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개조』를 위한 제언
-‘적정이윤 개념’의 자리를 “탐욕”이 차지하면서
우리 사회의 불행은 시간과 공간을 가리지 않고 견고해지고 있다-
7,80년대 서민들의 재산형성의 과정은 하루하루 허리띠를 졸라매고 가야 하는 참으로 고단한 길이었다. 쥐꼬리만 한 한정된 수입에서 이것저것 쓸 것을 따지다 보면 턱없이 부족했다. 그러나 우리의 주부들은 위대했다. 우선 저축을 위한 몫부터 떼어놓고 살림을 시작했다. 눈치 없는 손님이 와서 한 끼를 축내고 가면 주부는 남몰래 배를 주려야 했다. 그리고 억척스럽게 적금을 붓고 목돈마련을 위해 계를 들었다. 티끌 모아 소중하고도 뿌듯한 성취를 이루어 아이들의 대학 입학금도 만들고 월세방에서 전세방으로 그리고 작지만 내 집 마련의 꿈을 실현하면서 수십 년의 세월을 보상받고 진한 행복감에 온 가족이 기쁨의 눈물을 함께했었다.
2000년대, 근세 이래 최대의 물질적 풍요와 세계 10대 경제대국을 이룩한 이 시대, 사람들은 좌절하고 있다. 무엇 때문일까? 지나친 경쟁, 청년실업, 신분상승의 사다리의 상실, 물질만능의 사회적 풍토, 무엇하나 속 시원히 해결해주지 못하는 정치 등등 많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중에 ‘격차’의 문제가 있다.
의외로 격차의 문제는 ‘적정이윤 개념의 상실’에서 시작한다. 언제부터인가 손님은 왕이라는 말을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큰 손님이 아니면 그렇고 그런 손님은 귀찮을 뿐이다. 박리다매는 옛말이 된 지 오래다. 기성복이 맞춤양복보다 비싸지면서 시장 지배권이 공급자에게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값은 제 가치보다 점점 높게 매겨졌다. 씀씀이가 커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일부계층에서는 연봉도 하는 일이나 벌어들이는 수준보다 크게 높아졌다. 값을 정하는 사람들의 권한이 커지면서 모럴해저드가 마치 당연한 것처럼 만연해갔다. 가격구조의 왜곡은 고비용 저효율 사회의 구조화를 초래해서 경쟁력을 저하시키고 성장의 과실은 일부에 편중되면서 곳곳에서 격차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따라잡기가 요원해졌다. 성장의 저변은 약화되었고 사람들은 불만을 넘어서 좌절을 호소하기에 이르렀다.
적정이윤개념의 상실은 ’ 탐욕‘에도 불을 붙였다. 적정이윤개념의 상실은 염치의 상실을 의미한다. 내 주머니를 채울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거리낌 없이 할 수 있게 된 것은 모든 가치의 정점에 돈이 자리하면서 돈은 모든 것을 해결하는 능력을 갖게 되는데 기인한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그리고 더 가진 자와 덜 가진 자의 차별은 당연시되고 더 가진 자가 승자가 되어 역사를 새로 쓰는 힘을 가지게 되면서 돈은 정의가 되었고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급기야 교육과 종교마저도 돈벌이의 탐욕에 매몰되어 가면서 사람들의 가슴속에서 희망과 구원은 설 자리를 잃었다. 그리고 “세월호”가 탄생했다.
요즈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가 사는 의미가 오로지 한 가지, 돈을 ‘많이’ 가지고 있는가에 좌우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왜 그럴까? 불안하기 때문이다. 모두가 돈을 향해 뛰는데 나만 뒤처지는 것 같기 때문이다. 돈이 적으면 대접을 못 받을 뿐만 아니라 생존마저 어렵다는 공포감이 우리를 옥죄고 있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고비용 때문이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것도, 교육을 시키는 것도, 아파서 치료를 받는 것도, 집을 장만하는 것도, 장 보는 것도 모두 큰 부담이다. 고비용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사회전반에 걸친 적정이윤개념의 상실에서 비롯된다. 모든 사람이 함께 폭리를 누리면 문제는 없지만 안타깝게도 격차는 생긴다. 하지만 많은 경우 지금 당장 폭리를 누리는 것 같아도 길게 보면 부담으로 돌아온다. 결국 물은 모두 몇몇의 깊은 골짜기로 모이게 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눈앞의 폭리를 위해서 염치도, 양심도, 여유도 버리고 탐욕에 날뛰어도 길게 보면 그 불안의 굴레를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 악순환의 고리 노릇을 할 뿐이다.
적정이윤 개념의 회복은 그동안 간과되어 왔고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으로 치부하기가 쉽지만 건강하고 지속가능한 사회를 위하여 우리가 꼭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중요한 과제임을 인식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가개조』의 관점에서 접근되어야 한다. 즉 ‘폭리와 탐욕을 억제하는 사회적 기재’가 마련되고 엄격하게 작동되도록 해야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삶의 참된 가치를 심어주고 일깨워 주는 ‘참된 교육과 문화운동’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가능성은 있다. 왜냐하면 좀 더 여유를 가지고 안정된 속에서 인간답게 삶의 가치를 찾아보고 느껴보는 것을 원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정상화된 교육, 적극적인 소비자 운동으로부터 부당한 이득에 대한 철저하고도 집요한 예외 없는 과세에 이르기까지, 적정이윤 개념이 우리 사회의 기본으로 다시 자리 잡도록 구체적인 조처를 시작해야 할 때이다.
-‘적정이윤 개념’의 회복은
건강하고 지속가능한 사회를 위해 꼭 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