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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lifton Parker Apr 14. 2024

오늘부터 휴직입니다.

April 2024 ~2026 어느 날까지

(커버이미지 : 회사 연수원 주차장. 계열사 전체 대상으로 야근이 많은 사람들 불러다가 리프레시 차원으로 1주일간 명상/참선 같은 것을 하게 하는 곳이다. 나는 미국 가기 전에 이곳에 두 번 갔었다. 바닷가 산속 마을에 있는 예쁜 곳이다.)


대기업 계열사 S를 다니고 있다. 연구소 부장 5년 차, 근속 12년째.

미국 뉴욕에서 주재원 2년 근무 후 복귀. 한국 온 지 1년도 안된 지금 이 시점에 휴직하기로 결정했다.


회사에 2년짜리 휴직을 통보하고 나서 한 달 10여 일 잘도 참았고 드디어 오늘이 왔다.

오늘부터 시작이다. 퇴근하면서 전화기도 껐다. (정확히는 한 달은 휴가 소진, 5월 말부터 휴직 시작이다.)

신청해 놓은 기간 2년을 다 채울지 중간에 돌아가게 될지는 아직 모르겠다.

다행히도 & 고맙게도 아내가 나와 아이를 먹여 살리기로 했다. 역시 아내는 대단한 사람이다.


마지막 출근 날엔 굳이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인사하지는 않았다. 그런 건 20세기 문화다.

친구들은 미리 만났고 헤어질 땐 말없이 간다. 사람들은 타인의 이야기를 크게 궁금해하지 않기 때문에.


오늘 유달리 날씨가 좋다고 느낀 건 기분 탓인가? 여유롭네. 안녕히 계세요. 저는 잠시 떠납니다.


"나는 돈만 받으면 되니까."

4~5년 전 CEO 리스크로 인해 부서에 퇴사/휴직자가 속출하는 상황에서 나는 퇴사의 유혹을 견뎌냈고, 밤낮 주말 없이 일해서 랩장님의 신임을 얻었다.

그래서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갈 수 있었고 여행자가 아닌 현지인으로, 파견자가 아닌 해외 이직한 신입으로 살고자 했다.

미국에서 만났던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노력을 받아주었고 우리를 동네 사람으로, 친구로, 동료로 받아주었다. 2년이 지나 우리는 아쉬움 속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국에 돌아왔을 때는 미국에 뿌리내리기 위해 했던 노력의 크기만큼 문화 충격을 겪어야 했다. "잘 놀다 왔으니 이제 진짜 일 좀 해야죠?" 또는 "2년은 이민 아니고 그냥 여행! 체험!"같이 생각 없이 던지는 무책임한 말들을 침묵으로 견뎌야 했다. 내가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을 편견을 갖고 물어뜯으려는 자들에게 가르침을 줄 방법은 없었다. 그러고 싶지도 않았고.

회사는 냉정하다. 회사가 나를 선발해서 미국에 보낸 것이지만 돌아올 때 내 자리는 남아있지 않았다. 사실 그건 당연하다. 회사도 시간에 따라 변해야 하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애매한 시점에 복귀한 나는 지속 가능하지 않은 업무를 하고 있어야 했고 함께 일하던 친구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진 상태였다.

그리고 40대 후반이 된다는 것은 자신과 부모님의 건강 그리고 아이와의 관계에 더욱 신경 써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 몸이 예전 같지 않음을 느꼈을 때, 부모님의 늙어가는 모습이 나의 미래임을 깨달았을 때, 아이 방의 문을 내 맘대로 열 수 없게 되었을 때, 인생의 후반전이 시작되는 것 같았다. 내 삶의 근본을 이루는 것들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곳으로 조금씩 이동하고 있음을 느꼈다.


회사 내 휴직은 여러 종류가 있는데, 이 회사는 직원 복지 차원에서, 신청만 하면 부서장 결재 없이 최대 2년까지 곧바로 발동되는 휴직이 한 종류 있다.

허리가 아파서 병원에서 주사를 맞아야 했던 어느 날, 내 잘못 없이 그룹장에게 화풀이당한 어느 날, CEO 신년 공지에서 올 한 해 아무리 잘해도 연말 성과급은 없을 것 같다고 했던 어느 날, 신년 조직도에 내 이름이 여전히 현재 위치에 남은 것을 보게 된 어느 날 나는 이 휴직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우리는 맞벌이고 1년 정도 버틸만한 통장 잔고도 있다.

휴직을 하면 임원을 향한 부서 내 부장끼리의 경쟁에서 완전히 뒤처지게 된다. 하지만 지금의 나처럼 애매한 일만 하고 있으면 가만히 있어도 경쟁에서는 탈락이다. 강제로 내려지기 전에 내가 먼저 경쟁을 그만하고 남은 시간 천천히 걸어가는 것도 괜찮은 인생일 것 같다. 내가 경쟁에서 낙오되어도 회사는 대한민국 노동법에 의해 계약한 급여를 현금으로 지급해야 한다. "나는 돈만 받으면 되니까."


나이가 들어 가족이나 내가 아파지면 그때는 당연히 휴직을 써야 하겠지만, 그때 되어 그렇게 쓰는 시간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지금의 회사엔 성과급도 내 자리도 없는데 한 해 버티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룹장이 "우리 오락부장, 회식 장소 좀 잘 정해봐." 하며 내 어깨를 툭 치고 간 그날, 집에 가서 아내에게 고민했던 것을 털어놓았다. 나는 오락부장 하려고 미국에서 돌아온 게 아니다.


이야기를 들은 아내는 오래 고민하지도 않고 그렇게 하자고 하며 응원해 주었다.

당신 일이니, 정하면 나는 맞춰가는 거지. 글 쓰기는 꼭 마무리하세요.


휴직을 통보할 때 회사에 벌어진 일들은 상당히 예상 밖이었다. 그래도 나름 규모가 있는 회사니까 형식적으로라도 가족의 안부를 궁금해하고 부서 내 문제점을 물어봐주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허무하게도 그런 건 없었다. 내 상황을 듣고는 오히려 악담과 저주로 대응하던 그룹장. 그와의 휴직 면담으로 인생이 실전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도 그에게 이것이 실전임을 알게 해 주었다.

'내가 휴직하는데 지금처럼 떠드말고는 당신이 있는 건 없지. 이건 가불기라고.' 

(가불기 = 격투게임의 술. 방어할 수 없기 때문에 상대가 시전 하면 무조건 맞아야 함.)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굉장히 불필요한 행동이다. 왜냐면 시스템상 결재권자가 막을 수 없는 휴직이기 때문에 그저 웃어주고 잘 가라고 해야 부서원이 조귀 복귀할까 말까인데, 나의 통보는 근속 20년 된 그룹장에게도 이성적 판단을 멈추게 한 사건이었나 보다. 아니면 애초에 이성적인 분이 아니었거나.

휴직 통보 후 참여 중인 논문에서는 그 즉시 내 이름이 지워졌지만, 하고 있던 작업으로는 논문 초안을 써 놓고 가라는 어처구니없는 요구는 가볍게 무시했다. "논문 Revision은 휴직 중에도 할 수 있지 않아?" 이게 무슨 개소리인지? 그 좋은 논문은 회사 월급 받는 너 님이 직접 쓰시면 될 듯. 난 무급이라.


해외파견 다녀온 지 1년도 안되어 휴직을 가게 된 것이지만 몇몇 친구들 말고는,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없고 만류하는 사람도 없고 사연을 물어보는 사람도 없었다. 한국 돌아왔을 때 나를 따로 술집으로 불러서 장밋빛 미래를 얘기하던 랩장님은 만나기도 어렵고 인사팀 메일도 없다. 역시 회사는 냉정한 곳이다. 그래 내가 뭐라고 기대를 했나. 휴직에서 돌아오면 부서의 정치 셈법에 내 이름이 더이상 오르내리지 않게 되겠지. 차라리 잘 됐다. "나는 돈만 받으면 되니까"


모처럼의 휴식에 운동도 하고 아이와 시간도 보내고 이것저것 할 일은 많다.

그 외에 가장 중요한 일은 역시 글쓰기를 마무리하는 것이다. 그게 휴직을 하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빠른 시간 안에 초고를 완성하고 매듭을 지어야 한다. 나는 휴식을 위해 휴직을 한 게 아니고 글쓰기 노동을 하려고 휴직을 한 것이다.

모든 내용을 다 쓰고 나서 꼭 다시 뉴욕에 가고 싶다. 떠날 때 사람들과 약속했던 대로 모든 이야기를 다 썼다고 말하고 싶다. 가능하다면 번역까지 해서 가져가고 싶다. 그 책에 모두의 서명을 받아오고 싶다.


뉴욕을 떠나오는 날, 발이 떨어지지 않아 울먹이며 머뭇거리는 나에게 Jean은 웃으며 "Come Visit Us"라고 말해주었다.

글쓰기를 시작할 때부터, 이 브런치의 마지막 이야기는 Owen & Jean과 작별한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날의 이야기를 쓰기 위해 브런치 작가에 도전해서 합격했고, 완주를 향해 가고 있는 중이다.

나는 Owen과 Jean을 꼭 다시 만나러 가야 한다. 약속했던 미국 이야기를 들고.


이제 본격적인 시작이다.


Fondly,


C. Parker


(이 글을 쓰면서 영화 타짜에서 너구리 형사역을 맡은 배우가 작년에 사망하였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다. 재밌게 봤던 장면인데 ... 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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