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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기묘한 평온

by 화진


“알겠습니다.”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게 시스가 대답했다. 시스는 이곳의 누구와도 친분을 만들 뜻이 없었다. 그녀는 프레케스의 친척들이 모이는 파티가 열리기 전에 이 저택을 떠날 계획이었다.


다행히 준비할 시간은 촉박하지 않을 듯했다. 어제 데세르는 파티 날짜를 열흘 뒤로 미룬다고 통보했다. 이유는 알려주지 않았지만 시스도 이유 같은 건 상관없었다. 그녀에게는 파티 자체가 무의미했으니까.


“그리고 너에게 부탁할 것이 있다. 데세르에게도 말 좀 해주겠니? 그녀를 멀리 하라고. 내가 이미 말했지만 내 말을 귀담아 듣는 것 같지 않구나. 하지만 네 말이라면 데세르도 흘려듣지는 않을 게다. 데세르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이 너니까.”


그와 내가 마주칠 때마다 어떤 식인지 아시잖아요, 하는 말이 튀어나오려는 걸 시스는 꾹 참았다. 초조하고 간절한 다피넬의 모습에서 자신을 키워준 어머니를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페로니아가 보여준 진실한 모성이 다피넬에게 겹쳐 보이자 냉정히 외면하기가 어려웠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막막하고 메마른 사막을 혹은 풍랑이 멎지 않는 망망대해를 혹은 까마득히 높고 험준한 암벽을 안고 살아가는 법이었다. 다피넬의 그것은 병약한 아들이리라. 그러니 다피넬은 죽을 때까지 극복하지 못할 터였다. 그녀의 사막 혹은 망망대해 혹은 암벽을.


“그럴 기회가 생긴다면 잘 말해 보겠습니다.”


잠시 생각하던 시스가 진지하게 말했다. 다피넬은 깊은 숨을 내쉬며 시스를 지그시 쳐다봤다. 그녀의 눈이 희미한 웃음기와 아스라한 감정으로 일렁였다.


“이제 보니 닮은 데가 있어. 생김새는 다르지만…….”


네가 늘 고집스럽고 매정하고 약은 체하고 있어서 내가 눈치채지 못한 거였어. 너의 샛별 같은 두 눈이 나의 보니타가 보던 것들을 본다는 걸. 보통 사람들은 볼 줄 모르는 것, 눈동자에 맺히는 상 너머의 것들을 보는. 아마 통찰력과 비슷하지만 더 깊고 예리한 무엇일 거야.


“누구와 닮았다는 거예요?”


“보니타, 내 쌍둥이 언니. 그녀에게서 보던 눈빛을 방금 네게서 본 것 같구나. 나의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


하긴 말리티아가 불러일으키는 불안 때문에 혼돈스러워서 그런 느낌을 받았을 수도 있었다. 그래도 다피넬은 계속 얘기하고 싶었다. 시스에게, 보니타에 대해.


“보니는 총명하고 선했어. 좋은 건 다 나에게 양보하고 싶어 했고, 바보 같은 나를 지켜줬지. 보니를 아는 모두가 보니를 사랑했어. 사람들만이 아니라 짐승들이나 새들도, 나무와 풀들도. 해와 구름과 바람조차도 말이야.”


자신만의 감회에 빠져 말하던 다피넬이 피식 웃은 건 자신의 말이 보니타를 모르는 시스에게는 과장된 허풍과 미화로 들릴 수도 있겠다 싶어서였다. 하지만 다피넬의 말은 한 치의 보탬도 없는 사실이었다. 보니타는 모두를 사랑했고, 모두에게 사랑받았다. 마치 선의 화신처럼.


“내 기억 속에도 그녀와 비슷하게 좋은 사람이었던 누군가가 있어요.”


그 누군가란 친어머니인 줄 알았지만 양어머니였던 페로니아였다.


“하지만 난 아니에요. 내 눈빛이 당신의 보니타와 닮았을 리 없어요. 난 지금까지 그저 나 하나의 안위만 추구하면서 살았으니까요.”


시스의 말투는 부드러웠다. 하려던 말이 더 있었지만 그건 차마 할 수 없었다. 당신이 나에게 무얼 바라는지 알지만 나는 결국 그 바람과 어긋나고 말 거예요.


“지키고 싶은 소중한 존재를 아직 갖지 못해서 그런 거야. 지금까지 너 자신만이 네가 지켜야 하는 유일한 존재였던 게지. 지켜야 할 존재가 생기면 그때까지 몰랐던 본성이 바야흐로 드러나는 법이거든.”


다피넬의 얼굴에 슬픈 미소가 드리웠다. 내 아들 데세르가 너에게 지키고 싶은 존재가 될 수는 없을까?


시스는 다피넬의 말을 곱씹어 보았다. 내가 지키고 싶은 존재라……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페로는 스스로를 지킬 줄 알고, 앙켑세라 역시 마찬가지고……. 다피넬이 말한 대로 시스에게는 자신 이외에 따로 지켜줘야 할 존재가 없었다. 그리고 시스는 지금 이대로가 좋았다.


“물어봐도 될까요? 보니타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


조심스러웠지만 궁금했다. 보니타 이야기를 먼저 꺼낸 건 다피넬이었으니 이런 질문을 받을 걸 충분히 예상했을 것이다. 드레스 소매를 내리는 걸 잊고 있었던 시스는 다피넬의 반응을 살피며 차분히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우리가 살아 숨 쉬는 이 세상은 아니야. 직접 가보기 전엔 알 수 없는 다른 세상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보니가 간 뒤로 난 이런 식으로 스스로 위안하면서 살고 있지.”


“안타깝군요.”


보니타에 대해서도 또 보니타의 죽음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없는 시스가 할 수 있는 말은 겨우 이것뿐이었다.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다피넬은 하염없는 눈으로 손에 쥔 약병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아 보니타. 말리티아는 도대체 무슨 속셈으로 데세르에게 접근한 걸까? 왜 기어이 여기까지 온 걸까? 그녀의 어두운 힘은 얼마나 남아 있을까?


방 안이 순간적으로 번쩍했다. 번개였다. 쏴아 빗소리가 벽을 두드리고 둔중한 천둥소리가 났지만 다피넬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녀는 시스가 옆에 있다는 사실도 잊은 듯 자신만의 걱정과 두려움에 골몰해 있었다.


시스는 조용한 걸음으로 문을 향했다. 문 앞에 선 채로 한 번 더 다피넬을 돌아보았으나 그녀는 자기만의 생각에서 빠져나올 줄을 몰랐다.


시스가 말리티아와 둘만 마주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웬일인지 데세르도 시스를 찾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다피넬은 시스를 볼 때마다 말리티아를 경계하라고 일깨웠다. 프레케스 저택에는 기묘한 평온이 흘렀다.


날씨는 자주 우중충하게 흐리거나 진눈깨비 아니면 비가 내렸다. 시스는 몇 통의 편지를 써서 페로를 통해 어디론가 날려 보냈고, 한가할 때마다 머릿속으로 저택을 탈출할 경로를 그려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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