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을 빌리는 얘기라고?”
앙켑세라는 눈을 굴리며 생각하더니 머리를 갸우듬히 기울였다. 그러고 잠시 있다가 다시 고개를 갸웃하더니 말했다.
“그런 얘기는 듣도 보도 못했는데…… 다만.”
“다만 뭐요?”
시스가 조바심치며 잡아채듯 되물었다. 그러고 나서야 시스는 깨달았다. 앙켑세라에게 마음을 읽혔다는 걸.
“지나가는 말인 척 묻더니만 역시 뭔가가 있는 질문이었군. 그렇지 않니, 나의 깜찍한 동업자 레이디?”
시스는 허탈한 미소와 함께 한숨을 쉬었다.
“맞아요. 나에게 아주 중요한 무언가예요. 그런데 당신조차도 아는 바가 없다니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어요.”
“사적으로 중요한 거? 아니면……?”
정색을 한 앙켑세라가 무엇을 거리끼는지 시스도 알아챘다.
“당연히 사적인 거죠. 의뢰 같은 게 아니에요. 나는 당신과 동업하던 일을 혼자 할 생각 따위 없어요. 당신의 사업을 방해하거나 당신과 사업적인 경쟁 관계가 되거나 할 일은 맹세코 없다니까요. 그래서 말인데 혹시 우리가 뜻밖의 장소에서 생각지 못했던 모습으로 마주치는 일이 생기더라도 오해하지 말아 줘요. 그건 순전히 나의 개인적인 문제 때문이니까.”
“그러니까 너에게 내가 아는 사기 결혼 문제 말고도 중대한 문제가 생겼는데, 그게 무슨 일인지 나에게 털어놓지는 않겠다는 거구나?”
“남을 끌어들일 만한 일이 아니거든요.”
“그렇구나.”
여느 때와 같이 앙켑세라는 시스의 말을 있는 그대로 산뜻하게 받아들였다. 그러지 않을 까닭이 없었다. 시스와 앙켑세라는 서로 속인 적이 없었다. 솔직하게 말하지 못할 것에 대해서는 아예 말하지 않는 방식으로 서로에게 정직했다.
“심장이라니 말인데. 네 질문의 취지와는 맞지 않지만, 어렸을 때의 일 한 가지가 갑자기 생각나는구나.”
눈을 반짝 치켜뜨며 앙켑세라가 중얼거렸다. 완전히 잊어버리고 살던 기억이 거짓말처럼 문득 떠올랐던 것이다.
“심장을 빌렸다는 게 무슨 뜻인지, 비유적인 건지 직설적인 건지, 나도 뭐가 뭔지 전혀 모르는 걸요, 뭐. 그러니 조금이라도 연결을 지을 만한 점이 있는 얘기라면 다 들어보고 싶어요.”
“내가 아이였을 때 카푸의 시장에서 구걸을 하는 거지 노파를 만난 적이 있었단다. 노파는 내가 들고 있던 잘 익은 무화과를 얻고 싶어 했지. 품속에서 때에 절어 꼬질꼬질하고 다 해져서 나달나달한 천 조각을 꺼내서는 무화과와 바꾸자는 거야.”
아쉬움인지 후회인지 모를 감회로 앙켑세라의 낯빛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나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코웃음을 쳤지. 그랬더니 노파가 그러는 거야. 그 천 조각이 옛날 옛적 상티모니 사람의 유물이라고. 그러면서 더럽고 구멍 난 조각을 내 앞으로 들이밀었어. 거기에 상티모니에 자생했던, 지금은 멸종한 심장꽃이 그려져 있다고 말이야.”
“상티모니라면 아이테르 산의 높은 곳에서 살았었다는 소수 부족, 여인족이잖아요. 그들의 마을과 그들을 공통적으로 상티모니라고 부르고.”
실재했었는지의 여부조차 불투명한, 설화와 풍문의 부족이었다. 상티모니 사람들은 일생에 단 한 번만 산을 내려왔다고 한다. 아이를 가지기 위해서였다. 임신 상태로 상티모니로 돌아간 그녀들이 낳는 아이는 예외 없이 여자아이였다고 한다.
“심장꽃이라는 건 처음 들어요. 그림을 봤나요? 어떻게 생겼어요? 심장꽃이라는 건 그 노파가 지어낸 걸까요, 아니면 정말 그런 꽃이 있었던 걸까요?”
사연도 매력적이었고 심장꽃이라는 것 자체도 흥미로웠다. 시스는 ‘심장을 빌린 자’와의 관련 여부를 차치하고도 심장꽃에 깊은 관심이 동하는 걸 느꼈다.
“그 꽃에 대해서는 나도 그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들은 거야. 아는 바가 없어. 천 조각이 너무 낡고 꾀죄죄해서 그림도 선명하지가 않았는데 흰색과 적색이었고 모양은 옥살리스의 이파리와 비슷했던 것 같아.”
“심장꽃이라는 이름도 정확한 명칭인지 별명인지 알 수 없다는 거네요.”
“그렇지. 어쨌든 네가 심장 어쩌고 하는 바람에 까맣게 잊었던 일화가 되살아났지 뭐겠니. 실은 그때 나는 미친 노파가 나를 속인다고 여기고 코웃음 치면서 피해 버렸어. 나무 꼬챙이처럼 야윈 노파는 나를 쫓아올 힘조차 없어서 그 자리에 주저앉았고. 그게 다야.”
“심장과 심장꽃이라. 게다가 상티모니와 아이테르 산이라니. 끌어다 붙여 보기에 나쁘지는 않네요.”
결국에는 오티움의 지하 수장고 안쪽 석실이 답이었다. 거기에 들어가서 가장 오래된 유물 뿐 아니라 심장꽃이나 상티모니에 관한 단서를 찾아보는 것이 시스에게 가장 시급한 과제가 되었다.
“그래서, 내가 뭘 준비해주면 되지? 일단 카푸로 갈 거지? 왕에게 결혼에 사기가 있었음을 알리고 무효화하겠다고 했었잖아? 그걸 하고 나면 숨어 다닐 필요도 없어질 테고.”
눈치 빠른 앙켑세라는 시스가 자신을 보자고 한 목적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다.
“금화와 은화 약간씩이요. 그리고 카푸에서 내가 지낼 곳과 필요할 때 돈을 융통할 수 있는 업자와 그에게 제시할 당신의 지급 보증도요. 이건 만약인데, 내가 일 년 안에 내 돈을 다 못 쓰면 남는 건 당신이 가져요.”
일 년 뒤에도 계속 살아 있을지 어떨지 몰라서 하는 말이지만, 시스는 진심이었다. 일 년 동안 온갖 노력을 하고도 자신의 목숨을 구할 수 없게 된다면 남은 돈은 어차피 소용없는 것이고. 운이 좋아 죽을 운명을 피한다면 돈은 다시 열심히 벌면 되는 거였다.
“나야 좋지. 근데 일 년? 왜 하필 일 년이야?”
“그냥요. 한 일 년쯤 여기저기 방랑하면서 불꽃처럼 살아 보려고요.”
“언제는 이제부터 조용하게 빈둥거리고 싶다더니?”
시스를 보는 앙켑세라의 눈이 가늘고 예리해졌다. 요컨대 미심쩍다는 것이다.
“레이디 앙켑세라 왈, 인간은 원래 변덕스러운 존재라면서요?”
“그래. 뭐가 됐든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니까. 너 좋을 대로.”
싱거운 소리도 다 듣겠다는 듯 쿡쿡 웃던 앙켑세라가 두 손을 털고 일어나며 말했다. 시스는 속을 알 수 없는 눈웃음을 지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