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스는 느긋하게 목욕을 즐겼다. 안전하고 편안한 장소에서 시간에 쫓기지 않고 목욕을 하는 게 얼마만인지. 물이 식지 않도록 쿠라가 일정한 간격으로 더운물을 보충해줬고, 욕조는 크고 호화스러웠다.
목욕을 마치고 나올 즈음에는 쐐기풀의 독이 올랐던 얼굴도 거의 본래대로 돌아왔다. 인티무스가 준 약은 과연 효험이 빠르고 좋았다.
“이걸 입으세요. 저의 귀여운 레이디께서는 입지 않는 것이랍니다. 이런 옷이 있었는지도 잊으셨을 테니 돌려주지 않아도 됩니다. 레이디 나이아시스의 옷은 세탁해 드리지요.”
쿠라가 프로핀의 것이었던 옷을 건네주고는 시스의 옷가지들을 주섬주섬 집었다.
“고마워요. 아, 내 옷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이리 주고요.”
“알겠습니다. 그럼 이 옷들은 개켜서 여기 두지요.”
쿠라는 은근한 미소를 남기고 나갔다. 미소에 담긴 의미는 프로핀에게는 비밀로 할 테니 염려 말라는 것이었다. 시스가 프로핀의 욕조를 썼다는 것도, 옷을 빌려 입었다는 것도.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시스가 식당으로 갔을 때 인티무스는 크고 긴 식탁에 혼자 덩그렇게 앉아 한 손으로 머리를 괸 채 골똘한 생각에 잠겨 있었다.
“네가 준 그 약, 약발이 끝내주는데?”
시스가 다가가 어깨를 툭 치자 인티무스가 화들짝 고개를 들었다.
“뭐라고? 방금, 뭐라고 했어?”
대답 대신 시스는 자신의 얼굴을 가리켰다. 눈언저리와 뺨과 턱 한쪽에 아주 희미하게 울긋불긋한 기가 남아 있었지만 일부러 유심히 들여다보지 않고서는 모를 정도였다. 쿠라가 준, 진정 효과가 있는 화장수를 발랐으니 그 흔적도 곧 사라질 터였다.
“아, 약이 잘 들었다는 말이구나.”
인티무스가 시스의 얼굴을 가만하게 살폈다. 처음에는 환자를 보는 약제사의 눈이었으나 점차 그 눈에 감미로운 고뇌가 깃들었다. 때마침 울린 식사 종소리가 감상적인 기분에 젖을 뻔한 인티무스를 구했다.
아디코와 쿠라가 요리와 음료를 들고 와 차려주고 묵묵히 문밖으로 물러났다. 시스가 식사를 마칠 때까지 인티무스는 말이 없었다. 시스도 머릿속이 복잡했기에 자신의 생각에 빠져 조용히 먹기만 했다.
“가장 오래된 유물 말이야.”
식당을 나서면서 인티무스가 아까 입에 올렸던 화제를 다시 꺼냈다.
“내가 세쿤도 교수님을 만나서 여쭤 볼까? 너에게 중요한 일이라고 밝히면 세쿤도 교수님께서 나 몰라라 하진 않으실 거야. 알고 계신다면 말씀해 주실 것 같은데.”
“아니, 그럴 것 없어. 중요한 일은 무슨. 갑자기 좀 궁금했을 뿐인 걸.”
시스는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자신의 일에 인티무스를 깊이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 그렇다면 뭐.”
“넌 그냥 나를 며칠 동안만 숨겨주면 돼. 지금 내가 문제 상황에 맞닥뜨린 건 맞는데, 별 것 아니야. 내가 곧 다 해결할 수 있어. 그러니까 넌 그냥 평소대로 태평한 인티무스로 있어주면 좋겠는데. 그런 걱정스러운 눈빛은 거두고. 응?”
손을 뻗어 인티무스의 미간을 펴 주면서 시스가 유쾌하게 웃었다. 인티무스는 시스의 손을 치우면서 억지로 웃어 보였다.
“알았어. 그런데, 며칠 동안이라면. 며칠 후에는 어디로 가려고? 페르베아투의 카푸?”
“맞아. 결혼을 무효화해야 하니까.”
아직 확실히 결정한 것은 아니었지만 시스는 수긍하는 대답을 했다. 인티무스가 이렇게 알고 있는 편이 서로를 위해 좋다고 여겨졌다. 어떻든 간에 텔룸을 떠나기 전에 오티움의 지하 수장고 안쪽 석실에 들어가 보는 것이 현재로서는 시스의 최우선 목표였다.
가장 오래된 유물과 심장을 빌린 자에 대해 알아내야만 일 년의 시한부가 된 스스로의 생명을 구할 희망이 생기는 거니까.
“으아, 졸려. 레이디 앙켑세라가 올 때까지 좀 자 둬야겠다.”
시스는 과장된 하품을 하고는 인티무스에게 손을 흔들고 손님방으로 들어갔다. 방문이 닫히는 것을 보고 나서 인티무스는 자신의 방으로 가 외출할 채비를 차렸다.
낮잠에 들었던 시스는 노크 소리에 눈을 떴다. 살며시 문이 열리더니 귀에 익은 목소리가 그녀를 불렀다.
“하아, 시스.”
한숨 섞인 말투에서 앙켑세라의 심경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시스는 벌떡 일어나 침대에서 내려섰다.
“그러게요. 이게 다 무슨 일인지.”
앙켑세라가 하려던 말을 시스가 대신했다. 하녀 차림의 앙켑세라가 모자를 벗고 다가섰다. 두 사람은 서로의 어깨를 가볍게 안았다가 떨어졌다.
“네가 여기에서 나를 부른다기에 만반의 준비를 하고 왔다. 얼마 전에 프레케스 가에서 보냈다는 자가 널 찾으러 왔었거든. 그때 알았지. 결국 네가 거기서 도망쳐 나왔다는 걸 말이다. 어쩌면 누군가 내 집 부근에서 내가 너와 내통하고 있지 않은지 감시하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 가급적 조심하는 게 좋잖아. 비밀 통로로 옆집으로 가서 하녀 옷을 입고 그 집 뒷문으로 몰래 빠져나와 시장에까지 들러서 왔지 뭐겠니. 내가 장을 봐온 걸 보고 쿠라가 무척 기뻐하더구나.”
지쳤다는 듯 어깨를 두드리고 팔다리를 주무르던 앙켑세라가 안락의자에 몸을 던졌다.
“여전히 빈틈이 없네요. 잘하신 거예요.”
“봄에 레이디 다피넬이 편지를 보냈더구나. 프레케스 가에서 열리는 파티에 참석하라고. 사정이 있어 못 가겠다고 답장을 했지. 네가 그 파티 전에 그 저택을 나오리라고 예상했으니까. 그런데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나쁘게 끝을 본 모양이지?”
“그랬죠. 아주 나빴어요.”
앙켑세라를 마주보며 침대에 걸터앉은 시스가 얼굴을 굳혔다. 말리티아와 흑주술, 살아 있는 인형. 정말이지 끔찍하게 나쁜 기억이었다.
“타키툼에서 여기까지가 서너 달씩 걸릴 거리는 아니잖아. 왜 이제야 온 거야? 오던 중에 또 다른 우여곡절이 있었던 거겠지?”
말하기 난처하다는 표정으로 시스가 끄덕끄덕 인정했다. 그러자 앙켑세라도 더는 캐묻지 않았다.
“그런 옛날이야기 들어본 적 있어요? 다른 누군가로부터 심장을 빌렸다는 내용이 나오는.”
시스는 ‘심장을 빌린 자’라는 명확한 표현을 피해 에둘러 물어 보았다. 골동품에 조예가 깊고 옛것에 박식한 앙켑세라라면 혹시 비슷한 이야기라도 알지 모른다 싶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