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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잉걸불을 품은 아이

by 화진


파보르의 거처는 성채 안에서도 가장 깊숙한 지점에 있었고 비밀스러운 구조였다. 현관을 지나 넓은 복도를 따라가야 나오는 그의 방은 두 겹의 석조 벽과 한 겹의 두터운 나무 벽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숨겨진 비밀 통로가 여러 개였다.


라무스가 노크를 하자 안에서 ‘누구냐?’ 하고 묻는 소리가 들려왔다.


“라무스입니다.”


“잠깐 기다리거라.”


카펫 위를 걸어오는 발소리가 느릿느릿 가까워지더니 걸쇠를 벗기는 소리가 뒤를 이었다. 파보르는 혼자 있을 때 거의 안에서 걸쇠를 걸어 놓았다.


“들어오너라.”


문이 열리고 살집이 없어 더욱 엄격한 인상을 주는 노인의 얼굴이 빼꼼 나타났다. 라무스는 성큼 방안으로 들어섰다. 책상과 벽감을 비롯해 곳곳에 밝혀 놓은 촛불과 웅장한 벽난로에서 타는 장작불 덕분에 방안은 무척이나 환했다.


“이리로 오렴.”


파보르가 라무스를 벽난로 앞의 석제 탁자로 이끌었다. 따스한 기운이 감도는 곳이었다. 파보르는 탁자 위에 흩어져 있던 자작나무 껍질로 된 옛날 문서 뭉치를 모아서는 창 옆에 있는 커다란 책상의 서랍에 넣었다.


오래된 자작나무 껍질 문서를 보는 라무스의 눈에 순간적으로 향수가 어렸다. 저렇게 크고 튼튼한 껍질을 두른 자작나무는 시데레온의 특산이었다. 오늘날 귀족이나 부자들은 진짜 종이를 쓰지만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아직도 자작나무 껍질이 종이를 대신하는 경우가 많았다.


“자, 이것 좀 마셔 봐라.”


에일을 가득 따른 커다란 잔 두 개를 가져온 파보르가 하나를 라무스에게 내밀었다. 파보르는 에일을 유난히 좋아하여 자주 저녁 식사를 에일로 대신했으며 심지어 에일을 직접 빚기도 했다.


라무스는 사양하지 않고 잔을 받아서는 3분의 1가량을 입을 떼지 않고 마셨다. 그 모습을 보고야 파보르도 잔을 입으로 가져가 꿀꺽꿀꺽 에일을 들이켰다.


“이번에는 제대로구나.”


입가에 묻은 에일을 소매로 아무렇게나 훔치는 파보르의 얼굴에 엷디엷은 웃음기가 얼핏 스쳐갔다. 파보르를 아주 잘 아는 이들만이 알아채겠지만, 이 정도면 그는 몹시 기쁜 것이다.


“긴히 말씀드릴 일이 있어서 왔습니다.”


“그렇겠지. 말해 봐라.”


“안식년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대장께서 스승님의 허락을 받으라고 하셔서요.”


네우테르는 ‘보고하라’고 했지만 그 말에는 용병단의 단주 파보르가 반대할 시 자신의 수락은 무효라는 속뜻이 숨어 있었다.


“안식년이라고 했니?”


흐흠, 의미를 알 수 없는 짧은 감탄사를 토해낸 파보르가 침묵에 잠겼다. 타닥타닥, 벽난로의 마른 나무 타는 소리를 들으며 라무스는 파보르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파보르는 라무스에게 학문적 소양을 길러준 스승이었다. 그는 이따금씩 용병단에 들어온 소년병들 중에서 총명하다 싶은 아이를 선별해 공부를 가르쳤다. 소수의 제자들 가운데서도 파보르에게 스승으로서의 보람을 가장 크게 안겨준 아이가 라무스였다.


소년병들은 대부분이 고아였다. 부모를 잃었거나, 부모에게 버려졌거나. 그리고 그들 중 대다수는 허기와 위험과 외로움으로부터 벗어났다는 사실에 만족했다. 지적인 호기심을 가진 그리고 지식이 주는 쾌감을 아는 아이는 지극히 드물었는데 라무스는 그런 아이였던 것이다.


라무스는 티토니아의 역사와 고대문자 해독을 비롯하여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파보르로부터 전수받았다. 역사 공부에 대해서는 라무스가 파보르에게 특히 고마워하는 점이었다. 거기에 자신의 뿌리인 시데레온과 게르미노의 내력도 포함되어 있었으니까.


“네가 결심했고 네우테르가 받아들였으면 얘기는 끝난 것이지.”


방문 옆에 던져둔 라무스의 짐을 힐긋 보고나서 파보르는 다시 에일 잔을 들어 남김없이 마셔 버렸다.


과연 안식년이 말 그대로 안식년으로 끝날 수 있을까? 너는 돌아올까?


처음 라무스를 봤던 날부터 파보르는 막연하게 느끼고 있었다. 이 아이는 언젠가 떠날 아이라고, 가슴속에 잉걸불을 품은 아이라고. 잉걸불에 불쏘시개가 날아들어 불길이 맹렬해지는 날이 오면 불의 시원을 찾아가지 않고는 못 배길 거라고.


“어디서 날아왔을까? 그 불쏘시개가…….”


자신의 잔에 다시 에일을 따르던 파보르의 입에서 속엣말이 흘러나오고 말았다.


“예? 뭐라고 하셨습니까?”


“잠시 다른 생각을 하다 말이 헛나왔구나. 신경 쓰지 말거라. 그건 그렇고. 이미 날이 저물었는데 길을 나서려고?”


“달빛에 의지해서 밤의 반 정도를 말 위에서 보내면 남생이 여관이 나올 테니 괜찮습니다.”


막상 결정하고 나니 마음이 분주해졌다. 라무스는 한시도 지체하고 싶지 않았다.


남생이 여관은 미르 강을 끼고 있는 남생이 나룻목에 자리 잡고 있었다. 남생이 나룻목은 육로와 강로를 통해 가깝게는 루나리아와 텔룸, 멀게는 페르베아투의 카푸로도 이어졌다.


교통 요충지에 위치한 남생이 여관은 줄곧 녹스 용병단과 공생 관계였다. 녹스 용병단은 여관의 질서와 안전을 지켜주고, 남생이 여관은 용병단이 필요로 하는 편의를 최우선적으로 제공했다.


“남생이 여관이라, 그렇구나.”


파보르는 그저 수긍했다. 무엇을 위해 어디로 가는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묻지 않았다. 대답을 듣지 못할 것이 뻔하거니와 따지고 보면 부질없는 궁금증일 뿐이었다.


‘그 여관의 주인 콤메르에게는 부업이 있지. 정보를 사고파는. 라무스, 나의 제자야. 너는 무엇을 알고 싶기에 이 스승에게조차 묻지 못한단 말이냐. 네 가슴 속의 불길이 얼마나 비밀스러운 것이기에.’


“이만 가 봐야겠습니다. 차가운 에일 너무 많이 드시지 마시고 식사를 제대로 챙기세요. 햇빛도 좀 자주 쏘이시고요.”


창백하고 강파른 파보르를 향해 라무스가 진심 어린 인사를 했다.


“잠깐 기다려라. 내가 마침 콤메르에게 편지를 쓸 일이 있었는데 너한테 맡기면 되겠구나.”


창 옆의 책상으로 간 파보르가 짧은 편지를 써서 밀랍 봉인을 해 라무스에게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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