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무스가 방문을 나서자마자 육중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파보르다웠다. 그는 뒷모습을 오래도록 눈으로 지켜준다든지 염려 어린 목소리로 거듭 인사하며 배웅하는 일 같은 건 알지 못했다. 라무스가 아는 한 어떤 사람에게도 예외를 두지 않은 파보르의 성향이었다.
녹스 성채가 있는 마을을 벗어나 숲을 가로지르는 가도로 들어서자 사방이 조용하다 못해 적요했다. 원형에 가까운 달이 말을 타기에 불편하지 않을 만큼 길을 밝혀 주었고 헐벗은 나무들 사이로 여기저기 잔설이 희붐하게 빛났다.
또 겨울이구나. 시데레온을 떠난 것도 겨울날이었는데.
그때의 어린 소년은 어느덧 청년이 되었다. 그날은 눈이 내렸으나 오늘은 맑았다. 이렇듯 마음가짐도 풍경도 사뭇 달랐다. 다만 폐부를 드나드는 시린 겨울 공기는 한결같았다. 그래서일까. 라무스는 그날의 자신과 나란히 길동무하여 가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동안은 외면해왔던 소년을, 자기 자신임에도 따로 떼어 놓고 돌보지 않았던 소년을 라무스는 비로소 다시 받아들였다.
나도 확신은 없어. 집에 돌아갈 수 있을지 어떨지는. 그럼에도 애쓸 수 있는 한 애써 보려고 해. 돌아가기 위해. 폴루스 니두스 성, 우리집으로. 중정의 화단에는 어머니께서 좋아하시던 헬레보루스가 지금도 피어 있을까?
프리틸라가 게르미노에서 낳은 아기 라무스를 데리고 시데레온으로 돌아가던 해 겨울, 폴루스 니두스의 중정에는 하얗게 쌓인 눈 속에서 헬레보루스가 만발했다. 그해를 시작으로 헬레보루스는 겨울마다 눈을 뚫고 피어났다.
시데레온 사람들은 헬레보루스를 눈 속에 피게 한 것이 라무스라고 믿었다. 합리적이고 관대한 영주에 대한 존경과 충심이 그 아들인 라무스에 대한 사랑과 기대로 이어진 것이겠지만, 헬레보루스가 아무리 추위에 강한 식물이라고는 해도 라무스가 오기 이전에는 그처럼 설경과 어우러져 일제히 만개한 적은 없었던 것이다.
예상대로 라무스는 밤이 반쯤 기울었을 무렵 남생이 여관에 도착했다. 고요한 잠의 축복에 휩싸인 여관에서는 불빛 한 줄기조차 새어 나오지 않았다. 오직 현관에 높이 매달린 등잔불만이 까물까물 깨어 있었다.
말에서 내린 라무스는 위쪽 끝이 뾰족한 높은 목책을 거느린 커다란 대문 앞으로 갔다. 그는 대문 옆에 늘어진 줄을 잡고 흔들었다. 줄과 연결된 종이 내는 소리가 저 안쪽으로부터 희미하게 들렸다.
한참을 흔들고서야 문 너머에서 인기척이 났다. 커다란 출입문에 나 있는 쪽창이 덜컥 열리고 여관의 일꾼이 이쪽을 내다보았다.
“라무스님?”
까치집 머리를 한 앳된 일꾼은 곧바로 라무스를 알아보았다.
“자는 사람을 깨워서 미안하네, 티키.”
티키가 졸린 눈을 부비며 잠금 장치를 풀고 대문을 열었다. 라무스는 말을 끌고 안마당으로 들어섰다. 티키가 말고삐를 넘겨받아 여관 건물 측면에 딸린 마굿간에 말을 넣고 왔다.
“방으로 안내해 드리죠.”
연신 하품을 하는 티키를 따라 라무스는 이층의 마지막 방으로 갔다. 남생이 여관에 들를 때마다 묵곤 하는 방으로 뒷마당과 갈대밭 그리고 미르 강을 내다볼 수 있는 창이 나 있는 곳이었다. 추운 겨울밤인 만큼 창의 덧문은 닫혀 있었다.
티키가 벽난로에 불을 붙이고 나서 뜨거운 허브차를 한 주전자 가져왔다.
“내일 아침에 네 주인어른에게 전해줘. 내가 단주님의 편지를 가져왔다고.”
“예, 라무스님. 편지, 편지…….”
잊지 않기 위해 여러 번 되풀이해 중얼거리면서 티키는 다시 자러 갔다. 라무스는 허브차를 한 잔 따라 마신 다음 벽난로 앞의 마룻바닥에 담요를 깔고 누웠다가 이내 잠들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콤메르는 티키를 보내 라무스를 자신의 식탁에 초대했다.
“어서 오게, 어서 와. 이번엔 제법 오랜만에 보는군.”
기름진 얼굴에 풍채가 좋은 중년 사내가 식탁에 앉은 채로 손짓했다. 늘 그렇듯 사람 좋은 웃음 아래에 능청을 감춘 그가 바로 남생이 여관의 주인 콤메르였다.
“여기 단주님의 편지입니다.”
“자, 어서 들게. 내가 새벽에 미르 강에서 잡은 생선으로 만든 거야.”
콤메르가 화이트와인으로 찐 생선 요리를 권했다. 라무스가 향긋한 생선 요리를 맛보는 동안 콤메르는 파보르의 편지를 미묘한 표정으로 읽었다.
“어때? 맛이 기가 막히지? 여기 와인도 한 잔 하고.”
다 읽은 편지를 치운 콤메르가 이번에는 화이트와인을 따른 잔을 건네주었다.
“사고 싶은 정보가 있습니다.”
와인 한 모금을 천천히 음미하다 삼키고 나서 라무스가 이곳에 온 진짜 목적을 털어놓았다.
“호오, 그래? 거래가 성사되려면 두 가지의 전제 조건이 충족이 되어야겠지. 첫째, 내 손에 자네가 원하는 정보가 있어야 할 것이고. 둘째, 내가 팔고 싶은 마음이 들어야 할 것이고 말이야. 라무스 자네도 알다시피 내가 변덕이 좀 있잖은가.”
콤메르는 유쾌한 동시에 짓궂게 웃었다. 정보를 모으고, 사고, 파는 일은 콤메르가 추구하는 은밀한 즐거움이었다.
“일단 말해 보게. 사고 싶은 정보가 뭔가?”
“페르베아투의 라크리모 왕가의 가보와 프리틸라 살리그네의 절도 혐의에 대해.”
“와우! 이거 전혀 뜻밖인 걸?”
살짝 튀어나온 감이 있는 둥그런 눈을 빛내는 콤메르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촛불의 불꽃을 흔들었다.
“파실 의향이 있습니까?”
흥미진진해 하는 눈빛에서 그가 정보를 가지고 있음을 간파한 라무스가 진지하게 물었다.
“값을 무엇으로 치를지 들어보고 결정하겠네. 나는 정보를 팔 때 가치가 상응하는 또 다른 정보를 값으로 받는 걸 제일 좋아하지. 자네가 알고 있는지 모르겠네만.”
“가치가 상응할지는 모르겠지만 넘겨드릴 만한 것이 있기는 있습니다.”
“그거 반가운 소리군. 그럼 우선 실마리만 슬쩍 뚱겨 주게. 물건의 포장지를 보여주는 셈치고 말이야. 내 구매욕이 동하는 것일지 아닐지 나 자신도 몹시 궁금해지는군.”
콤메르가 의자를 식탁에 바싹 당겨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