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켑세라가 돌아가고 난 뒤 시스는 쿠라를 찾아갔다. 쿠라는 주인들이 찾지 않는 한가한 시간에는 언제나 재봉실에 있었다.
“무엇이 필요하신가요. 레이디 시스?”
“잘 드는 가위를 좀 빌리고 싶은데요.”
“여기 있습니다.”
쿠라는 싸리나무를 엮어 만든 커다랗고 소박한 재봉함에서 반짝반짝 닦아 놓은 가위를 꺼내 주었다.
“아주 좋은데요? 금방 쓰고 돌려줄게요.”
서걱서걱 빈 가위질을 해 본 시스가 만족한 웃음을 띠었다. 쿠라는 천천히 돌려줘도 문제없다는 듯 방금 전까지 쓰던 다른 가위를 들어 보였다.
가위를 가져온 시스는 커다란 거울 앞에 섰다. 등황빛 머리채를 완전히 풀어내려 몇 번 빗더니 가위를 들어 싹둑싹둑 잘라 나갔다. 길었던 머리카락이 몽땅해지자 이번에는 가위를 좀 더 조심스럽게 섬세하게 놀려 머리 모양을 다듬었다.
머리를 거울에 이리로 저리로 비춰 보며 가위 끝에 정성을 들인 결과 마침내 시스는 짧고 구불거리는 머리 모양을 한 소년 같은 모습이 되었다.
‘마음에 들어. 그런데 빛깔은 여전히 너무 튀는 느낌이야.’
보는 각도에 따라 울금색과 금빛과 석죽색 등등 다채로운 윤기를 발하는 머리카락에 자부심이 없었다면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주목을 끄는 머리색은 숨어 다녀야 하는 처지에는 도움은커녕 방해만 될 뿐이었다.
‘이 빛깔을 좀 죽이려면 그 나무가 필요한데. 인티무스가 오면 이 부근에 그 나무가 있는지 물어 봐야겠어.’
시스가 자른 머리카락을 말끔히 치우고 쿠라의 가위를 돌려줄 때까지도 외출한 인티무스는 돌아오지 않았다.
시스는 서재로 갔다. 인티무스와 프로핀 남매는 책 욕심이 있어서 오래되었거나 귀한 서적을 꽤 모았다.
프로핀도 오티움 재학생이었다. 그녀의 전공은 고대 문학이었는데, 이것이 그녀가 시스를 싫어하게 되는 계기로 작용했다. 정식 학생인 자신이 고작 청강생에 지나지 않는 시스를 실력으로 이기지 못한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한 것이었다.
청강생인 시스는 오티움의 승급 시험에 응시할 자격이 없었기에 당연히 시험을 치지 않았다. 대신 시험이 있을 때마다 돈을 받고 고대문학 과외 지도를 했다. 심지어 최고 학년인 콰르토 승급 시험까지도 시스에게 과외 교습을 받은 학생들의 통과 비율이 높은 편이었다.
당연히 프로핀은 사이가 버성긴 시스에게 과외를 받은 적이 없다. 신입생인 프리무스에서 알테르 승급과 그 다음의 테르티오 승급에서 연이어 성적이 상위권이었던 프로핀도 콰르토 승급에는 어려움을 겪고 있는 실정이었지만.
오티움에서는 테르티오부터가 승급이 어려운 단계였다. 그래서 수많은 학생이 알테르까지 따고 오티움을 떠난다. 그리고 당연히 테르티오 다음 단계인 콰르토는 한층 더 진입하기가 어렵다. 콰르토까지 수료하고 바칼라 학위 시험에 합격하는 건 실로 소수의 학생들만이 누릴 수 있는 지극한 영광이었다.
프로핀이 수집했음직한 책들을 뒤적이던 시스는 슬며시 웃음이 났다. 프로핀이 이 장면을 본다면 당장 책에서 손 떼라고 길길이 뛰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워낙 프로핀이 시스를 쌀쌀맞게 대하니 시스도 프로핀을 멀리했다. 그렇지만 시스는 프로핀이 싫지는 않았다. 두어 살 아래인 프로핀의 어깃장이 오히려 귀엽다면 귀여웠다. 가장 친한 친구인 인티무스의 동생이기도 했으니까.
시스는 주로 역사나 고대문학 관련 책을 찾아 주르르 넘겨보았다. 그녀가 찾는 건 심장꽃이나 상티모니라는 낱말이었다. 이렇게 쉽게 찾아지지 않을 줄은 알지만 그렇다고 시도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시스로서는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 봐야 하는 것이다.
“역시 없구나.”
혼잣말로 중얼거리면서 시스가 마지막 책을 덮고 고개를 들었을 때는 이미 창밖이 어둑했다. 어느덧 해는 졌고 검푸른 어스름이 스미고 있었다.
“뭐가 없다는 건데?”
등 뒤에서 인티무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왔어?”
“찾는 게 뭔데? 나도 같이 찾아볼게.”
레이스와 실크로 된 커다란 손수건으로 머리를 감은 다음 자락을 길게 늘어뜨려 장식한 시스를 의아하게 보며 인티무스가 다가왔다. 왜 굳이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가린 것인지.
“넌 약제학 바칼라에 사니타스 교수님의 연구생이니까 식물이나 약초에 관해서라면 거의 대륙 최고의 지식을 갖고 있잖아. 그래서 말인데, 심장꽃이라는 게 있어?”
“심장꽃? 내가 아는 한 그런 이름의 풀이나 꽃은 없어. 심장꽃이라는 것의 용도나 효능이 어떤 건데?”
“몰라. 아주 예전에는 아이테르 산에 그런 게 자랐었다나 봐. 나도 오다가다 얼핏 주워들은 얘기지만.”
“아이테르 산? 그 산이라면 우리가 모르는 초목이나 꽃이 있을 수도 있겠지. 있다 해도 찾을 수 없겠지만. 아이테르 산 자체가 어디인지를 지금은 아무도 모르니까.”
“그럼 소문을 내 볼까? 아이테르 산에 심장꽃이라는 불로불사약이 있다고. 이런 소문이 나면 아이테르 산을 찾겠다고 나설 사람들이 제법 있을 텐데.”
“나쁘지 않은 생각이네.”
“웃자고 해 본 말이야.”
시스가 손을 내젓더니 머리에 쓴 것을 휙 벗었다.
“시, 시스! 머, 머리가……. 도대체 왜 그런 거야?”
너무 놀란 나머지 말을 더듬는 인티무스를 보며 시스는 깔깔거렸다.
“잘랐어. 당분간은 예의니 범절이니 따지는 석상에 나갈 일도 없고, 너도 아는 것처럼 지금 난 도망자잖아. 아무래도 이게 편하지. 그래서 말인데 저택 근처에 느릅나무 있어? 느릅나무 껍질이 필요한데.”
“머리 색깔 때문에?”
“역시 약제학 우등생이군. 맞아. 느릅나무 껍질로 낸 물에 감으면 빛깔이 어둡게 착색될 거 같아서.”
“그렇지. 느릅나무 껍질이라면 내 약장에 있으니까 그걸 써.”
“잘됐다. 도끼 들고 나무 베러 갈 작정이었는데.”
“너라면 그러고도 남지. 그런데 말이야 너, 예의니 범절이니 따지는 석상에 갈 일이 있어. 나와 함께. 학술적인 자리고, 네가 위험해질 염려는 조금도 없는 자리니까 다른 걱정은 마. 하지만 예의니 범절인지는 갖춰야 하는데.”
시스의 소년 같은 머리를 보며 인티무스가 혀를 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