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려고 누운 둘째가 내 귓가에 대고 속삭인다. 그게 무슨 소리냐며 그런 얘기하면 못 쓴다고 둘째를 나무랐다. 덧붙여 이미 태어난 동생은 엄마 뱃속에 다시 넣을 수 없으니, 그냥 네 마음을 고쳐 먹으라고 칼바람 같은 조언을 날렸다.
우리 둘째의 하루 일과는 오빠랑 싸우다 혼나기, 여동생이랑 싸우다 혼나기의 연속이다. 애가 너무 심술쟁이인 거 같아 심히 걱정되어 유치원 상담 때 조심스레 이야기했다. 그러자 담임선생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유치원에서는 그렇게 착하고 모범생일 수가 없단다. “어라? 이거 뭔가 익숙한데” 어렴풋이 데자뷔가 느껴졌다.
그랬다. 나는 둘째였다. 집에서는 악녀, 밖에서는 천사 그것이 내 어린 시절이었다. 공부 잘하는 첫째 딸과 그토록 바라던 막내아들 사이에 낀 둘째 딸의 존재감은 있으나 마나 했다. 어릴 때는 엄마를 이해할 수 없어 마냥 서러웠다. 그러다가 결혼하고 애 셋 낳아 키워보니, 사이에 낀 아이를 대하는 엄마의 마음을 조금은 알 거 같다. 이쁜데 우선순위에서 밀려 손이 안 가는 느낌이랄까? 이래서 ‘겪어봐야 안다’고 하나 보다. 그래도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속상한 건 어쩔 수가 없다.
남동생이 태어나면서 귀염 받던 막내에서 덤으로 전락한 지 3년쯤 흘렀을까? 갑자기 밤마다 발목이 아파왔다. 병원에 가서 X-ray를 찍어보면 아무 이상이 없었다. 그런데 욱신욱신 칼로 쑤시는 듯한 통증은 밤마다 계속되었다. 꾀병 의혹을 받다가도 엉엉 울고 있으면 엄마가 잠이 들 때까지 발목을 주물러주시곤 했다. 이 이상한 통증은 스무 살 무렵 대학교에 가게 되어 집을 떠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나중에 대학에 가서 간호학과 정신간호학 시간에 알게 되었다. ‘신체화장애’라고 아무런 이상이 없이 다양한 신체 증상을 반복적으로 호소하는 질환이 있었다. 남동생이 태어나 생긴 박탈감을 견디다 못해서 신체적 통증으로 나타난 것 같다. 결혼 전 간호사였던 엄마는 알고 있었을까? 그래서 적극적인 치료와 검사를 하지 않은 걸까? 아니면 삶에 치여 그냥 두었던 걸까? 어쨌든 잘 커서 지금은 아프지 않으니 다행이라고 해도 되려나.
셋째가 두 돌이 넘자 어린이집에 보내기 시작했다. 세 돌까지 엄마가 데리고 있으면 좋은 걸 알지만, 독박육아에 애 셋은 내 정신을 붙들기도 힘들었다. 매일 불같이 화내는 게 일상이던 어느 날, 나는 더 좋은 엄마가 되고 싶어 셋째를 기관에 보냈다. 그리고 둘째에게 관심과 사랑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사랑에는 노력이 필요한 거였다. 친구 엄마들 말이 둘째가 항상 표정이 어둡다고 했다. 예닐곱 살 어린아이에게 엄마의 사랑은 절대적인 것이니까. 둘째가 원하는 피아노 학원에도 보내주고, 갖고 싶어 하는 학용품도 사주고, 무엇보다 엄마와의 데이트 시간을 약속했다. 셋째의 어린이집 등원 이후로 둘째의 어두운 표정은 눈 녹듯이 사라졌다.
이제 매주 수요일 2시가 되면 둘째를 유치원에서 데리고 나온다, 첫째의 방과 후 수업이 끝날 때까지 1시간 30분 정도의 여유가 있다. 둘째는 그 시간을 너무나 행복해했다. 특별한 이벤트 없이 놀이터를 가도, 엄마 따라 마트에 가도 즐거워했다. 둘째는 돌아다니는 내내 엄마의 손을 땀이 나도록 꼭 붙들었다. 나는 둘째가 말할 때 눈을 바라봐주고 웃어 줄 수 있어서 울컥했다. 셋째와 함께 있을 때는 둘째가 어디 가서 뭘 하는지 볼 새도 없었다. 아마 내가 어릴 때 우리 엄마도 그랬겠지. 그런데 그건 엄마 잘못이 아니잖아. 둘째를 키우다 보니 엄마에 대한 연민이 느껴진다. 엄마는 나름 최선을 다한 거였다.
우리 딸은 정말 좋겠다. 내가 엄마여서. 사이에 낀 둘째로 자란 엄마를 둔 우리 둘째는 나보다 더 사랑받은 기억이 많은 아이로 컸으면 좋겠다. 조금 더 이해해 주고, 조금 더 공감해 주고, 한번 더 안아주며 키울 생각이다. 상처를 대물림할 필요는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