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데레온으로 가셔야 합니다. 어긋난 진실과 일그러진 정의를 바로잡으셔야 합니다. 그것이 도련님의 사명입니다. 돌아가신 공작님의 희생을 헛되이 하지 마십시오.’
‘그 전에 우선 모친을 만나십시오. 분명 그분께서 도련님을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기다림의 애절함을 보람으로 만들어 드리십시오.’
용병단의 본거지가 있는 루나리아로 돌아가는 길 내내 라무스의 머릿속에서는 토드 경의 간곡한 권고가 불쑥불쑥 되살아나곤 했다.
시데레온의 라무스 유바론은 공식적으로는 행방불명 상태인 동시에 수배자였고, 비공식적으로는 죽은 사람으로 취급되었다. 녹스 용병단의 라무스 라디우스에서 시데레온의 라무스 유바론으로 다시 돌아가는 여정은 더없이 험난하고 복잡할 터였다.
복수는 수도 없이 꿈꾸었으나 그 이상의 원대한 계획 같은 건 없었던 라무스였기에 마음을 정하기는 쉽지 않았다. 루나리아에 도착하고서야 라무스는 겨우 마음을 정했다. 일단은 어머니를 만나야겠다고. 다른 건 어머니를 만난 연후에 결정하자고.
녹스 성채에 도착한 라무스는 곧장 대장의 방으로 향했다. 창가에 서서 소년병들의 검술 훈련을 지켜보던 네우테르는 라무스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손짓으로 책상을 가리켰다. 칠을 하지 않은 낡은 나무 책상 위에는 양피지와 깃펜이 준비되어 있었다.
라무스는 다피넬의 집에서 본 청금석에 새겨져 있었던 그림과 고대문자를 양피지에 거의 똑같이 모사해냈다.
“완성했습니다.”
“거기 갑에 넣고 잠그도록.”
네우테르의 지시대로 라무스는 양피지를 말아서 목갑에 넣고 자물쇠를 잠근 다음 열쇠를 통 옆에 놓고 일어섰다.
“수고했다.”
책상 앞으로 온 네우테르는 목갑을 밀랍으로 봉인했다.
“우리 녹스 용병단 식구들 중에 누가 이 임무를 맡았는지 의뢰인은 모른다. 그러니까 네가 이것 때문에 성가신 문제에 휘말리는 일은 없을 거다.”
어느 결에 여러 줄이 된 눈가 주름이 네우테르의 날카로운 눈매를 조금 가려주고 있었다. 왼쪽 턱의 윤곽을 따라 그어진 흉터 역시 주름처럼 보이기도 했다. 라무스는 지금과는 달랐던 네우테르의 첫인상을 떠올렸다. 그때는 먹이의 숨통을 물어뜯기 직전의 맹수 같았는데.
“알겠습니다. 그리고…… 따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말해 봐.”
“안식년을 주셨으면 합니다.”
“안식년을? 하긴 그동안 너무 스스로를 몰아붙인다 싶을 만큼 열심히 해줬지. 허락하겠다. 단주님께는 네가 보고 드려라.”
네우테르는 라무스를 조용히 응시했다. 사실은 방금 소년병들을 보면서 라무스가 겹쳐 보였었다. 솜다리 여관에서 상인을 가장한 인신매매꾼에게 납치될 뻔한 소년 라무스를 구해서 용병단으로 데려온 사람이 바로 네우테르였다.
슬픈 눈빛의 과묵한 소년에게 네우테르는 제안했다. 혹시 나와 같이 가겠니? 소년이 말했다. 거기가 어딘데요? 용병단이란다. 그럼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겠네요. 당연하지.
그 소년이 자라 녹스 용병단의 최정예가 된 것이다. 또한 용병단의 단주 파보르가 가장 아끼는 제자이기도 했다.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단주님께는 지금 바로 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디 멀리 갈 사람의 눈빛이로구나.”
라무스는 대답을 대신해서 옅은 웃음을 띠었다. 네우테르가 손을 내밀었고 두 사람은 굳은 악수를 했다.
“밤의 여신이 너를 지키고 새벽의 여신이 너를 인도하실 게다.”
녹스는 밤의 여신이었다. 따라서 녹스 용병단은 밤의 여신의 수호를 받는 용병단이라는 의미였다.
네우테르의 방을 나온 라무스는 자신의 거처로 갔다. 간단하게 여장을 챙겨 바깥으로 나오니 황혼이 금빛 휘장을 막 거두는 참이었다. 따뜻한 빛이 물러가는 성벽에 서늘한 어스름이 차올랐다.
“라무스! 언제 돌아온 거야?”
쾌활한 목소리와 함께 뛰어오는 발소리가 바닥을 울렸다.
“좀 전에. 그건 그렇고. 뭐 좋은 일이라도 있나, 레미? 너답지 않게 깔끔해져서 못 알아볼 뻔했잖아.”
부스스하고 텁수룩하던 머리와 수염을 깨끗이 다듬은 레미수스를 라무스가 낯설고 미심쩍게 쳐다봤다.
“좋은 일? 있지, 있어. 마침 잘 만났군. 자, 가자고.”
“어딜?”
“어디긴 어디야. 부엉이 주점이지. 내가 오늘 로사를 웃게 만들 거거든.”
로사는 부엉이 주점의 딸로 윤기 흐르는 갈색의 풍성한 머리를 옆쪽으로 땋아 내리고 늘 쌀쌀맞은 낯빛을 하고 있는 처녀였다. 그녀의 환심을 사려는 손님은 많았지만 그녀가 웃을 때 왼쪽 뺨에만 팬다는 매력적인 볼우물을 제대로 목격한 손님은 거의 없었다.
소문만 무성한 로사의 볼우물을 두고 주점의 손님들은 내기를 걸기도 했다. 이번에는 레미수스도 내기에 한 다리를 걸친 모양이었다.
“아쉽지만 난 못 가. 바로 다시 떠나야 해서.”
라무스는 걸머메고 있던 짐을 가리켰다.
“뭐야? 방금 왔는데 또 임무를 줬어? 위에서 널 인정하는 건 알지만 이건 너무 혹사시키는 거 아냐?”
“행운을 빌어, 레미. 어서 가 봐. 늦으면 큰일이잖아.”
안식년을 얻었다는 말을 하지 않은 채 라무스는 레미의 등을 떠밀었다. 레미가 나중에 알게 되든 끝까지 모르든 그건 둘 다에게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이번엔 얼마나 걸리는 일인데?”
걸음을 재촉하던 레미가 문득 뒤를 돌았다.
“꽤 오래.”
팔짱을 낀 채 라무스를 건너다보던 레미의 얼굴에 잠깐 심각한 기색이 드리웠으나 그는 이내 심각함을 지워 버리고 장난스럽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여신의 가호가 있기를. 돌아오면 보자고.”
레미의 뒷모습이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자 라무스는 짐을 한 번 추어올려 고쳐 메고 파보르의 거처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