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풀의 녹음이 시리도록 쨍했던 여름빛의 기억을 비웃듯 음습한 풍경이 이어졌다. 하늘에서는 먹구름이 충돌하며 간헐적으로 폭우를 퍼부었다. 충분한 햇볕을 흡수하지 못한 초목의 빛깔은 칙칙했다. 가지와 잎은 빗물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아래로 축축 쳐졌다.
라무스는 음울한 기분으로 한숨을 삼켰다. 그가 기억하는 시데레온의 여름은, 다른 지역보다 한 발 늦게 찾아오기는 해도, 계절 본연의 푸름과 풍요와 번성만큼은 충만했었다. 그런데 십 년이 넘는 세월을 건너뛰어 직접 맞닥뜨린 고향의 여름은 스산하기만 했다.
카푸의 동정을 먼저 살피려던 라무스는 녹스 성채에서 파보르를 만나고 나서 마음이 바뀌었다. 최우선으로 알아야 할 것은 시데레온의 사정이었다. 그 땅, 그 사람들. 그러니까 자신의 땅, 자신의 사람들.
시데레온의 최남단에 있는 초원 지대의 마을들은 그나마 나은 형편이었으나 넥타르 강을 건너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상황은 나빠졌다. 농작물은 곳에 따라 바싹 마르거나 짓물렀고 사람들은 가난했다.
한 가지 다행하고 감사한 것은 그래도 사람들이 시데레온의 정신을 지키고자 애쓴다는 점이었다. 라무스가 하룻밤을 묵어가기 위해 문을 두드렸던 민가의 주인들은 그를 내치지 않았다.
빈약한 식탁 앞으로 의심 없이 초대하는 이들도 있었고, 낯선 자에 대한 경계심 때문에 헛간이나 지붕만 길게 내어 단 흙마루를 내어주는 이들도 있었다. 어쨌든 다들 길잡이별을 숭상하는 시데레온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다한 셈이었다.
라무스에게 묵을 지붕을 내어준 마을은 다음날 날씨의 가호로 그 보상을 받았다. 비가 계속되던 마을에는 햇살이 내리고 가뭄으로 타들어가던 마을에는 단비가 내렸다. 라무스는 언제나 반나절 정도 마을 일을 돕고 나서 다시 길을 떠났다.
그 반나절 동안 보고 들은 것들을 라무스는 가슴에 차곡차곡 담았다. 한탄, 원망, 절망 같은 것들. 때로는 시데레온은 결코 페르베아투 따위에 지지 않는다는 오기와 긍지.
그리고 간혹은 한 가닥 희망. 자취를 감춘 도련님 그러니까 진짜 대공님이 언젠가 돌아와 모든 것을 제자리에 돌려놓아 주시기라는, 희망이기 위해서 존재하는 희망.
라무스가 아세르 가의 성 폴루스 니두스가 있는 카르도의 저잣거리로 들어섰을 때는 늦은 오후였다. 비는 그쳤으나 하늘이 잿빛으로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여름임에도 살에 닿는 바람은 싸느랗기만 했다.
저잣거리에는 변화와 옛 모습이 공존했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몇몇 가게들은 라무스가 기억하는 간판을 아직도 달고 있었다. 라무스는 말을 끌고 산양뿔이라는 이름의 주점으로 갔다. 그의 기억대로라면 삭숨이라는 이름의 덩치 큰 남자가 주인인 주점 겸 여관이었다.
심부름꾼 소년에게 말고삐를 넘겨준 라무스는 넓은 처마 아래의 옥외 테라스의 한쪽에 딱 하나 비어 있던 탁자를 차지하고 앉았다. 얕은 목책 너머로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과 멀리 마을을 둘러싼 숲이 잘 보였다.
다른 탁자들과 약간 거리도 있고 바닥도 판판한 돌로 돋우어 놓은 것이, 테라스에서 가장 좋은 자리인데……. 왜 비어 있었을까? 라무스는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 자리가 자신의 차지가 된 것은 행운 아니면 불운 둘 중 하나일 것만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주점의 손님들이 라무스를 흘깃거리며 일행끼리 소곤댔다. 라무스는 일어나 건물 안 탁자로 옮길까 잠시 고심했다. 시비에 휘말리고 싶지는 않았으므로. 그러나 궁금하기도 했다. 계속 앉아 있으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말을 마구간에 두고 나오던 심부름꾼 소년이 느긋하게 앉아 있는 라무스를 보더니 황급히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곧 이어 안에서 누군가가 나와 라무스의 앞에 섰다.
“이 자리는 주인이 따로 있으니 비켜 주셔야겠소. 안에도 좋은 자리가 많다오.”
라무스보다는 몇 살 위일 듯한 젊은 남자였다. 삭숨이 나오기를 기대했던 라무스는 아쉬움을 감춘 채 무심히 대꾸했다.
“산양뿔에 언제부터 자리를 맡아 두는 법이 생겼나. 삭숨은 이런 식으로 장사하지 않는 것으로 아는데.”
남자가 삭숨과 닮았다는 생각을 하면서 라무스는 등을 뒤로 한껏 젖혀 벽에 기댔다.
“내 아버지는 산양뿔에서 손을 떼셨어. 이젠 내 말이 곧 산양뿔의 법이지.”
“그래? 삭숨의 아들이었군. 나도 말썽 피울 생각 같은 건 없어. 자리의 주인이 오면 그때 비켜 주지. 그렇게 알고 솔잎 에일이나 한 잔 가져다주지?”
삭숨의 아들이라면 몬스? 어릴 때와는 전혀 딴판으로 자랐군. 라무스가 기억하는 몬스는 통통했는데 눈앞의 몬스는 살집이 없는 보통의 체격이었다.
당당한 라무스를 보며 몬스는 갈등했다. 말썽꾼이나 주정뱅이를 처리하는 수하들을 불러 이 자를 내쫓아 버리는 게 좋을까?
행색은 초라하지만 왠지 모를 위엄이 느껴졌다. 괜스레 낯이 익은 듯도 하지만 처음 보는 자였다. 말투가 꽤 무례하다면 무례한데 그게 무척이나 자연스러워서 몬스를 혼란스럽게 했다. 또한 저 자가 지니고 있는 장검과 그 손잡이에 손을 얹은 품새에서는 위험의 냄새가 풍겼다.
몬스는 오늘 같은 날 산양뿔에서 유혈 사태가 벌어지기를 원치 않았다. 정확히는 누군가에게 그런 험한 꼴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까 저 사내가 버티고 앉은 저 자리의 주인에게.
“어떻게 된 거야, 몬스?”
화가 난 듯한 높고 예쁜 목소리에 몬스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돌아보았다. 목소리의 주인이 잔뜩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말에서 내렸다.
“어서 오십시오. 레이디 페르비아.”
몬스가 레이디 페르비아를 향해 깍듯이 인사하고는 라무스를 노려보았다. 자리의 주인이 오셨으니 당장 비키라는 눈빛이었다.
라무스는 느릿느릿 일어나더니 몬스에게 능청스러운 웃음을 남기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페르비아라면 라무스도 들어본 이름이었다. 자문관이라는 빌미로 시데레온에 와 있는 가투스의 딸, 페르비아 라크리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