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창고가 맞아. 하지만 창고를 짓기 전에는 이 온실이 있었지.’
‘그걸 백작 부인이 어떻게 아는 건데?’
‘다피넬의 꿈을 좀 엿보았지.’
꿈마녀가 신이 나서 눈을 찡긋한다.
‘그럼 확실한 건 아닐 수도 있겠네? 꿈이라는 게 그렇잖아. 기억 속 장면이 재현되는 경우도 있지만 아예 현실을 벗어난 얼토당토않은 일들이 펼쳐지기도 하니까.’
심드렁하게 말한 시스가 꿈마녀 옆을 떠나 다시 꽃들 사이로 사뿐사뿐 걸어간다. 꿈마녀가 하고 싶은 얘기에는 관심 없다는 듯이.
‘분명히 기억을 반영하는 꿈이었다고!’
성큼성큼 시스를 따라온 꿈마녀가 약이 오른 표정으로 볼멘소리를 한다. 시스는 듣는 둥 마는 둥 하고는 주황색의 귀여운 종 모양을 한 꽃이 조롱조롱 매달린 샌더소니아 가지를 몇 개 꺾으면서 콧노래를 부른다.
‘그 기억 때문에 다피넬은 온실을 없애고 싶어 했어. 그녀를 사랑한 키테르 공은 기꺼이 그녀가 하자는 대로 했고. 내가 그녀의 꿈에서 봤어. 키테르 공이 나오는 꿈을 꾸는 밤이면 그녀는 자신의 서재로 가서 그의 편지를 꺼내 읽곤 해. 그는 이 세상에 없지만 그가 그녀에게 주었던 사랑이 그녀를 살게 하고 버티게 하지.’
시스는 청금석에 새겨진 님파의 서를 훔쳐보러 들어갔던 밤을 떠올린다. 그날 다피넬이 깊은 밤에 갑자기 서재로 들이닥쳐서는 키테르 공의 편지와 시들을 묶어 만든 책을 읽던 것을. 아무래도 온실에 대한 꿈마녀의 얘기는 신빙성이 있는 듯하다.
‘온실을 없애고 싶게 만든 그 기억이 다피넬의 악몽이야?’
그 악몽에 다피넬의 어머니인 말리티아도 나올 지도 모른다고 시스는 생각한다. 얼마 전의 저녁 식사 자리에서 다피넬은 말리티아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새하얗게 질렸었으니까.
‘맞아. 너무너무 슬프고 끔찍한 기억 속으로 끌려들어가는 악몽이지. 내가 본 그녀의 악몽을 말해주면 넌 나한테 뭘 줄 거야?’
꿈마녀는 다시 흥이 올라 웃으며 재잘거린다. 시스보다 열다섯 살쯤은 많은 것 같은데 이럴 때의 꿈마녀는 꼭 소녀 같다. 순수한 소녀는 아니고 약간은 악의도 품은 소녀.
‘딱히 줄 만한 것도 없지만, 백작 부인한테 뭔가를 바치면서까지 알고 싶은 정도는 아냐.’
시스는 다시 몸을 돌려 반대 방향으로 걷는다.
‘궁금하면서 아닌 체하기는. 시스, 시스.’
둥글게 부푼 치맛자락을 양 손으로 휙 잡아 올린 꿈마녀가 종종걸음을 쳐 시스를 따라온다. 종아리가 훤히 드러난 것도 아랑곳 않는다. 그런 그녀를 보며 웃던 시스의 얼굴에서 갑자기 웃음기가 싹 가신다. 꿈마녀의 흰 스타킹 아래로 다리에 든 멍이 비쳐난 탓이다.
‘그 멍, 왜 그런 거야?’
‘무슨 소리야? 멍이라니? 네가 잘못 본 거야!’
황급히 치맛자락을 내려뜨리며 꿈마녀가 발끈했다.
‘아, 미안. 아마도 식물에 맺혀 있던 이슬이 스타킹에 묻으면서 진 얼룩이었나 봐.’
시스는 즉시 사과한다. 푸르죽죽하거나 누르끄레한 그것은 멍 자국이 틀림없었지만, 감추고 싶어서 강하게 부정하는 저 심경을 보호해 주고 싶어서다.
스스로를 백작 부인이라고 주장하는 이 꿈마녀는 언제 어디에서 살았던 누구일까? 어째서 꿈속에 갇힌 채 고독하게 남의 꿈이나 현실을 엿보기만 해야 하는 걸까? 시스는 궁금했지만 어쩐지 그녀 스스로 말하기 전에는 묻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끝내 입을 다문다.
‘그래, 이슬 얼룩이야. 사과 받아줄게. 그건 그렇고 다피넬의 악몽에 대해 진짜로 듣지 않을 거야? 내가 너한테 원하는 건 그리 어려운 게 아니야. 나쁜 짓도 아니고. 나는 단지 내……!’
꿈마녀는 갑자기 화들짝 소스라친다. 너무 놀란 나머지 자신이 하던 말도 잊고 창밖 저 멀리에 시선을 고정한 채 추위 타는 사람처럼 어깨를 움츠린다.
‘어? 누구지?’
교차시킨 손으로 자기 자신의 팔을 비비며 꿈마녀는 인사도 없이 오색 안개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백작 부인, 백작 부인! 정말 가 버린 거야?’
꿈마녀를 부르던 시스의 귓전에 현실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레이디, 레이디. 레이디 시스. 얼른 일어나 봐요. 조금만 있으면 마차가 도착한대요. 공작님의 외할머님 되시는 분이 오신다고요.”
시스가 낮잠에서 깨어 눈을 떴다. 페로는 어디로 숨었는지 보이지 않고, 시스가 입을 드레스를 고르는 넬리사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누가 온다고?”
“데세르 공작님의 외할머님 되시는 분이래요. 어서 이걸로 갈아입고 정원으로 마중을 나가셔야 해요. 공작님께서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이라고 명하셨거든요.”
말리티아가 왔구나. 옷을 갈아입으면서 시스는 얼마 전에 데세르가 준 수선화를 힐긋 보았다. 말리티아가 보냈다는 노란 수선화는 아직 싱싱한 상태로 화병에 꽂혀 있었다.
비는 그쳤으나 구름은 걷히지 않아서 하늘이 낮고 어둑했다. 시스와 넬리사가 정원으로 나가니 이미 다들 모여 있었다. 넬리사는 시스를 데세르의 옆으로 인도해 갔지만 시스는 다피넬의 옆으로 가서 섰다. 다피넬이 데세르와 시스를 양옆에 두고 선 그림이 되었다.
데세르는 기분이 좋아 보였고 다피넬은 무표정했다. 확연히 대비되는 두 사람의 기색이 시스는 미묘하게 신경이 쓰였다.
“오, 다피넬. 우리 다피.”
마차에서 내린 말리티아가 감격스러워하며 다피넬을 안았다. 다피넬은 말리티아를 밀어내지는 않았지만 마주 안지도 않았다. 잠시 뻣뻣하게 안겨 있다 이내 몸을 빼어 물러섰다.
“그래, 다피. 널 이해해. 너희들에게 나는 좋은 엄마가 아니었어. 하지만 얘야. 난 이제 예전의 그 말리티아가 아니란다. 지금의 나는 혈육의 정을 그리워하는 평범하고 불쌍한 노인네에 지나지 않는단다. 정말이야, 마지막으로 이 어미에게 한 번만 더 기회를 다오. 응?”
느리고 여린 어조로 말리티아는 애원했다. 주름은 졌으나 자애롭고 아름다운 얼굴이 눈물에 젖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