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일이었다니…… 안타깝구나.”
이 말을 끝으로 다피넬은 입을 다물었다. 하고 싶었던 말은 다 했고, 둘 사이는 애초에 소소한 정담 따위를 나눌 만큼 원만하지 않았다. 분위기는 한층 더 무겁게 가라앉아 버렸다.
다피넬은 어떻게 해야 시스를 데세르의 진정한 아내로 만들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신기하고 희망적이게도 시스가 오고부터 데세르의 병세는 큰 차도를 보이고 있었다. 시스와 다투면 병세가 즉시 악화했지만 오래지 않아 다시 진정되었다.
시스 또한 다피넬과의 어색한 대화 대신 침묵을 택했다. 시스는 벽난로 속의 불꽃을 물끄러미 건너다보며 언제 어떻게 이 저택을 빠져나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할지에 대한 궁리에 빠져들었다.
모래알 몇 개가 들어간 신발을 신고 있는 듯 거북한 시간은 느리고 지루하게 흘렀다. 문 저편에서 ‘공작님 드십니다.’라고 외치는 시종장의 목소리가 들려왔을 때 다피넬은 멈추었던 시간이 다시 흐르는 느낌이었다. 시스도 마침내 저녁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는 기쁨에 젖었다.
한 묶음의 꽃을 든 데세르가 조금 상기된 얼굴로 들어왔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 그가 다피넬에게 가볍게 목례하고는 시스에게로 왔다.
“당신을 위해 특별히 부탁해서 구한 꽃이오.”
흰색과 노란색의 수선화 다발을 내밀면서 데세르가 활짝 웃었다. 그 웃음이 어쩐지 꺼림칙하여 시스는 선뜻 꽃을 받지 못했다.
시스는 줄곧 데세르를 타인처럼 대해왔다. 그와의 마주침이나 대화를 일부러 피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손길이나 키스는 철저히 거부했다. 그는 매번 보석이나 드레스 같은 선물을 들고 미풍처럼 다가왔다 시스의 초연하고 단호한 거절에 폭풍처럼 격분하기를 되풀이하고 있었다.
폭풍 같은 분노보다 미풍 같은 접근에 시스는 더 싫증이 났다. 오늘의 웃음은 특히나 그러했다. 너무 쾌활하고 강렬해서 소름이 돋을 것 같았다.
“때로는 보석보다 꽃이 더 환영받기도 하는 법이라더군.”
데세르가 친절한 말과 함께 꽃을 시스의 손에 닿을 정도로 가까이 들이밀었다. 시스는 무덤덤하고 가벼운 태도로 꽃을 받았다. 아직 그녀는 데세르를 증오하는 건 아니었다. 치가 떨린다는 쪽보다는 측은하다는 쪽이었다.
“덕분에 이 겨울에 싱싱한 수선화를 다 보는군요.”
시스는 은은한 향을 뿜는 수선화에 잠시 눈길을 준 뒤 식탁 모퉁이에 내려놓았다. 그 모습을 보고 나서 데세르는 자신의 자리로 가 앉았다.
곧 시종장과 마르타가 음식을 날라 왔다.
배가 고팠던 시스는 월귤꿀잼을 곁들인 흰빵을 먹기 시작했다. 데세르도 과일 향 강한 와인에 재웠다 구운 부드러운 양고기를 요리사의 솜씨를 칭찬해 가며 먹었다. 다피넬만은 지금이 식사 시간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은 사람처럼 멍하니 있었다.
“저 꽃을…… 어디에서 구했다는 거지? 우리는 온실을 가지고 있지 않은데.”
수선화에 붙박인 다피넬의 두 눈에 미심쩍은 빛이 서려 있었다. 프레케스 저택에 원래부터 온실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다피넬이 남편인 키테르에게 부탁해 없애 버렸다.
“말리티아가 보내준 거예요.”
데세르의 말에 다피넬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사라졌다. 창백해진 다피넬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듯한 표정으로 머리를 자꾸만 갸웃거렸다. 그러나 데세르는 다피넬을 신경쓰지 않았다. 그의 관심은 시스가 옆에 둔 꽃다발에 가 있었다.
꽃과 시스를 번갈아 쳐다보던 데세르가 옆에 서 있던 시종장에게 지시했다.
“넬리사를 불러서 꽃을 화병에 꽂아 시스의 방에 가져다 두라고 해.”
“알겠습니다.”
넬리사가 와서 수선화 묶음을 조심스레 안고 나가자 다피넬이 시종장을 향해 나가 있으라는 눈짓을 했다. 식당에 남은 사람은 다피넬과 데세르, 시스뿐이었다.
“누……구? 수선화를 보낸 사람이 누구라고?”
차라리 자신이 잘못 들었기를 바라며 다피넬이 재차 물었다.
“말리티아라고 했습니다.”
“그렇구나. 그런데, 그녀가 어디에서 꽃을 보낸 거지?”
다피넬은 대리석으로 만든 조각처럼 굳어 있었다.
시스는 화이트와인을 마시며 다피넬을 훔쳐보았다. 말리티아가 누구기에 다피넬이 저토록 당황하는 걸까? 궁금했지만 자신이 끼어들 상황은 아니었다.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와 있어요. 곧 만나게 되실 겁니다.”
“만나게 되다니? 설마……?”
“예. 말리티아도 초대했거든요. 곧 파티를 열 계획입니다. 친척들과 친구들에게 시스를 소개하는 파티를. 말리티아는 다른 손님들보다 며칠 일찍 와서 묵으라고 해 두었으니 모녀간에 회포를 풀 시간은 부족하지 않을 거예요.”
“파티? 그런 일이라면 미리 의논을 했어야지.”
“내 힘으로 준비해서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고 싶었어요. 아시면 좋아하실 줄 알았는데.”
아이처럼 천진한 미소를 띠고 말하는 데세르를 보는 다피넬의 눈 속에는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씁쓸함과 수심이 가득했다.
“뜻은 알겠다만…….”
다피넬은 식탁 아래에서 두 손으로 치맛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천만에! 말리티아 그 망할 노친네가 간사한 혓바닥을 놀려 널 꼬드긴 거야. 다피넬은 말리티아를 어머니라고 부를 생각이 없었다.
“무엇이 어쨌든, 어머니의 어머니잖아요? 기뻐하실 줄 알았는데 말입니다.”
시스는 깜짝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고 조용히 식사를 계속했다. 그러면서도 두 귀는 저 앞의 두 모자에게 쫑긋 열려 있었다. 말리티아가 다피넬의 어머니였어? 그런데 왜 저렇게 불안하고 불편한 기색인 걸까?
“솔직히 네가 전보다 건강해지고 활기가 생긴 것 같아서 그건 더없이 기쁘다만, 나는 말리티아를 만나고 싶지 않다. 하지만 내가 반대해도 넌 말리티아를 이 저택에 들이고야 말 작정인 것 같구나. 그렇지?”
“어머니도 마음을 좀 여세요. 그쯤 하셨으면 이제 화해할 때도 됐잖아요? 다 좋아질 거예요. 그러니 어머니, 아무 걱정 마시고 나한테 다 맡기시면 됩니다.”
다피넬은 조용히 일어나 식당을 나갔다. 심장이 터질 듯 쿵쿵댔다.
아아, 보니타. 이를 어쩌지? 그녀가 살아 있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