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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보니타 그리고 말리티아

by 화진


자신의 침실로 돌아온 다피넬은 가장 안쪽에 있는 옷장을 열었다. 옷장 깊숙이에 놓인 튼튼하고 큰 보석함을 꺼낸 다피넬은 침대로 가 앉았다. 그러고는 목걸이를 벗어 거기에 달려 있던 열쇠로 보석함을 열었다.


손수건 한 장과 로켓팬던트를 다피넬은 슬픈 빛으로 내려다보았다. 은제 로켓팬던트는 다피넬이 꺼내 보지 않은 동안 거무스름하게 변색되어 있었다. 손수건에 수놓인 부엉이는 커다란 황금빛 눈으로 다피넬을 마주 보았다.


부엉이는 다피넬이 프레케스 공작과 결혼하기 전의 성씨였던 포르투나 가문의 문장이었다. 보니타는 부엉이를 좋아해서 자신의 손수건과 옷에 자신의 이름과 함께 부엉이를 수놓기를 좋아했다.


다피넬은 로켓팬던트를 꺼내서 열었다. 양쪽에 하나씩 두 소녀의 초상이 들어 있었다. 한 소녀는 손수건의 부엉이와 같은 황금빛 눈이었고 한 소녀는 옅은 푸른빛이 도는 잿빛 눈이었다. 두 소녀는 조금씩 다른 눈과 코와 입을 가졌으나 전체적으로 닮아 보였다.


당연히 닮을 수밖에 없었다. 둘은 쌍둥이였으니까. 그러나 쌍둥이치고는 꽤 다르게 생긴 편이었다. 성격도 퍽 달랐다. 황금색 눈을 가진 보니타는 지혜롭고 용감하고 활달했고, 청회색 눈을 가진 다피넬은 진중하고 소심했다.


“보니타, 보니타. 나의 언니 보니타.”


이 이름을 얼마 만에 불러 보는 것인지…….


잊으라고. 잊고 살아가라고. 그래야 네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보니타가 간절히 당부했기 때문이지만 막상 이렇게 보니타의 초상을 마주하니 다피넬은 미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로켓 속 두 소녀의 얼굴이 동시에 눈물로 얼룩졌다.


자신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걸 몰랐던 다피넬이 황급히 소매로 얼굴을 훔치고 로켓에 떨어진 눈물을 닦았다. 약해져서는 안 된다고, 이래서는 아무것도 지키지 못할 거라고 스스로를 나무랐다.


“보니타. 나에게 용기를 줘.”


죽은 줄만 알았던 말리티아가 살아 돌아왔으니 마음을 아주 단단히 먹어야 할 일이었다. 그녀가 무슨 속셈을 가지고 데세르에게 접근했는지 다피넬은 불길하고 조마조마했다.


다피넬은 보니타의 손수건을 어루만지며 행복했던 순간들을 떠올렸다. 함께 태어난 평생의 친구를 가졌다는 건 정말 행운이라고 보니타는 말하곤 했었다. 보니타가 자신을 희생하고 난 후부터 다피넬은 생각하곤 했다. 결과적으로 그 행운은 자신에게만 해당이 되었다고.


보니타는 다피넬을 위해 자신의 전부를 내어 주었으니까. 목숨까지도.


“우리 둘의 행복했던 기억까지 잊고 싶지는 않아. 그런데 우리의 행복한 기억은 어쩔 수 없이 고통스러운 기억과도 이어져 있어. 내가 진정으로 강해지려면, 고통스러운 기억이라는 괴물이 사납게 날뛰지 못하도록 나 자신을 잡아먹지 못하도록 길들이고 제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걸 깨달았어. 그러니까 보니타, 이제부터 나는 진짜로 강해져 볼게.”


로켓 속 보니타에게 다짐을 두는데 노크 소리가 났다. 데세르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어머니.”


다피넬은 황급히 로켓팬던트와 손수건을 보석함에 넣고 이불 속으로 밀어 넣었다.


“들어와도 돼.”


데세르가 들어오고 그 뒤를 마르타가 따랐다. 마르타는 간단히 요기할 만한 음식을 담은 그릇을 올린 쟁반을 들고 있었다. 마르타는 창가의 둥근 다탁에 음식 쟁반을 내려놓고 다피넬과 잠시 눈을 맞추고는 이내 방을 나갔다.


“이리 오셔서 좀 드세요.”


다탁에 자리 잡은 데세르가 온화한 낯으로 다피넬을 청했다. 다피넬은 표정과 매무새를 가다듬고 데세르의 맞은편으로 가 앉았다.


뭘 먹을 기분은 아니었지만 다피넬은 부드러운 빵을 잘게 찢어 감자우유수프에 찍어서 입에 넣었다. 억지로라도 기운을 내야 할 때였다.


“말리티아라니……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얘기해 주겠니?”


물로 입을 헹구고 나서 다피넬은 최대한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운을 뗐다. 말리티아는 다피넬이 열여덟 살이었던 여름에 죽었다. 따라서 데세르에게 말리티아는 자신의 가계도에 등장하는 모계 조상의 이름일 뿐이었다.


분명 그러했는데 느닷없이 오늘 저녁 데세르의 말속에 그 말리티아가 살아 있는 인물로 등장한 것이다. 다피넬은 말리티아가 진짜가 아닐 가능성도 조심스레 경우의 수에 포함시켰다.


“진작 말씀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어머니.”


“진작이라면…….”


도대체 언제부터라는 걸까, 말리티아와 연락이 닿은 시기가.


“실은 처음에는 누구인지 몰랐습니다. 카수스에서 우연히 마주쳤었죠.”


카수스에는 온천이 있었다. 다피넬이 거기에 별장을 마련한 것은 온천이 데세르의 요양에 좋을 거라는 주위의 조언 때문이었다. 다피넬과 데세르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겨울철이면 타키툼보다 따뜻한 카수스에 가서 온천을 하며 지내곤 했었다.


“어머니 몰래 레투스와 둘이서 마을 구경을 갔었던 날 말입니다.”


“아, 그날이었구나.”


예상보다 더 오래 전의 일이어서 다피넬은 흠칫 놀랐다. 그때 데세르는 열두 살이었고, 낮잠에서 깬 다피넬은 데세르가 없어진 사실에 불같이 화를 냈다. 그리고 저물녘이 되어서야 별장으로 돌아온 데세르와 레투스를 혼이 쏙 빠질 만큼 무섭게 혼냈다.


“술래잡기 하는 마을 아이들을 뒤따라서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가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나도 레투스도 길눈이 밝은 편은 아니었죠. 길을 잃었다는 걸 알면서도 즐겁게 노는 아이들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고.”


눈을 뗄 수 없었을 그 마음을 알겠어서 다피넬은 가슴이 아팠다. 데세르는 그렇게 여러 명의 또래와 어울려 뛰어다니고 장난치며 놀아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허약했으니까, 그래서 늘 과보호 아래에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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