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41. 오해가 아니라 증오

by 화진


“아이들을 따라 다시 큰길로 나왔는데 낯선 곳이었습니다. 주위를 둘러보느라 저만치에서 달려오는 말의 진로를 막고 있다는 걸 몰랐어요.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늦어서 꼼짝없이 말과 충돌하는구나 싶어 눈을 감아 버렸는데 그 순간 누군가가 나를 잽싸게 당겨서 안고 넘어졌고 다행히 말은 살짝 비껴갔지요.”


처음 듣는 이야기였지만 다피넬은 데세르를 누가 도와줬는지 알 수 있었다. 말리티아.


데세르의 표정은 기막힌 우연을 재미있어하는 듯했지만 다피넬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치밀하고도 의도적인 포착이었다. 말리티아라면 저토록 절묘한 기회를 잡기 위해 꽤 오래 데세르를 감시하며 기다리고도 남음이 있었다.


“정말이지 상냥하고 친절했어요. 보답하고 싶다고 했지만 거절하더군요. 내가 다치지 않은 것으로 충분히 기쁘다고 하면서 작별을 고하고 가버렸습니다. 레투스는 그녀가 가고 나서야 나를 발견해서 그녀를 못 봤고, 나는 그녀를 다시 보게 되는 일 같은 건 없을 줄 알았습니다. 처음으로 어머니도 레투스도 모르는 나 혼자만의 비밀이 생겨서 기분이 좋았고요.”


다피넬은 겉으로는 미소 짓고 속으로는 독설을 늘어놓았다. 그녀가 상냥하고 친절했다고? 그렇겠지, 어련했을까, 교활하기 짝이 없는 노친네가. 말리티아는 본디 그렇단다. 대개는 그렇게 달콤할 정도로 다정하고 보드라운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있지.


“그녀와 다시 마주치고 누구인지 알게 된 건 지난해의 여름이었습니다.”


“지난여름? 어디에서?”


“동쪽 숲의 연못가에서 그림을 그리다가요.”


다피넬은 왕에게 예물을 보내는 일을 감독하느라 하루 종일 저택을 비웠던 날을 떠올렸다. 원래 아바루스 왕의 요구는 다피넬과 데세르가 직접 예물을 가지고 카푸의 왕궁을 방문하는 것이었다. 요컨대 시스의 남편감을 직접 봐야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피넬로서는 수용할 수 없는 요구였다. 데세르의 건강 때문이었다. 카푸는 너무 멀었다. 오고 가는 여정 동안 병약한 몸에 피로까지 누적되면 무슨 불상사가 생길지 몰랐다.


어쩔 수 없이 다피넬은 그럴듯한 핑계를 지어내어 카푸 방문을 거절하는 대신 예물의 규모를 두 배로 상향하겠다는 사과의 편지를 보냈다.


아바루스 왕은 다피넬의 제안을 수락했다. 기실 왕은 시스의 남편감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다. 그저 형식적인 요구로 권위를 세우고 싶었을 뿐. 그리고 그가 원했던 권위는 다피넬이 추가로 내어놓은 금화와 보석들로 충족되었다.


“연못 풍경을 스케치하다가 나무 뒤에서 바라보는 그녀를 발견했습니다. 반가워서 알은체하며 어째서 여기에 있는지 물었지요. 그랬더니 저택 쪽을 가리키며 자신의 딸이 저기에 살고 있다고, 먼발치에서라도 보고 싶어서 왔다는 겁니다.”


데세르는 그 딸이 자신의 어머니일 거라는 예상은 털끝만큼도 하지 못했다. 저택에서 일하는 시녀나 하녀 가운데 하나일 거라고 추측했었다.


다피넬은 나오려는 냉소를 간신히 참고 미간에 힘을 주었다. 잘도 딸을 그리워하는 불쌍한 어머니를 시늉했겠지.


“함께 저택으로 가자고 했더니 묻더군요. 혹시 다피의 아들이냐고.”


다피는 보니타가 부르던 애칭이었다. 말리티아는 단 한 번도 그렇게 불렀던 적이 없었다. 다피넬의 입에서 기어코 혼잣말이 튀어 나왔다.


“그 이름은 그녀의 입에서 나와서는 안 돼.”


다피라는 이름은 나의 보니타만이 부를 수 있어. 다피넬은 사랑하는 남편에게조차 그 애칭을 사용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었다.


“그녀가 덧붙였습니다. 자신이 내 어머니의 어머니라고. 말리티아라고 부르라고. 불운한 사고가 있었고, 가족들은 그녀가 그 사고로 죽은 줄 알고 있지만 사실은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고 했습니다. 돌아오지 못할 만한 사정이 있었다고요.”


“왜 그때 바로 알려주지 않았지?”


“아직은 알리지 말아 달라고 말리티아가 간절하게 부탁했으니까요. 모녀 사이에 오해가 좀 있다고, 여기까지 와 놓고도 막상 얼굴을 마주하려니 망설여진다고 했습니다. 그러더니 나중에 다시 오겠다고 하고 떠났습니다.”


“오해라고 했단 말이지…….”


오해가 아니라 증오였다. 다피넬은 말리티아를, 말리티아는 다피넬을 증오하고 있었다. 다피넬은 보니타의 죽음이 전적으로 말리티아의 책임이라고 생각했고, 말리티아는 보니타를 잃은 게 다피넬의 탓이라고 여겼다.


“그날 이후로 소식이 없다가 얼마 전에 편지가 왔습니다. 타키툼 북쪽 관문 마을에 있다고. 답장을 써서 초대했더니 응하겠다는 답이 왔고 말입니다.”


데세르와 말리티아 사이에서 오간 대화가 이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보다 중요한 밀담이 있었지만 데세르는 말하지 않았다. 그 밀담을 다피넬에게 숨기자는 데 대해서는 말리티아와 데세르의 의견이 완전히 일치했다.


“데세르. 이상하게 들릴 것을 알면서도 해주지 않으면 안 될 얘기가 있다. 그래, 말리티아에 대해서야.”


고심하던 다피넬이 무거운 숨을 토해냈다.


“말씀해 보세요.”


“그녀는…… 좋은 사람이 아니야. 아니 그 이상이지. 가까이해서는 안 돼. 모르고 보면 한없이 선량하고 다정한 사람이지만,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지만, 그녀의 실체는 가까운 사람들을 해치는……. 그녀는 나쁘단다, 아주, 아주. 그러니까 그녀와 친밀하게 지내서는 안 돼. 정말 안 돼. 데세르, 약속해 다오. 그녀와 거리를 유지하겠다고. 응?”


다피넬이 절실하게 애원했다.


“서로 오해가 있다고 하더니 생각보다 심각한 오해인가 봅니다, 어머니.”


데세르가 가볍게 웃자 다피넬이 데세르의 두 손을 꼭 잡고 한 번 더 부탁했다.


“제발, 부탁이다. 말리티아를 믿지 마, 데세르. 사람들을 속이는 게 그녀의 천성이야.”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데세르가 다피넬을 안심시키는 말을 해줬다.


“알겠어요, 어머니.”


그 대답이 건성임을 모를 다피넬이 아니었다. 꺼림칙한 예감이 다피넬의 목덜미를 선득하게 움켜쥐었다.


keyword
이전 10화40. 보니타 그리고 말리티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