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티를 엿새 앞둔 날 오후, 프레케스 저택에 새로운 손님이 왔다. 말리티아가 받았던 대대적인 환영은 없었다. 이 손님은 허례허식이나 요란한 분위기를 좋아하지 않아서 자신이 언제 도착할지 미리 알려주지 않았던 것이다.
“고모님께서는 역시나 이번에도 불시에 들이닥치시는군요. 마르타. 어서 가서 데세르와 시스를…….”
급히 정원으로 달려 나온 다피넬이 못 말리겠다는 듯 머리를 흔들었다. 그러나 얼굴은 소리 없는 웃음으로 환해졌다.
“아니다. 이따 저녁 식사 때 보면 되지. 아이들을 번거롭게 하지 말자꾸나. 네가 반나절 동안 이 늙고 가난한 미망인의 말상대를 해주는 게 싫지만 않다면.”
모데샤가 다피넬의 말꼬리를 자르며 마르타를 향해 손을 내저었다. 일흔 살이 훌쩍 넘은 모데샤는 키테르의 고모로 다피넬에게는 시고모가 되고 데세르에게는 대고모였다.
“이렇게 와 주셔서 제가 얼마나 기쁜데요. 저택이 손님들로 북적거리기 전에 오셔서 더 기쁘고요. 적어도 며칠은 고모님과 오붓하고 조용하게 지낼 수 있어서요.”
다피넬이 활기 있게 말하며 모데샤의 야윈 몸을 안았다. 모데샤도 그녀를 마주 안고는 다정하게 등을 쓸어 주었다. 두 사람의 태도는 허물없고 친밀했다.
“네가 효심 깊은 아들을 두었더구나. 데세르가 편지를 보냈단다. 내가 좀 일찍 와서 너와 둘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를 바란다고 말이다.”
데세르의 편지에는 다피넬이 최근 들어 부쩍 신경이 날카로워진 것 같다고도 씌어 있었다. 그러나 모데샤는 그런 말까지 다피넬에게 전할 만큼 아둔하지 않았다. 모데샤는 다피넬을 좋아했고 잘 알았다. 신경이 날카로워졌다면 그만한 까닭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데세르가 건강해지고 시스와 사이좋게 잘 살기만 하면 저는 고모님 댁으로 가서 함께 지내고 싶어요. 신전에 갈 때마다 여신께 소원하는 기도랍니다. 제가 너무 큰 걸 바라는 걸까요?”
“아니. 세상 모든 어머니들이 바라는 평범한 소원이지. 그런데 내 집은 네가 귀로 듣고 떠올리는 것보다 훨씬 작고 초라한데, 괜찮겠니?”
“그럼요. 괜찮고말고요.”
그 기도가 이루어지기만 한다면 다피넬은 모데샤 고모의 작은 집보다 더 좁고 허름한 단칸 오두막에서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다피넬은 여신에게 기도할 때마다 맹세했다. 소원을 들어주신다면 아버지로부터 받은 유산은 전부 자선을 베푸는 데 쓰겠다고.
둘이 팔짱을 끼고 저택으로 들어가려던 차에 뒤에서 말발굽 소리가 났다.
“맙소사, 시스! 조심해야지!”
다피넬이 외쳤다. 저만치에서 천천히 달려오는 흰 말 위에 앉은 시스의 몸이 불안정하게 흔들거렸다. 시스가 말 등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던 것이다.
“시스? 나이아시스 글라키에사? 저 아이가 말이냐?”
모데샤도 깜짝 놀랐다. 다피넬은 대답할 겨를도 없이 말을 향해 뛰어갔다. 그러고는 말의 고삐를 잡았다. 다행히 말의 속도는 빠르지 않았고 그 말은 프레케스 가의 마굿간에서 가장 영리한 녀석이었다. 히히힝 소리와 함께 말이 멈춰 섰다.
“시스, 시스, 시스!”
말이 멈춘 줄도 모르고 계속 졸음에 취해 있는 시스의 팔을 다피넬이 잡아 흔들며 큰 소리로 불렀다. 이윽고 시스가 천천히 눈꺼풀을 밀어 올리더니 눈에 힘을 주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말을 탄 채로 그렇게 정신없이 졸다니! 지금 이게 말이 되는 일이니? 그러다 말에서 떨어지기라도 했으면…….”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피넬이 꾸짖었다.
“앞으로는 주의하겠습니다.”
스스로도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한 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방금 있었던 일을 되짚어 보던 시스가 자세를 바르게 하고는 얌전히 말했다.
“당분간 말은 타지 않는 게 좋겠다.”
“그래. 그러는 편이 좋겠구나.”
모데샤가 다가와 다피넬의 말에 무게를 더했다. 시스는 알아들었다는 듯 잠자코 있었다. 저택 주변 지형의 탐색은 이미 다 해두었다. 말들 중 가장 영리한 흰 말과도 충분히 서로 익숙해졌다. 떠날 때까지 며칠 말을 타지 않아도 문제될 건 없었다.
“시스. 이분은 모데샤 대고모님이시다. 인사드려라.”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나이아시스입니다. 시스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반갑다, 아가. 데세르가 성대한 파티를 열어 두루 자랑하고 싶어 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구나. 예쁘고, 생기 넘치고, 당당하고. 아아, 이 세상에 젊음만큼 좋은 것은 없지. 젊음이 발하는 빛만큼 아름다운 것도 없고. 젊음은 어차피 한때뿐이니 가졌을 때 마음껏 낭비하며 살거라, 아가.”
축복의 말이 식상하지 않아서 시스는 유쾌한 기분이 되었다. 그녀는 모데샤를 향해 무릎과 고개를 살짝 수그렸다.
“감사합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젊음을 낭비해 보겠습니다.”
모데샤의 즐거운 웃음소리가 산들바람처럼 정원수 사이로 스며들었다.
“말은 마굿간에 데려다 놓고 너는 가서 좀 씻으렴. 온몸에 흙먼지와 낙엽 부스러기가 잔뜩 묻었구나.”
다피넬의 말에 시스는 순순히 말을 끌고 그 자리를 떴다.
“조금 별나 보이기는 하다만 제법 괜찮은 아이로 보이는구나.”
시스가 모퉁이를 돌아 보이지 않게 되자 모데샤가 평했다.
“예. 고집도 세고 성격적으로 다듬어지지 않은 데가 있긴 하지만, 본성은 흠 잡을 데가 없는 것 같아요.”
“그런데 어째서 저 아이를 보는 네 눈에 그렇게 수심이 가득할까?”
아픈 데를 찔린 사람처럼 다피넬은 눈썹을 내려뜨렸다.
“시스와 데세르의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아요. 거기에는 제 잘못도 있고요.”
“저런…….”
안타까운 탄식을 흘리며 모데샤가 다피넬의 손을 가만히 감싸 잡았다. 두 사람은 손을 잡은 채로 저택 현관으로 들어갔다.
저 위에서 창문으로 그들을 내려다보던 두 쌍의 눈이 창가를 떠나 안쪽으로 사라졌다. 그곳은 데세르의 서재였다. 말리티아와 데세르는 느긋한 미소를 띤 채 벽에 걸린 초상화를 올려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