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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불새의 눈과 고래 산맥

by 화진


늘 몸보다 마음이 저만치 앞서가는 여정이었다. 게르미노는 멀었다. 라무스는 남생이 여관에서 미르 강을 끼고 내려가다 불새의 눈에 이르렀다. 불새의 눈은 타원형의 넓은 초원이었다.


말을 타고 초원의 정중앙을 가로지르면 반나절 만에 고래 산맥의 꼬리 협곡에 위치한 향기풀 여관에 닿을 수 있었다. 초원의 가장자리를 따라 빙 돌아서 가면 시간이 세 배는 더 걸렸다. 하지만 대부분의 나그네들은 우회하는 길을 택했다. 안전한 경로이기 때문이다.


겨울에도 푸르게 무성한 초원은 잔잔한 호수처럼 반짝였지만 그 속에 치명적인 위험을 감추고 있었다. 평화롭게 일렁이는 풀숲에 가려진 채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깊고 어둡고 진득한 늪. 자칫 거기에 한 발이라도 디딜라치면 무슨 수를 써도 빠져나올 수 없었다.


불새의 눈은 무모하게 도전하는 인간이나 동물을 가차 없이 삼켜 버리는 초원이었다. 그들에게서 빨아들이는 생명력으로 자신의 아름다움과 생기를 유지하는, 말하자면 생생하게 살아 있는 자연 그 자체였다.


위험한 장소에는 유혹적인 일화가 따라다니는 법이었다. 초원의 흙바닥에서는 사금이 나며 늪에 잡아먹힌 나그네들이 지녔던 귀중품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고 했다.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오만한 인간과 뜻밖의 횡재에 눈이 먼 탐욕스러운 인간은 끊임없이 나타났으니 불새의 눈이 허기지는 일은 없었다.


잠시 초원을 관망하던 라무스는 망설임 없이 그 속으로 말을 몰았다. 그는 이전에도 불새의 눈을 무사히 건넌 적이 있었다. 유심히 바라보고 가만히 귀 기울이면 풀과 땅이 그를 인도했다. 풀은 그에게 안전한 방향을 가리켜 보였고 땅은 늪이 가까워지면 오지 말라고 속삭였다.


물론 실제로 풀이 움직이거나 땅이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불새의 눈에게 특별히 사랑받는 인간은 라무스 말고도 더러 존재했다.


콤메르의 소유인 향기풀 여관의 관리인은 라무스를 환대했다. 라무스는 하룻밤을 묵고는 말을 바꿔 타고 다시 길을 떠났다. 고래 산맥은 산들이 고래 모양으로 겹겹이 늘어서 있었다. 북쪽에 꼬리를 두고 남동쪽에 머리를 둔 고래 산맥 주위에는 습지와 연못이 많았다.


고래 산맥도 전설을 품고 있었다. 아주 먼 옛날에는 하늘을 나는 고래가 있었다는. 바다에서 솟아올라 세상을 두루 돌아보던 고래가 잠깐의 휴식을 위해 여기 습지로 내려와 누웠다가 긴긴 잠에 빠져 산맥으로 변했다는 전설이었다.


거대하게 누운 고래의 옆구리쯤에 붙은 지느러미 여관에서 밤을 지내던 날 라무스는 우뚝 솟은 산과 을 올려다보며 산맥의 서쪽을 떠올렸다. 거리로 치자면 몹시 멀지만 그 너머가 바로 타키툼이었다.


“지금쯤이면 프레케스 저택에서 도망쳐서 자신이 가고 싶은 데로 갔겠지?”


누군가의 웃음기 어린 눈 같은 반달을 향해 라무스는 무심코 중얼거렸다. 그 여자에게는 자유로운 삶이 어울렸다. 시스, 얼음꽃을 닮은 여자.


고래 머리를 눈앞에 두었을 때 라무스는 동쪽으로 길을 잡았다. 지형이 점점 완만해지고 얼굴에 닿는 바람이 순해졌다. 겨울이 끝나가고 있었고 게르미노는 티토니아에서 봄이 가장 빠르게 찾아오는 지역이었다.


살리그네의 성의 정원이 내려다보이는 산속에서 라무스는 날이 저물기를 기다렸다. 햇빛이 따뜻한 오후가 되자 바퀴가 달린 크고 푹신한 의자를 밀고 나오는 시종들이 보였다. 의자에는 파파노인이 비스듬히 몸을 기대고 앉아 있었고, 중년의 귀부인이 의자와 나란히 걸었다.


정원 한가운데의 분수 앞에 자리 잡은 그들은 세다투스 살리그네와 그의 딸 프리틸라. 라무스의 외할아버지와 어머니였다.


라무스는 숨죽인 채 지켜보았다. 세다투스와 프리틸라는 나란히 해바라기하며 이따금씩 얼굴을 가까이하여 짧은 대화를 나누었다. 익숙하고 반가운 정경이었다. 당장 저리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아바루스 왕의 명령을 받는 감시의 눈길이 어디엔가 있을 터였다.


세다투스와 프리틸라는 정원에 그리 오래 머물지 않았다. 그들의 모습이 성 안으로 사라지자 라무스는 냇가로 갔다. 그러고는 물이 오르는 버드나무의 가지 하나를 잘라냈다.


마침내 밤이 오고 라무스는 성으로 숨어들었다.


노환이 든 아버지의 곁을 지키던 프리틸라는 그가 잠들었음을 확인하고서야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들고 온 촛대를 테이블에 내려놓은 그녀가 창가로 갔다. 보름달이 뜬 하늘이 파르스름하니 번했다. 프리틸라는 창틀에서 이전에는 없었던 무언가를 발견했다.


“이건……!”


나무의 심을 제거해 길쭉한 원통형을 만들고, 입술이 닿을 부분은 겉껍질을 벗겨내고 흰 속껍질만 남겨 피리청 역할을 하도록 만든 버들피리였다. 그것을 집어든 프리틸라가 방을 샅샅이 살폈다.


길이가 다른 버들피리가 하나 더 있었다. 화장대 위의 작은 초상화 앞에. 오래 전에 헤어진 아들의 초상화였다.


“라무스, 라무스가 온 거야.”


그 아이는 지금 어디 있을까? 어디에서 나를 기다릴까? 프리틸라는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아들의 생각을 읽으려 애썼다.


“그래, 거기야!”


남의 눈을 피해 모자가 만날 수 있는 곳은 한군데밖에 없었다. 태고의 버드나무숲에 있는 옹달샘. 이 밤에 그 버드나무 숲으로 프리틸라를 따라 들어올 사람은 없으리라. 프리틸라는 후드 달린 망토를 걸치고 방을 나갔다.


성을 나가자 아니나 다를까 아바루스 왕이 페르베아투에서부터 딸려 보낸 감시병 중 하나가 프리틸라를 따라 붙었다.


“내가 어디를 딛는지 잘 보면서 따라와야 할 거다. 태고의 버드나무숲은 낯선 사람에게는 꽤 불친절하니까.”


감시병의 얼굴이 난감하게 일그러졌다. 그 숲이라면 게르미노의 백성들조차도 얼씬하지 않는 곳이었다. 태고의 버드나무숲은 경외의 대상이었다. 오직 순혈의 살리그네 일족만이 그 숲을 거리낌 없이 드나들었다. 그들만이 그 숲에서 길을 잃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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