 가는 봄이 아쉬워서, 4월의 마지막 주라서 드는 우울함인지도 모르겠다.

봄꽃이 피어나고 나비가 사뿐 거리는 다기세트를 꺼냈다. 뜨거운 물로 헹굼하고 여행지에서 갖고 온 초록잎 두어 꼬집을 넣고 물을 부었다. 잠시 뚜껑을 닫아두고 기다렸다. 잘 우러나길 바라면서.

파르스름 하니 번저나온 찻물에서 은은한 향기가 피어난다. 창밖을 보니 느티나무 푸른 잎새가 바람을 탄다.

눈으로 느티나무 푸른 잎을 맞고 몸으로 바람을 맞이해서 친구 한다.

좋은 벗도 집에서 함께 차를 마시기는 어려운 시대다. 이런 날 마주 보고 차 한잔 함께할 수 있는 벗이 그립다. 하지만 혼자라도 괜찮다. 찻장 속에서 잠자고 있는 잔 들을 때때로 불러내어 함께 해야겠다.

아끼지 말고 즐겨야겠다. 계절도 인생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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