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연수 Mar 23. 2024

우리 사회가 싫어하는 것은
'오만함'이다

10년 전 경인일보 월요논단에 썼던 글 제목이다.

10년 후 지금 축구선수 이강인의 처신이, 의사들의 집단행동이 설 자리를 잃고 있는 것은 우리 사회가 가장 싫어하는 그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급변하는 시대에 아직도 변하지 않고 있는 것이 신기하다.


미국사회는 거짓말을 싫어한다. 실수는 용납해도 거짓말은 관용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거짓말을 하다가 들통이 나면 두고두고 싸늘한 시선이 따라다니는 것은 물론이고 재기의 기회는 사정없이 박탈당한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에서는 막가는 사람도 거짓말을 조심한다. 그렇게 해서 오늘의 선진사회 미국이 되는데 중요한 '신뢰'라는 날실이 형성되었다.


반면에 지금 우리나라는 공인들이 거짓말과 거짓을 저지르고도 승승장구한다. 나쁜 풍토가 자리 잡았다. 사람들이 심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대로라면 우리 사회에서 이 부분이 바뀔 가능성은 없다. '신뢰'가 바로 서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나라가 선진사회가 될 가능성은 제로다. 신뢰가 없는 사회에서는 선진경제도 국민행복도 어렵다. 


그런데 너무나 안타깝게도 우리가 이정표로 삼았던 선진사회 미국이 변했다. 

트럼프가 들어 올린 거짓의 정치가 미국을 넘어 온 세계의 바탕을 뒤흔들며 마치 시대적 물결처럼 유행이 되었다. 눈앞의 탐욕에 기반한 그놈의 팬덤 때문이다. 바이든은 다른가 했더니 똑같다. 

미국은 지금 탐욕의 광풍 속에서 국민이 앞에서 뛰고 방향을 잡아 주어야 할 지도자도 정치인도 어디로 가는 것인지 알려고도 하지 않고 그 뒤를 쫓고 있는 형국이다.  

미국이 변한 것이다. 

이제 미국은 더 이상 우리의 이정표가 될 수 없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길을 만들어 가야 하는 때가 온 것이다.


희망은 있다.

우리에게는 미국의 선진사회의 몰락을 재촉하는 절망적인 방향과는 결이 다른 움직임이 보인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가 특정한 사회적 가치에 대하여 행동으로 나서기 시작한 것이 있다. 

이른바 가진 자의 오만에 대하여 싸늘한 시선을 넘어서는 공분과 무관용의 현상이다. 

대기업 계열사 임원의 여승무원에 대한 도를 넘은 인격무시에 참지 못한 시민들의 반발로부터 시작된 이 현상은 중소 베이커리 업주의 안하무인을 준열하게 꾸짖고 급기야 슈퍼 갑의 지위에 기댄 어느 분유회사 영업사원의 횡포에 함께 분노의 목소리를 낸다.


이 현상은 특정인의 행동의 잘못됨을 징치 하는 것 같지만, 실은 현재 우리 사회가 가진 자 또는 우월적 지위(갑)에 있는 사람이 약자 또는 열등한 입장(을)에 있는 사람을 무시하고 억압해도 괜찮다는 잘못된 사회구조를 인식하고 이를 못 견뎌하고 있는 데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일개 소속원에 불과한 당사자의 그 잘못된 행위를 들어 대기업의 인식과 행태를 비판하고 대기업이 아니라도 가진 자의 오만함과 그 오만함에 기초한 황폐한 기업문화를 준열하게 꾸짖고 징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존심에 유달리 민감한 민족이다. 일제의 비열하고 무자비한 무단통치 아래서도 온 국민이 전국 방방곡곡에서 독립만세를 외친 것은 목숨이 아깝지 않아서가 아니다. 자존을 해칠수록, 오만함이 더할수록 그리고 억누름이 강할수록 참지 못하는 것이다.

DNA에 새겨져 있는 이 기질이 우리에게는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새로운 공동체를 위한 기회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걸러져야 할 것이 있다.

왜냐하면 갑과 을의 관계는 경우에 따라 변하기 때문이다.

을의 입장에서 고통받던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는 갑의 위치가 되기도 하는 것이 다반사다. 또한 갑과 을의 관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경우 외에도 힘 있는 자와 약한 자, 기득권자와 그렇지 못한 자, 젊은이와 노인, 여성과 남성, 정규직과 비정규직 등 많은 경우에서 그렇다.

행여 남의 오만함에는 분노하면서 한편으로는 우리 스스로가 오만함에 길들여져 있지는 아닌지 신랄하게 되돌아보아야 한다. 자기보다 약자라고 생각되면 가차 없이 무시하고 무례하며 경우에 맞지 않는 것도 감수하기를 요구하면서 강자를 인정하지도 않는 비뚤어진 자존심, 아전인수식 자존심으로 뭉쳐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세계인을 열광시켰다. 

멸시받던 한국의 대중문화가 그 고정관념을 깨고 당당히 대우받기를 시작한 의미 있는 반응이었다.

K-pop, 한류의 시작이었다. 그 강남스타일 뮤직비디오에 출연해 '리틀싸이'라는 애칭을 얻은 8세의 어린이가 베트남인 어머니를 두었다는 이유로 온당치 못한 언어폭력을 당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대중문화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은 쾌거이자 국민적 자존심을 높여준 그 작품 속의 천진난만한 어린이에게까지 그런 반응을 보일 수 있었다는 것은 믿어지지 않을 만큼 뿌리 깊은 오만함이자 천민의식의 발로로 우리 모두에게 수치스러움을 느끼게 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강남스타일'에 열광했던 베트남 사람들이 느낄 분노의 대상은 몇몇 온당치 못한 사람들이 아니라 모든 한국인이 될 것이었다. 국제적으로도 다문화 시대에 살면서 인종과 출신국가에 따라 대하는 태도를 달리하는 것은 스스로 다른 사람의 오만함을 탓할 자격이 없음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이 기회에 우리 한국사회는 오만함을 관용하지 않는 사회, 그리고 스스로 오만함을 경계하는 사회풍토를 만드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그리하여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와 존중이 몸에 배고 그로 인하여 생겨나는 밝고 훈훈한 사회분위기 속에서 문화국민으로서의 가치 있는 번영을 구가해가는 인간적인 대한민국으로 발전시켜 나갈 것을 제안한다. 

그리고 이와 함께 '거짓말'과 '거짓행동'을 하는 사람을 철저하게 배척하는 풍토도 만들어서 '신뢰'가 바탕이 된 밝고 행복한 선진사회에서 살게 되는 것도 결코 어려운 목표가 아님을 확신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