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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꿈속의 온실

by 화진


이 견해 역시 토드 경의 주장과 통했다. 라무스는 소용없는 줄 알면서도 다시 한 번 어린 시절의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나 신비한 힘이 깃든 보물 같은 건 거기에 없었다. 보물이라는 말과 얽힌 기억이라고는 어머니나 엘리너가 종종 사용하던 비유적인 표현밖에 없었다.


이를테면 ‘아가, 너는 세상 하나뿐인 귀한 보물이란다.’와 같은, 자식을 지극히 사랑하는 부모라면 누구든 입에 올리는 흔한 말이었다.


“그래서 그 보물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재생과 번영의 피리, 라고 들었네.”


라무스는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폴루스 니두스에 피리라고는 어머니와 함께 불었던 풀피리나 버들피리밖에 없었다. 진짜 피리가 아니라 말 그대로 지천으로 널린 풀이나 잎을 뜯어서 혹은 버드나무의 심을 빼낸 원통형 껍질을 다듬어서 부는 것이었다.


시데레온의 명물 악기는 리라였다. 나무로 만든 공명판에 현을 일곱 줄 혹은 열 줄을 매어 만드는 악기로 티토니아 전역에 널리 퍼져 있었다. 이렇듯 라무스가 아는 한 치유와 번영의 피리인지 하는 것과 시데레온 사이에는 유의미한 연결점이 없었다.


“피리라……. 무엇으로 만든, 어떻게 생긴 피리라는 겁니까?”


“그걸 누가 알겠나? 그런 피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라크리모 가 사람들조차 생김새가 어떤지는 모를 걸? 실제로 본 적이 없을 테니 말이야. 한마디로 같잖은 일이지.”


콤메르가 커다랗게 코웃음 쳤다.


“정말 그럴까요?”


“뭐라고? 지금 내 말을 못 믿겠다는 건가?”


퉁방울눈을 구슬처럼 번뜩이며 콤메르가 식탁에 팔을 올리고 상체를 디밀었다.


“당신을 못 믿겠다는 게 아니라 당신이 누군가에게 샀을 그 정보에 허점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정당한 의문을 품은 겁니다.”


냉철한 대답을 예의 바르게 내놓으며 라무스는 한층 가까워진 콤메르의 눈을 정면으로 들여다보았다.


“말을 제법 잘하는군. 이거 좋군, 좋아. 역시 내 식탁에 초대받을 자격이 충분해. 무슨 말인지 알겠네. 하지만 나는 그 정보가 정확하다고 생각하는 입장이야. 피리 같은 건 없어. 만약 나중에라도 자네가 이 정보가 틀렸다는 증거를 가져오면 내가 그에 대한 보상을 하지.”


콤메르는 자신만만했다. 라무스는 작은 끄덕임으로 그의 의사를 수용했다.


“단주님께서 나에게 보내신 편지에 뭐라고 쓰셨는지 자네 혹시 알고 있나?”


“아니오. 편지를 전하라는 명 외에 다른 말씀은 없으셨습니다.”


“자네가 다시 루나리아의 녹스 성채로 돌아오는 날까지 티토니아 전역에 흩어져 있는 내 소유의 여관과 말을 이용할 수 있도록 편의를 봐주라는 내용일세. 이번에 아주 중차대한 임무를 맡은 모양이군. 꼭 완수해서 단주님의 기대와 신뢰에 보답해 드리기를 바라네.”


라무스가 안식년을 받았음을 알 턱이 없는 콤메르가 어깨까지 두드리며 격려했다. 라무스는 어색한 미소로 얼버무렸다.


곧 먼길에 오를 시간이었다. 콤메르가 생각하는 그런 중차대한 임무는 아니지만 라무스 개인에게는 비할 데 없이 중차대한 여정이 될 터였다.


첫 목적지는 어머니가 계신 곳이었다. 라무스의 마음속에는 오직 어머니만이 답할 수 있는 질문이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어머니가 염려되고 그리웠다.


*


추적추적 겨울비가 내리는 오후였다. 시스는 벽난로 앞에서 페로와 장난치며 놀다 까무룩 낮잠에 빠졌다. 그리고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시스는 처음 보는 아름다운 온실을 거닐고 있었다. 커다란 창문이 사방에 나 있는 온실은 이중 구조의 벽 사이로 뜨거운 연기를 흘려보냄으로써 겨울에도 식물이 자랄 수 있는 온도를 유지하는 방식이었다.


창으로는 햇빛이 한가득 비쳐들지만 창밖 뜰 가에 소도록이 쌓인 눈이 보였다. 안쪽 네 벽 바로 아래를 따라 흐르도록 만들어 놓은 작은 도랑에는 맑은 물이 졸졸 흘러들고 흘러 나갔다. 그리고 감상하기 좋게 배치된 푸른 잎, 색색의 꽃들, 은은하거나 상쾌하거나 달콤한 향기.


‘매우 호화로운 취향이군.’


시스는 흰색과 청보라색 꽃이 핀 천조초 무리 앞에 멈춰 섰다. 하늘하늘한 꽃잎과 청초한 자태가 마음에 들었다.


‘방에 장식하고 싶은데 허락 없이 꺾어도 되려나?’


혹시라도 온실의 주인이 있나 싶어서 시스는 제자리에서 한 바퀴 빙 돌면서 구석구석 찾아보았다.


‘아무도 없네. 여긴 어딜까? 누구네 온실일까?’


‘쯧쯧쯧!’


누군가가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 시스는 퍼뜩 고개를 돌렸다.


‘마음대로 꺾어. 꺾고 싶은 만큼 다 꺾어. 여긴 네 꿈속이니 아무 문제될 것 없거든.’


시스가 꿈을 통해 만날 수 있는 꿈마녀다. 그녀는 이미 붉디붉은 아마릴리스를 잔뜩 안고 있다. 그리고 귀밑머리 위에 한 송이, 허리띠에 한 송이 꽂았다. 귀기가 돌도록 창백한 얼굴이 붉은 꽃의 기운으로 얼마간 화사해 보이기도 하고 요염해 보이기도 한다.


‘어? 백작 부인.’


‘약속 잘 지키네?’


시스가 백작 부인으로 불러준 것이 흡족해서 꿈마녀는 활짝 웃는다.


‘꿈인 건 알겠고, 그래서 여기가 어딘데?’


천조초 몇 줄기를 꺾으면서 시스가 묻는다. 꿈이니까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곳일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시스의 직감으로는 아무래도 현실에 존재하는 곳 같았다.


‘어디긴 어디야? 프레케스 공작네 저택에 딸린 온실이지.’


‘저택에 온실은 없는데?’


어느새 창가에 가 있는 꿈마녀가 머리를 갸웃거리는 시스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한다. 시스는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 창 바깥을 내다본다.


‘정말 프레케스 가의 저택이네? 저기가 내가 지금 자고 있는 방이야!’


건너편 이층을 가리키며 시스가 깜짝 놀라 외친다.


‘그럼 여기는 창고여야 하는데?’


시스가 꿈마녀를 보며 중얼거린다. 꿈마녀는 잘난 체할 때면 짓곤 하는 도도한 웃음을 머금는다. 그녀는 지금 속계산 중이다. 이 온실에 대한 얘기를 들려주는 대신 시스에게서 무얼 받아내면 좋을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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