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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경고하는 다피넬

by 화진


다피넬은 단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다. 말리티아의 처연한 눈물을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눈빛으로 고요히 응시할 뿐이었다.


그런 다피넬을 보면서 시스는 왠지 모를 위화감을 느꼈다. 결혼 첫날밤 자신을 향했던 다피넬의 불같은 노여움보다 지금의 불가해한 침묵 쪽이 어쩐지 더 위험스러워 보였다.


“나와 말도 섞기 싫은가 보구나. 어쩔 수 없지. 나도 네 응어리가 단번에 풀릴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으니까. 난 그저 네가 용서할 때까지, 아니 용서하지 않는다 해도 마지막까지 용서를 구하겠다는 뜻을 네게 전하고 싶었단다. 그래서 이렇게 널 보러 온 거고.”


말리티아는 슬픈 목소리로 나긋하게 덧붙였지만 다피넬은 교묘하게 시선을 비껴 그녀를 외면해 버렸다. 가증스럽고 지긋지긋해서 다피넬은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늘 이런 식이었지, 당신은. 누구나 속을 정도로, 당신 자신마저 속을 정도로 진심을 가장할 줄 알았지. 하지만 난 이제 당신의 실체를 알아. 나는 당신을 안 믿어. 두 번 다시 당신에게 속아 넘어가지 않아.


“잘 왔어요, 말리티아. 머물고 싶은 만큼 머물러도 좋습니다. 그러니 모녀분의 오해를 풀 시간은 부족하지 않을 겁니다.”


데세르가 말리티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말리티아가 무릎을 굽히고 데세르의 손등에 공손한 입맞춤을 했다.


“감사합니다, 데세르 공.”


두 사람의 태도에서 시스는 말리티아가 귀족 출신이 아닐 거라고 짐작했다. 말리티아의 언행은 점잖았지만 그녀는 데세르의 앞에서 지나치리만큼 자신을 낮추었고, 데세르는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데세르는 자신의 외할머니인 말리티아에게 존칭을 쓰지 않았다.


“공작 부인, 반가워요. 과연 듣던 대로 아름답고 생기가 넘치시는군요.”


데세르의 손을 놓고 시스의 앞으로 다가온 말리티아가 상냥한 미소를 띠고 말을 붙였다. 그녀의 진회색 눈동자에 이채가 돌았다. 두 눈만큼은 젊은이 못지않게 반짝이는구나, 시스는 놀라면서 생각했다.


“그냥 시스라고 불러 주세요. 말씀하실 때도 굳이 격식 차리지 마시고요.”


무릎을 살짝 굽혀 인사하면서 시스가 말했다. 말리티아도 똑같이 무릎을 굽혔다 폈다.


“어머나, 성격도 좋으셔라. 그렇다면 나도 그냥 편하게 말리티아라고 불러 주렴. 앞으로 잘 지내보자꾸나, 시스.”


“그래요, 말리티아.”


“그럼, 친구가 된 기념으로 한 번 안아 봐도 되겠니?”


즐거운 얼굴로 말리티아가 제안했다. 시스는 속으로 ‘친구라니, 너무 앞서나가시는군요.’라고 생각했지만 그 생각을 입에 담지는 않았다.


“안 될 까닭이 없지요.”


시스를 앞질러 데세르가 흔쾌히 대답해 버렸다.


순간 시스는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말리티아가 질문하면서 바라본 쪽도, 실제로 허락의 답을 한 쪽도 자신이 아닌 데세르였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러나 노부인과의 포옹 자체는 거북한 일이 아니었기에 시스는 자신을 가볍게 안는 말리티아의 양 팔에 순순히 몸을 맡겼다.


“우리 공작님이 이렇게 좋은 배필을 만나셔서 나는 참으로 기쁘단다.”


작은 소리로 속삭이는 말리티아의 품은 포근하고 향긋했다. 그런데.


말리티아가 시스에게 둘렀던 팔을 거둬들이는 순간 시스가 인상을 찡그리며 ‘아!’하는 소리를 냈다.


“저런! 아유, 미안해서 어쩌나.”


자신의 소매와 시스의 팔을 번갈아 보며 말리티아가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녀도 놀라고 당황한 듯했다.


“여기 온다고 새 옷을 지어 입었는데 급하게 짓다 보니 그만 이런 실수를…….”


자신의 검은 소맷자락에 꽂혀 있는, 방금 시스의 팔을 찔러 버린 옷핀을 빼내며 말리티아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그러셨군요. 괜찮아요. 조금 놀라긴 했는데 이젠 괜찮습니다.”


시스가 밝게 말했다. 한두 방울의 피가 연한 물빛 드레스에 배어나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따끔함도 가셨고 옷핀이나 바늘에 찔려본 적은 이전에도 많았다. 별일도 아니었다.


“늙은이가 허술한 모습을 보여 면목이 없는데 그리 너그럽게 말해 주니 정말 고맙구나.”


“진짜 괜찮으니 마음 쓰지 마세요.”


말리티아가 촉촉해진 눈으로 끄덕였다.


“자, 이제 그만 들어들 갑시다. 바람이 습하고 거칠어진 걸 보니 곧 다시 비가 시작될 것 같으니까.”


흔들리는 조경수들을 보며 데세르가 말하고는 먼저 뒤돌아 저택 현관을 향했다. 말리티아가 곧 그의 뒤를 따랐다. 가만히 서 있던 다피넬이 걸음을 떼려던 시스를 붙잡았다. 그러고는 도열해 있는 아랫사람들에게 들어가라는 명을 내렸다.


“잠깐 나 좀 보자꾸나.”


둘만 남자 다피넬이 시스를 돌아보았다. 시스는 몹시 착잡해 보이는 다피넬을 따라 그녀의 방으로 갔다.


“소매를 걷어 상처를 보여 주겠니?”


“아니, 괜찮습니다. 상처라고 할 것까지도 없는 걸요.”


시스는 웃어 보였다.


“물론 괜찮겠지. 그래도 약은 발라야 해.”


다피넬이 침대 옆에 둔 작은 장을 열고 약병 하나를 꺼내왔다. 자수정으로 만든 자그맣고 아름다운 약병이었다.


“내가 너무 유난을 떤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런 게 아니라면 혹시 너…… 나를 의심하는 거니? 이 약으로 너에게 나쁜 짓이라도 할까 봐서? 아니야. 절대 그렇지 않아. 나의 보니, 보니타를 걸고 맹세할 수 있어. 보니타는 내 쌍둥이 자매란다.”


쓸쓸하고 서글픈 어조에가 마음에 와 닿아서 시스는 잠자코 팔을 걷어 올렸다. 팔꿈치보다 조금 위쪽의 하얀 피부에 보일까 말까한 붉은 점 같은 피딱지가 맺혀 있었다. 다피넬이 시스의 팔을 잡고 거기에 약을 한 방울 떨어뜨렸다.


“시스. 말리티아와 가깝게 지내지 마라. 내 어머니를 두고 이런 말을 하는 건 우습지도 않은 일이다만 말리티아는 겉보기와 전혀 다르다. 무서운 인물이야. 내가 너와 데세르에게 이런 경고를 해두지 않을 수가 없을 만큼 말이다.”


깨끗한 흰 천으로 약물에 녹은 피딱지를 말끔히 닦아내며 다피넬이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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