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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태고의 버드나무숲

by 화진


둥글고 환한 달이 떠 있었지만 태고의 버드나무숲 속은 빽빽한 나무들의 그림자로 어둑했다. 가늘고 희미한 빛살이 새어들긴 했지만 그 때문에 나무들의 형상은 더욱 기괴하게 보였다. 느릿하게 피어오르는 희푸른 안개는 마치 잠들지 못하고 떠도는 유령의 머리채 같았다.


프리틸라는 가지를 늘어뜨린 아름드리나무들 사이로 거침없이 발을 들여 놓았다. 돌과 마른풀과 낙엽과 쓰러진 채 말라가는 나무 등걸 같은 것들로 발밑이 험했지만 그녀의 걸음은 유연하고 민첩했다.


“제기랄!”


프리틸라를 따라가던 감시병이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돌부리를 차고 나뭇가지에 얼굴을 얻어맞고 소스라쳤다. 그는 버드나무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적대감에 몸을 떨었다. 숲으로 한 발짝 한 발짝 들어갈 때마다 불온한 두려움이 짙어졌다.


“숲 어귀에서 기다립지요.”


감시병이 숲의 어둠 속으로 매끄럽게 멀어지는 프리틸라의 등 뒤에 대고 외쳤다.


그녀가 느닷없이 이 야밤에 버드나무숲에 기도를 하러 간다는 건 확실히 수상쩍었다. 하지만 이 숲은 감시병이 각오했던 것 이상으로 으스스했다. 괜히 따라 들어갔다가는 영영 되돌아 나오지 못할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차가운 소름과 함께 엄습했다.


“좋을 대로 해라. 늦어도 달이 기울기 전까지는 돌아올 것이니.”


이미 실루엣마저 보이지 않는 프리틸라의 냉소 섞인 대답만이 메아리처럼 들려왔다. 후다닥 숲을 빠져나가면서 감시병은 나직이 욕설을 뱉었다. 하필 자신이 오늘 밤의 감시 당번인 것이 찜찜하고 불만스러웠다.


감시병을 떼어 버린 프리틸라는 한참을 반쯤 뛰다시피 하여 숲의 중심부로 갔다.


아홉 아름이나 되는 거대한 버드나무가 서 있는 작은 공터에 은색은 달빛이 고여 있었다. 그 버드나무 곁에서 옹달샘은 거울처럼 빛났다. 그리고 나무에 기대선 젊은이. 공터로 뛰어들어 우뚝 멈춘 프리틸라를 그가 조용히 바라보았다.


“라무스?”


잠시 바라보고만 있던 프리틸라가 이윽고 아들의 이름을 불렀다.


“어머니?”


라무스가 버드나무 그늘에서 나와 프리틸라에게 다가갔다.


프리틸라는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젊은이의 얼굴에서 낯익은 특징들을 알아볼 수 있었다. 헤어질 때 아직 말랑한 꼬맹이였던 아들은 강인한 청년이 되었지만 시원스럽게 긴 눈매와 끝이 살짝 올라간 단정한 입매에는 어린 시절의 사랑스러움이 엷게 남았다.


“맞구나. 내 아들이 맞아.”


잠긴 목소리로 말하면서 프리틸라가 두 팔을 뻗어 라무스를 안았다. 수도 없이 그리고 그려 보던 순간이 그녀의 팔 안으로 들어왔다. 프리틸라는 죽은 남편을 떠올렸다.


아세르, 누가 왔는지 보세요. 우리 아들이에요. 당신이 장담한 그대로 우리의 라무스가 무사히 장성하여 나를 찾아왔어요.


“조금도 변하지 않으셨어요, 어머니는.”


굳게 안고 있던 팔에서 놓여나자 라무스가 프리틸라의 눈물을 닦아주며 웃었다.


“달빛의 장난이지. 이 어미는 더 이상 젊지 않단다.”


라무스의 손을 잡던 프리틸라는 그의 손등에서 만져지는 상흔을 느꼈다. 그녀는 아들의 두 손을 가로지르는 흉터를 가까이 들여다보았다.


“이 상처…… 혹시 여기 오기 전에 토드 경을 만났니? 그가 살아 있었어?”


어린 라무스와 함께 사라졌던 토드 경을 따라다니는 풍문은 그가 배신자라는 것이었다. 시데레온의 어린 후계자를 그가 죽였다고 믿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오래 행방이 묘연할 리 없다는 것이었다. 물론 프리틸라는 풍문을 믿지 않았다.


“예, 만났습니다. 타키툼에 숨어 있었어요. 대장장이가 되어서.”


“대장장이?”


프리틸라가 풋 하고 쓴웃음을 웃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쇠와 불의 조화를 동경했단다. 하지만 모루와 망치 대신 검을 잡지 않으면 안 되었지. 그는 기사 가문의 외아들이었으니까. 그런데 뜻밖의 풍파가 결국 그를 대장장이로 만들었구나. 인생이란, 운명이란……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이지.”


“어머니께 듣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요. 저기에 좀 앉으시는 게 좋겠어요.”


라무스가 옹달샘 옆의 희고 둥근 바위를 가리켰다. 프리틸라는 바위에 걸터앉고 라무스는 그녀의 앞쪽 마른풀 위에 자리를 잡았다.


“나 역시 궁금한 것들이 있단다. 네 아버지는 무슨 말씀을 하셨니? 너와 마지막으로 헤어질 때 말이다.”


아들의 얼굴을 어루만지고, 따뜻한 음식을 먹이고, 나란히 정원을 산책하는 등의 일상적인 안온함은 아직 자신의 몫이 아님을 프리틸라도 알고 있었다.


“여신의 가호를 빌어주셨고, 무슨 일이 있어도 삼촌과 토드 경을 믿으라고 하셨어요. 제가 어머니께 가는 거냐고 했더니 다른 곳이라고 하셨고요. 그뿐이에요.”


“그렇구나. 유바론 가에서는 어린아이들에게 일찍부터 의무와 운명을 짊어지우는 걸 그리 바람직하게 여기지 않거든. 설령 적장자라도 가문을 잇기를 원치 않으면 깨끗이 포기하는 이들이야. 유바론은. 그러니까…….”


질문을 담은 온화한 눈길이 라무스의 눈을 곧게 응시했다.


“저도 제가 원하는 삶을 살면 된다고요?”


프리틸라가 살짝 끄덕였다.


“예. 그럴 생각이에요.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려고 해요. 바로잡을 겁니다. 어그러지고 잘못된 일들을.”


“그럴 줄 알았다.”


자랑스럽고 기쁘면서도 그 길의 험난함을 생각하니 프리틸라는 가슴이 아렸다. 이 밤의 짧은 해후는 새로운 긴 이별의 시작점에 닿아 있는 거였다.


“이 상처를 통해 제 몸속으로 들어온 약의 효능은 무엇인가요, 어머니? 토드 경은 어머니의 명령을 따랐을 뿐 그 약이 어떤 약인지는 모른다고 하던데요.”


라무스가 손등을 내보였다.


“게르미노에 올 때 불새의 눈을 지나왔니?”


프리틸라가 대답을 젖혀 두고 딴 소리를 했다. 그러나 그녀의 의미심장한 표정에서 라무스는 결국 다 이어지는 얘기일 것을 알았다.


“예.”


“우회했니? 가로질렀니?”


“가로질러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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