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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마가룸의 저주

by 화진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프리틸라가 생긋 웃었다.


“불새의 눈은 짓궂다고 해야 할지, 계산적이라고 해야 할지, 아무튼 호의를 베푸는 동시에 시험을 내리지. 초원을 거의 다 건너왔을 무렵에 그때까지 눈에 띄었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값진 보물 더미가 나그네의 눈앞에 나타나도록 만드니까.”


라무스가 지금 프리틸라의 앞에 있다는 건 불새의 눈이 내린 시험을 무사히 통과했다는 뜻이었다. 그 사실이 프리틸라를 웃음 짓게 했다. 어린 나이에 부모와 떨어졌는데도 제대로 잘 자라 주었구나 싶어서.


“마음만 먹으면 그 보물 더미를 한 발로 디디면서 재빨리 한 움큼쯤 챙겨 건너편 땅으로 도약해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지요. 하지만 그 위험천만한 초원을 건널 때는 한 가지만 생각해야죠. 한눈팔지 않고 끝까지 건너가는 것, 그 한 가지만.”


그 더미는 환시였다. 말하자면 초원을 건너오는 동안 그냥 지나쳐야 했던 보석이나 금 알갱이에 대한 미련과 탐욕이 반영된 허상인 것이다. 거기에 혹하여 발을 내딛는 순간 당연히 검은 늪 속으로 깨끗이 삼켜진다.


따라서 불새의 눈에 생명력을 공급하는 것은 처음부터 보물을 탐하여 발을 들인 자들만이 아니었다. 초원의 선택을 받은 자들 중에도 마지막 시험을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늪의 먹이가 되고 마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 숲에서도 여기까지 어려움 없이 왔니? 네가 네 발로 걸어서 여기 와 본 건 여섯 살 생일 즈음해서 딱 한 번뿐이었는데.”


“나무들이 절 알아보고 길을 가르쳐준다는 느낌이 들만큼 순조로웠어요.”


태고의 버드나무숲은 라무스를 친근하고 포근하게 받아주었다. 라무스 역시 지금까지 가 본 그 어떤 곳보다 이 숲이 익숙하고 편안하게 여겨졌다.


“그렇다는 건 네 손등을 통해 주입된 약의 효과가 이제는 거의 사라진 모양이다. 토드 경이 너를 검으로 벨 수밖에 없었던 건 약을 주입하는 동시에 나중에 네가 누구인지 증명해줄 표식을 남기기 위해서였다. 그 약은 피 흐르는 상처를 통해서만 효능을 발휘하는 것이거든.”


“평범한 약이 아닌 거군요. 주술 같은 건가요?”


“맞아. 네가 가진 능력을 봉인하는 약이었어. 네가 태어난 지 백일 되던 날 여기 이 자리에서 저 옹달샘의 물로 목욕을 했다고 내가 말해준 적이 있었는데. 기억하니?”


“물론이에요.”


라무스는 어머니가 들려준 이야기를 대부분 다 기억했다. 고된 훈련으로 몸이 너무 고단하고 아파서 잠조차 들지 못하는 밤들을 라무스는 어머니와의 기억을 곱새기고 또 곱새기면서 견뎌 냈던 것이다.


“그때 너에게 플라토르라는 이름을 준 노파에게서 받은 약이란다. 혹시라도 필요한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 받아 두라고 하더구나. 반신반의하면서도 받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때만 해도 프리틸라는 라무스에게 특별한 능력 같은 게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노파가 풍기는 위엄과 권위에 압도되었다. 노파는 언뜻 볼품없이 고비늙은 노인에 불과해 보였지만 언행은 진중했다. 또 힘주어 말할 때면 두 눈과 얼굴이 형형하고 청아하게 빛났다.


반드시 피 흘리는 상처를 통해서 몸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약이라고 하니 꺼려지는 마음도 있었으나 프리틸라는 결국 거절하지 못했다. 능력을 억제하는 약이 아이를 보호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다고 노파가 부연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능력이니 봉인이니 하는 얘기는 좀 황당하게 들려요. 전 제가 그냥 보통의 아이였다고 기억하는데요.”


“내가 너였어도 그랬을 거다. 우리가 네 능력이라고 믿는 것이 사실은 우연일 수도 있겠지. 내 이야기를 끝까지 다 듣고 나서 다시 생각해 보렴. 우선 피리 얘기를 해보자. 토드 경을 만났으니 라크리모의 피리 얘기도 들었겠지?”


“들었어요. 라크리모의 주장은 말도 안 된다고 하던데요.”


“말도 안 되지. 애초에 재생과 번영의 피리라는 건 존재하지도 않으니까.”


“존재하지도 않는 거라고요? 그런데 라크리모 왕가는 어째서 그런 피리가 있다고 우기면서 어머니를 모함했나요?”


“그들은 피리가 있다고 믿으니까.”


옹달샘에서 문득 퐁, 퐁, 물이 솟아나는 희미한 소리가 났다. 프리틸라는 잠시 해야 할 말을 정리하며 맑은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바람이 없는데도 아름드리 버드나무의 가지는 가끔씩 소리 없이 한들한들 춤추고 옹달샘마저 전에 없이 경쾌하게 노래 부르고 있었다. 마치 라무스의 귀향을 기뻐하고 축하하는 것처럼.


하긴, 라무스는 이 숲이 오래도록 기다려온 아이니까. 플라토르라는 이름도 따지고 보면 노파의 입을 빌려 이 숲이 준 거니까. 프리틸라는 나무의 춤과 샘의 노래를 이해했다. 라무스는 자신의 아이인 동시에 이 숲의 아이인 것이라고.


“그들이 피리가 있다고 믿는 이유가 바로 너란다. 이곳에서 태어난 네가 시데레온으로 돌아가던 해 겨울에 눈 속에서 헬레보루스가 만발했지.”


“알아요. 엘리너에게서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으니까요.”


엘리너라는 이름을 말하면서 라무스의 얼굴에 그리워하는 빛이 떠올랐다. 그 빛은 곧바로 프리틸라의 얼굴로도 번졌다.


“그리고 그 겨울 이후부터 시데레온은 변했다. 변덕스럽고 심술궂게 농사를 망치던 봄의 가뭄도, 여름의 긴긴 폭우도, 가을 강풍도 잠잠해졌어. 날씨가 가져오는 재해가 없으니 농작물이 잘 자라고 집을 잃고 떠도는 백성들도 없어졌지. 그 다음 해에도, 그 다음 해에도. 네가 시데레온을 떠나기 전에는 계속 그렇게 좋은 시절이 이어졌단다.”


라파키타스 족 마가룸의 저주. 시데레온의 날씨 재해는 그 저주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라파키타스는 아주 오랜 옛날 티토니아의 북서 해안을 침략했던 약탈자들이다. 당시만 해도 티토니아 대륙에서 사람이 거주하는 곳은 오직 시데레온 뿐이었다.


“네가 마가룸의 저주를 풀었던 거야. 이제는 나도 그렇게 믿고 있다. 한편 라크리모 쪽에서는 마가룸의 저주가 풀린 것을 재생과 번영의 피리가 있다는 증거로 받아들인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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