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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선불이 원칙

by 화진


말을 꺼내기 전에 라무스는 짧게 망설였다. 그 망설임을 일부러 뜸을 들이는 것으로 오해한 콤메르가 눈짓으로 재촉했다.


“포르미두사의 공녀와 타키툼의 젊은 공작의 결혼에는 감춰진 비밀이 있습니다.”


콤메르가 눈을 뒤룩 굴리면서 코를 벌름거렸다. 구미가 썩 당길 때 나오는 반응이었다.


“그렇다면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따끈따끈한 비밀이로군. 유력한 가문끼리의 정략결혼과 청춘남녀를 둘러싼 숨은 비밀이라……. 제법 재미있는 냄새가 난단 말이지. 좋아. 정보 교환을 받아들이겠네.”


“감사합니다. 그럼 이제 말씀해 주십시오. 라크리모의 가보라는 게 대체 무엇인지, 프리틸라의 살리그네는 누명을 쓴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라무스는 바작바작 마르는 입술을 와인으로 적셨다.


“조바심낼 것 없어. 거래를 하기로 한 이상 그 정보는 이제 자네 것이니까. 다만 선불을 받는 게 내 원칙이라네.”


콤메르가 손을 들어 라무스를 가리켰다. 자네 먼저, 라는 의미였다. 라무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프레케스 쪽에서 신전의 결혼식에 가짜 신랑을 내세웠습니다. 글라키에사 가의 신부는 첫날밤에 그 사실을 알았지요.”


“오오오! 저런, 저런! 그래서 어찌 되었나?”


가슴 높이에서 느리고 정확한 손뼉을 딱 딱 딱 세 번 치는 콤메르의 퉁방울눈이 행복하게 번들거렸다.


“그녀는 프레케스가에서 자신을 속였다는 사실에 무척 분개했다더군요. 그래서 초야를 치르려던 데세르 공작을 다치게 할 뻔했고 공작의 모친이 나서서 그녀를 묶어 가두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풀려난 뒤에도 그녀는 공작을 외면하면서 결혼의 무효를 주장한다는 후문입니다.”


라무스는 시스의 상황이 새어나가는 것이 어쩌면 그녀에게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고 판단했다. 그녀에게도 그녀의 행복을 바라고 안위를 염려하는 가족이나 친구들이 있을 테니까. 그들이 지금쯤 시스의 결혼이 순탄한지, 그녀가 행복한지 궁금해 할 테니까.


포르미두사의 공녀라는 지위 말고는 시스의 신상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는 라무스였기에 그는 막연히 희망하고 있었다.


시스를 아끼는 사람들이 그녀의 소식을 수소문하기를. 그러다 여관업자이자 정보 매매상인 콤메르를 떠올리기를. 그들이 콤메르에게서 그녀의 곤란한 처지를 전해 듣고 발 벗고 나서서 그녀를 돕기를. 그녀가 원하는 삶을 찾기를.


“나이아시스 글라키에사도 참 안됐군. 상당히 기구한 운명이야. 그런데 공작을 거부한 채 결혼의 무효를 주장했다고? 정말이지 뜻밖이야. 허허, 대단한 레이디로세, 대단해.”


빙글빙글 웃으면서 콤메르가 와인을 들어 허공에다 대고 건배했다. 그는 시스가 페르베아투의 왕가 쪽에서 포르미두사의 글라키에사 가에 몰래 맡긴 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시스의 출생과 관련한 정확한 정보는 아직 콤메르도 얻지 못했다.


“신전에 가짜를 내보낸 까닭도 알고 있나? 이보게, 라무스. 라무스.”


고개를 숙이고는 무슨 생각엔가 깊이 몰두해 있는 라무스를 부르며 콤메르가 식탁을 노크하듯 똑똑똑똑 두드렸다.


“아, 예. 뭐라고 하셨습니까?”


라무스가 고개를 들어 콤메르를 보았다. 라무스는 잠시 동안 자신을 사로잡았던 잡념을 내심 자조했다. 그는 자신이 떠난 사이에 시스와 데세르가 화해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고 곧바로 그 생각을 부정했던 것이다. 빌어먹을! 그건 아니잖아! 라고.


“가짜 신랑을 내세운 까닭을 물었네.”


“데세르 공작의 건강이 좋지 않아서였답니다. 워낙 병약하다고 합니다.”


“그렇군. 신랑인 척 결혼식을 올린 작자에 대한 정보도 있나?”


“아쉽게도 없습니다. 그 문제는 젊은 공작의 수완 좋은 어머니가 은밀하게 잘 처리했을 거라는군요.”


흐흠, 콤메르는 안타까운 탄식을 흘렸다.


“문득 궁금해지는군. 자네는 그 비밀을 어떻게 알게 된 거지?”


“그것까지 알려드릴 순 없습니다. 우리 용병단의 기밀과 무관하지 않아서요.”


웃음과 함께 얼버무리는 라무스의 태도는 여유로웠다. 녹스 용병이라면 누구든 이 정도의 태연한 임기응변은 가능했다.


“이해하네. 값을 받았으니 이제 내 쪽에서 이야기를 시작할 차례군.”


라무스는 조금 빨라진 자신의 심장 고동을 느꼈다.


“라크리모의 가보가 재생과 번영을 가져오는 것이라는 풍문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그게 무엇입니까?”


참지 못하고 먼저 묻고 말았다.


“재생과 번영? 라크리모에게 그런 게 전해져 내려올 리가. 파괴와 허영의 무엇이라면 또 모르겠네만.”


쾌활한 비웃음이 터진 콤메르는 손사래까지 치면서 웃어댔다.


“시데레온의 소영주 가문의 하나였던 라크리모가 오랜 세월 기만과 파괴의 술수를 써서 흘린 피로 페르베아투 왕국을 이룩했지. 하지만 라크리모는 시데레온의 유바론 가에 대한 열패감을 극복하지 못했네. 티토니아의 어느 누구도 라크리모 가를 고귀한 유바론 가에게 하듯이 존경하지 않으니까. 이게 바로 그들이 프리틸라 살리그네를 모함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라네.”


“모함, 모함이 분명하다는 말씀이시죠?”


토드 경의 말과 맥락이 일치했다. 어머니의 맑은 미소가 새삼 눈앞에 선연했다. 라무스는 뜨겁게 슴벅이는 가슴에 화이트와인을 물처럼 들이켜 부었다.


“모함이고말고. 프리틸라 살리그네에게 자신들의 가보를 훔쳤다는 누명을 씌운 거야. 그럼으로써 그녀의 남편인 유바론 대공의 명예에 흠집을 내고, 한 술 더 떠서 살리그네 혹은 유바론에게 있었을 보물을 빼앗으려는 심산으로 획책한 일이 틀림없을 거네.”


라크리모에 대한 콤메르의 시각은 몹시 신랄했다.


“그 보물이 살리그네의 것이거나 유바론의 것이라고요?”


“재생과 번영을 가져온다는 보물이라는 것이 진짜 존재한다면 그럴 거라는 말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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