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외로 많아서 깜짝 놀랐어요. 텔룸에서도 찾기 힘들 법한 것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 왔니?”
마르타를 대동하지 않고 온 다피넬이 스스로 의자를 빼 식탁에 앉고 나서 물었다. 상냥한 어조는 아니었지만 시스를 묶어서 가둘 때의 살벌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멋진 고대문자가 새겨진 아치형 석판을 사려고 했는데 아쉽게도 화구상 주인이 그건 파는 물건이 아니라고 해서 단념했고, 불새의 깃털이라는 게 있기에 그걸 집었더니 이미 예약이 걸린 거라고 해서 그것도 못 샀습니다.”
시스의 말투 역시 마찬가지였다. 붙임성 있다고는 할 수 없으나 적의 또한 느껴지지 않는 차분한 투였다.
사정 모르는 누군가가 본다면 두 여자 사이에 험악한 대립이 있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할 분위기였다.
“불새의 깃털은 불에 타지 않는다고 하잖아요? 시험해 보고 싶었는데…….”
벽난로 속에서 타는 장작을 쳐다보며 말하는 시스의 표정은 제법 진지했다.
“불새의 깃털이라면 꽤 비쌀 텐데, 불에 태워 보려고 비싼 값을 치르겠다고? 그랬다가 허무하게 타 버리기라도 하면?”
불새라면 요정이나 유니콘과 마찬가지로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는 노래나 전설 혹은 고대의 문서와 그림에나 등장하는 존재였다. 화구상에 전시된 불새의 깃털은 진짜가 아니었고, 다피넬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다피넬은 비어져 나오려는 쓴웃음을 겨우 참았다.
골동품을 보는 안목과 식견은 경험을 토대로 길러지는 것이었다. 다피넬은 시스가 오티움의 수업을 청강한 것은 알았지만 시스의 재능을 아끼는 몇몇 교수들로부터 숨은 가르침을 받았다는 것은 몰랐다. 시스가 레이디 앙켑세라와 손잡고 쌓은 은밀한 이력은 말할 것도 없고.
“깃털을 샀다고 가정했을 때, 타지 않는다면 깃털이 진짜일 테니 좋은 일이고, 타 버리면 가짜라는 걸 알게 될 테니 나쁜 일은 아닙니다. 화구상 주인이 믿을 수 없는 인간이라는 걸 알게 되는 거니까요. 그러면 깃털 값은 결과적으로 배움을 얻은 값인 겁니다.”
진짜 자신의 모습을 사람들에게 감추기 위해 시스는 필요할 때마다 연기를 했다. 지금 시스는 물정 모르는 귀족 아가씨를 연기하는 중이었다. 그 깃털이 불새의 것일 리 없다는 건 시스도 잘 알았다. 그건 반짝이는 가루를 뿌린 홍금강앵무의 깃털이었다.
다피넬은 시스가 글라키에사 가로부터 하숙비조차 지원받지 못했다는 사실까지는 알아내지 못했다. 하숙비를 벌기 위해 시스가 앙켑세라로부터 다양한 일감을 받아 해치우며 살았다는 것도, 그 일감이라는 게 허드렛일부터 비밀스러운 스파이 노릇까지 아주 다채로웠다는 것도.
“알고 보면 네가 넬리사의 소개장을 가지고 갔기 때문에 화구상 주인이 널 배려하는 차원에서 그 물건들을 팔지 않은 것이란다. 그 아치형의 멋진 옛 석판은 위조품이야. 불새의 깃털도 가짜고.”
“위조품, 가짜라고요? 왜 그런 짓을 하죠?”
정말 몰랐다는 듯 시스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손님을 시험하는 거야. 정말로 진귀한 물건을 보여줄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
“그런 줄도 모르고 나는 번번이 허접한 것들만 골라서 밑천을 다 드러내고 말았군요.”
창피하고 분한 척 시스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상관없잖니? 어차피 넌 골동품 같은 것에 별 관심이 없으니까.”
희미한 웃음기와 함께 다피넬의 눈이 예리하게 빛났다. 그런 것에 관심이 있었다면 저택 곳곳에 놓인 고풍스러운 장식품들이나 고가구에 저토록 무관심할 수는 없었겠지, 하고.
잠시 침묵하던 시스는 부인하는 말 대신 겸연쩍은 미소를 지었다.
“네가 아니라고 하지 않으니 더욱 궁금해지는구나. 그림이나 골동품 같은 것에 취미가 없는 네가 왜 굳이 넬리사에게 소개장까지 받아서 화구상에 갔어야 했는지 말이다.”
“만날 사람이 있었습니다.”
주눅 들거나 당황하는 기색 하나 없이 곧바로 털어놓는 시스를 다피넬은 의아하게 응시했다. 다피넬의 가슴 속에서 불안이 가물가물 피어올랐다.
만날 사람? 혹시 페르베아투 왕실에서 보낸 사람일까? 시스의 결혼에 문제가 없는지 확인하려고? 문제가 있다면 시스를 빼앗아 가서 코르다 자작에게 다시 팔아먹으려고? 아바루스 왕이나 티티아 왕비라면 그런 짓을 하고도 남지.
시스를 데세르의 곁으로 데려오기 위해 왕과 왕비에게 바친 금화와 재물을 되새기며 다피넬은 지그시 어금니를 물었다. 욕심 사나운 속물들 같으니라고.
문에서 노크 소리가 나더니 마르타가 들어왔다.
“공작님께서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고 하십니다.”
데세르가 늦는다니 다피넬로서는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그가 오기 전에 이야기를 마무리 지을 수 있을 테다.
“알았어. 나가 봐.”
마르타를 내보낸 다피넬은 시스에게 묻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그래서 누구지? 널 만나러 온 사람이?”
사실상 추궁이었지만 다피넬의 목소리는 나른하고 여유로웠다. 그 아래에 감춘 불안이나 동요를 시스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여기 오기 전에 텔룸에서 이미 해 두었던 약속입니다.”
숨길 이유도 거리낄 것도 없다는 태도로 시스는 냉큼 대답했다.
화구상 주인이 앙켑세라의 진짜 이름이나 정체를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앙켑세라에게 들었다. 그러니 화구상 주인이 다피넬에게 제대로 말해줄 수 있는 건 앙켑세라의 가명과 변장한 용모와 그녀가 텔룸에 거주한다는 사실뿐이다.
“실은 친부모님을 찾고 있는데, 그 일을 맡아서 해주는 사람의 심부름꾼입니다. 이번에도 찾지 못했답니다.”
거짓말을 술술 늘어놓는 시스의 낯빛이 쓸쓸했다. 모성애 강한 다피넬이 고아의 서글픔으로 오해하기에 알맞은 낯빛이었다. 비록 시스는 그런 의도가 아니었지만.
다피넬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바루스 왕이나 코르다 자작 쪽과는 무관한 것 같아서 일단 안도했다. 추후에 화구상 주인의 말을 들어 보면 좀 더 명확해지겠지만.
어느 때보다 착잡한 한 해의 마지막 날입니다.
슬픔과 아픔을 안고 계신 분들이 부디 공감과 위로와 연대의 온기 안에 계시기를...
모두들 안온하고 평화롭게 오늘을 보내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